소설리스트

그딴 계약-80화 (80/83)

외전 7화

“아이 가지고 싶어요.”

하경이 영국으로 유학을 간 지 3개월 만에 이경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하경이 다른 나라로 떠나는 바람에 이경은 요즘 참 허전했다. 재하가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기는 하지만 하경과는 한 번도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어 가슴이 허했다.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불안과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경은 제발 걱정 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식 같은 동생이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언니, 그러지 말고 아기 가지는 건 어때? 나 조카 보고 싶어.’

이경의 걱정이 귀찮았는지 하경이 불쑥 말했다.

하경의 그 말에 아기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를 닮은 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재하에게 말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응?”

침대 헤드에 기대 태블릿을 보고 있던 재하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경이 그를 바라보았다. 재하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여기에 행복 하나를 더하고 싶었다. 할아버님도 말은 안 하시지만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고.

“갑자기?”

재하가 의아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그런 얘기를 할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일 욕심 많은 아내라 부담 주기 싫어 아이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경도 지금 이 상태가 좋은 것 같아 아이 없이 사는 삶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싫어요?”

재하의 반응에 이경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좋아할 줄 알았더니.

“싫기는. 갑작스러워서 그러지. 무슨 심경의 변화야?”

“궁금해서요. 당신이랑 나 닮은 아이.”

“예쁘겠지. 예뻐 죽겠지.”

이경과의 아이를 생각하자 재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이경을 닮은 아이면 얼마나 예쁠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녹아 버리는 기분이다.

“할아버님도 기다리시는 눈치고 결혼한 지도 꽤 됐으니 아이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하경이 가서 허전하구나.”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하경을 영국으로 보내고 쓸쓸해하던 이경이라 자동으로 생각이 그쪽으로 향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이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재하는 그런 이경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보며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건강하고 잘 웃는 아이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었다. 아들, 딸 상관없이 건강하고 씩씩한 아이였으면 좋겠다. 재하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가진 아이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건강하고 잘 웃는 아이. 접수. 만들어 줄게.”

재하가 이경의 말을 곱씹고는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이경의 팔이 재하의 목을 감았다.

“태명은 뭐로 할까?”

조심스럽게 이경을 침대에 눕히며 재하가 물었다. 물으면서도 손은 분주하게 이경의 파자마 단추를 풀고 있었다.

“벌써요?”

이경이 재하의 탄탄한 가슴을 쓰다듬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벌써 태명을 지으려 든다. 성격 참 급하다.

“빨리 지으면 좋지.”

이경의 파자마를 벗겨 내며 재하가 말했다.

이경이 입고 있던 파자마 상의는 재하의 것이었다. 재하가 답답하다고 벗어 던진 걸 이경이 주워 입어 하나의 파자마를 서로 나눠 입고 있었다.

재하는 이경이 자신의 옷을 입고 있을 때가 좋았다. 차이경은 서재하에게, 서재하는 차이경에게 종속된 기분이라 몹시 마음에 들었다.

파자마가 사라진 이경의 몸은 붉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어젯밤 재하가 만들어 놓은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재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붉은 자국 위로 입술을 내렸다. 더 깊고 진하게 자국을 남기며 이경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아.”

옅은 신음을 터트리며 이경이 재하의 팔을 잡았다.

“이게 좋아?”

이경의 신음만큼이나 옅은 웃음소리를 내며 재하가 물었다. 이미 이경이 좋아하는 거라면 다 꿰고 있었지만 이경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좋아 짓궂게 물었다.

“으응.”

재하의 팔을 잡은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가 자극하는 손길에 이경은 금방 무너져 내렸다. 어느 부분이 약한지 귀신같이 아는 사람이었다.

“입으로 할까? 손으로 할까?”

더 짓궂은 질문에 이경이 입술을 깨물고 주먹으로 재하의 어깨를 때렸다.

“알았어. 입이 좋다는 거지?”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재하가 이경의 속옷을 벗겨 냈다.

그 이후로 재하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이경은 그의 머리채를 잡은 채 신음만 흘렸다.

