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하아.”
재하의 숨이 이경에게 닿았다. 고개를 든 이경이 재하를 가만히 보다 작게 웃었다.
“주세요. 제가 할게요. 자기는 소질 없다니까요.”
이경은 재하가 쥐고 있는 바늘을 빼앗아 가며 입을 열었다.
로펌 송하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재하는 이경의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찾아냈다. 이경의 손을 따 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면서 바늘을 쥔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다.
“아니야. 내가 해.”
“주세요. 제가 금방 합니다.”
“왜 혼자 손을 따? 청승맞게. 네가 남편이 없어? 신랑이 없어?”
재하는 실을 감은 이경의 엄지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남편도 있고, 신랑도 있지만 손은 제가 더 잘 따니까 그냥 제가 딸게요.”
이러다가 출근도 못 하지 싶어 이경이 재하를 달래듯 말했다.
“안 돼. 너 혼자 그러고 있는 거 보기 싫어. 안쓰러워.”
“남편도 신랑도 있는데 뭐가 안쓰러워요?”
이경은 재하의 말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재하의 말에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확 퍼져 나갔다. 늘 재하가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는 기분이다. 이경에게 재하는 튼튼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재하는 가만히 이경을 보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안쓰러워. 나는 차이경이 애틋하고 안쓰러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고.”
“이미 다 해 주고 있어요. 부족한 거 없어요.”
“내가 너 이 건물도 사 줄 수 있는데 겨우 손 하나 못 따 주겠어?”
“알았습니다. 빨리 따 주세요.”
이경이 재하에게 바늘을 돌려 주며 말했다.
“잘 따 볼게.”
재하는 비장한 얼굴로 바늘을 쥐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이경의 손가락에 바늘을 쿡 찍었다. 검붉은 피가 바로 볼록 올라왔다.
“아.”
힘 조절을 제대로 못 했는지 이경이 움찔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팠지? 미안.”
재하가 피가 나는 이경의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피를 빨았다.
아픈 건 금방 사라지고 재하의 입술 때문에 이경은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손가락을 빠는 턱선은 왜 저렇게 섹시한 건지. 누구 남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잘났다 싶다.
“휴지로 닦으면 됩니다.”
재하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 손가락을 빨던 재하가 이경의 손가락에서 입술을 떼었다.
“차이경 피 아까워.”
“별게 다 아깝습니다.”
“차이경은 내 거니까 피 한 방울도 아까워. 다 내 거야.”
재하는 이경의 엄지에 감겨 있는 실을 풀며 말했다.
“네에.”
헛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재하가 우스워 이경의 입가가 올라갔다.
재하는 이경의 다른 쪽 엄지에 실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든 재하가 입을 열었다.
“떨리니까 뽀뽀해 줘.”
“별게 다 …….”
별게 다 떨린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재하가 먼저 뽀뽀를 해 버리는 바람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재하의 잔망스러움에 어이가 없어 웃고 있는데 손가락이 따끔했다. 그 사이 재하가 바늘로 엄지를 찔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별로 안 아팠어요.”
“그래? 다행이네.”
재하가 웃으며 피가 나는 이경의 엄지를 입에 넣었다. 재하는 이경의 눈을 똑바로 보며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은근하게 보내는 눈빛에 이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긴장감에 아랫배가 조여 왔다.
재하의 혀가 이경의 손가락을 툭툭 건드렸다. 빨고 핥는 건 손가락인데 마치 다른 부분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 이경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재판 있는 날이라서 좀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
재하는 이경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하는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건데 이경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육회비빔밥 먹고 싶어요.”
“호텔?”
이경의 손가락에서 입술을 뗀 재하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가면 뭐 해 줄 거야?”
재하가 은근한 손길로 이경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뭘 원하시는데요?”
“내가 너한테 방금 해 준 거.”
“손 따 주는 거요?”
이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웬 손 타령이람.
“아니, 빨아 주는 거.”
재하가 이경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귀에 속삭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나치게 야해 이경은 난생처음으로 무단결근을 하고 싶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귀에 속삭였다.
“여우 같은 게.”
재하가 이경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경은 작은 소리로 웃으며 손가락에 실을 풀고 바늘을 반짇고리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재하가 바늘을 낚아챘다.
“그거 나 빌려 줘.”
“바늘을요?”
“응.”
재하는 바늘을 넥타이에 핀처럼 꽂았다.
“가져가세요.”
재하는 모든 걸 주려고 하는데 그깟 바늘 하나 못 줄까. 이경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 주고 가. 꽉.”
이경에게서 바늘을 얻은 재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팔을 벌렸다.
이경은 재하를 꽉 안아 주었다. 서비스로 볼에 뽀뽀도 해 줬다. 볼 뽀뽀에 버튼이 눌렸는지 재하가 이경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안 됩니다. 립스틱 번져요.”
이경은 재하를 밀어 내고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이경을 쫓아 차에서 내린 재하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녀를 붙잡아 끌어안았다.
“이제 됐어요. 빨리 가세요.”
재하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고 이경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다른 변호사들이 볼까 봐 겁이 났다.
“이따 봐.”
재하는 이경에게 손을 흔들고 차로 돌아갔다.
밀어낸 건 자신이었지만 이경은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재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따 만나면 꽉 안아 줘야겠다.
***
넥타이에 바늘을 꽂고 출근한 재하가 복도에서 황 비서와 마주쳤다. 황 비서가 방긋 웃으며 재하를 반겼다.
“이제 출근하십니까?”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는 황 비서의 안색은 매우 좋아 보였다.
“황 비서, 어디 아파?”
누가 봐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황 비서에게 재하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저요? 아니요. 건강합니다.”
“아파 보여. 체했구나?”
“아닌데요.”
재하의 말에 황 비서가 불안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걸 시킬 게 분명하다. 상사가 음흉하게 웃고 있어 황 비서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체했어. 딱 보니까 체했네. 이리 와.”
재하가 뒤로 물러서는 황 비서에게 손을 까딱였다.
“오해십니다.”
황 비서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재하는 결국 황 비서를 끌고 집무실로 향했다. 황 비서를 소파에 앉혀 놓고 재하는 그 옆에 앉았다.
“체했을 때는 이게 최고랬어.”
재하가 바늘을 넥타이에서 빼내며 말했다.
“바늘로 뭘 어쩌시려고요?”
황 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라이터.”
재하가 황 비서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황 비서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재하에게 주었다. 재하는 바늘을 라이터에 달구고 황 비서에게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손 따시려고요? 저 안 체했는데요?”
황 비서가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혈색이 지나치게 좋아 보이긴 하네. 평소에 잘 체하잖아. 근데 오늘은 왜 안 체했어?”
“늘 체할 수야 있나요.”
황 비서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체했다는데 딸 수도 없고. 황 비서, 틈틈이 회사 돌아다니면서 체해서 손 따고 싶은 사람 찾아와.”
“네?”
황당한 지시에 황 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심각하게 이상하다.
“안 데려오면 황 비서 손 딸 거야.”
재하가 자신의 엄지에 실을 둘둘 감으며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꼭 데려오겠습니다.”
움찔한 황 비서가 