***

속이 좀 울렁거렸다. 요 며칠 계속 그랬다. 손을 딸 정도는 아니라 그냥 넘어갔는데 오늘은 증상이 좀 심했다. 한 차례 게워 낸 후라 따야 할 것 같았다.

이경은 반짇고리를 찾아 들고 자연스럽게 재하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최근 WR 전자 부사장이 된 재하는 새로운 업무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바빠요?”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이경이 물었다.

서류에서 눈을 뗀 재하가 이경을 보며 팔을 벌렸다. 이경은 익숙한 듯 재하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재하가 이경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보고 싶어서 왔어? ……체했어?”

웃으며 말하던 재하는 이경의 손에 반짇고리가 있는 걸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토했어요.”

“뭐? 심하잖아.”

재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손이나 따 주세요.”

이경이 반짇고리를 재하에게 내밀었다.

“내 위랑 바꿔 줄까?”

재하가 이경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니요.”

이경은 웃으며 거절했다.

재하는 능숙한 솜씨로 이경의 손을 따 주었다. 안쓰럽다는 얼굴로 이경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약 가져올게. 약 먹자.”

“약은 안 먹을래요.”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먹어? 먹어야 빨리 낫지.”

“체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한 게 아니라 입덧일 수도 있으니 약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디 다른 데 안 좋아? 병원 갈까?”

재하가 금방이라도 병원에 달려갈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이 가득한 재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왜? 가자. 아니야, 김 박사님 들어오라고 할게.”

“약 말고 다른 게 필요할지도 몰라요.”

이경이 배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응? 다른 거 뭐?”

“임신 테스트기요.”

어쩐지 부끄러워진 이경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어?”

재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뜻을 알아듣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경이 좋아하는 재하의 웃음이었다.

재하는 이경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경을 향한 애틋함이 더욱 커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귤 사 올까?”

재하가 이경을 품에서 떨어트리며 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재하는 이미 이경이 임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거 아니에요.”

앞서 나가는 재하 때문에 이경은 웃음이 터졌다.

“어, 그렇지. 일단 테스트기 사 올게.”

재하는 이경을 의자에 옮겨 앉혀 주고는 볼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다녀올게.”

“같이 가요.”

“아니야,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이경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고, 재하는 성큼성큼 서재를 빠져나갔다.

30분 후, 재하가 집으로 돌아왔다. 침실에 누워 있던 이경은 문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여기 있었어?”

“좀 어지러운 것 같아서요.”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재하의 얼굴이 심각했다. 이경은 살짝 웃으며 재하의 손에 들려 있는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이경은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재하가 이경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오려고 해서 이경이 다급하게 재하를 막았다.

“가세요.”

“같이 해.”

재하가 이경을 조심스럽게 잡고 화장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뭘 같이 해요?”

이경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당황으로 물들었다. 창피하게.

“내가 도와줄게.”

“무슨 소리예요, 나가세요.”

이경이 재하의 가슴을 밀며 화장실에서 쫓아냈다. 재하는 쫓겨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이경은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재하는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며 이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재하가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테스트기를 손에 들고 있던 이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하를 보았다.

“놀랐지? 미안, 미안.”

재하는 이경이 놀랐을까 봐 몹시 미안해졌다.

이경은 미안해하는 재하를 보며 픽 웃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나가서 같이 확인해요.”

이경이 재하를 데리고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몇 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함께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선명한 두 줄.

“어?”

재하가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임신이네요.”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된다니. 이 안에 아이가 있다니. 이경은 배를 만져 보며 작게 웃었다.

“이경아.”

재하가 조심스럽게 이경을 안았다. 임신했다니 이경을 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재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내일 병원 같이 가요.”

이경이 재하를 살짝 밀어내고 말했다.

“어? 어.”

“안 좋아요?”

멍한 재하의 얼굴을 살피며 이경이 물었다.

“실감이 안 나서.”

“저도 그래요. 그래도 인사해 줘요.”

이경이 재하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기야, 안녕. 아빠야.”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건넨 인사가 재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처음 겪는 기분이라 재하는 의지하듯 이경의 손을 잡았다.

이경의 눈을 보니 알겠다. 이경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 순간을 만들어 주고 함께해준 이경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부모가 된 두 사람은 서로를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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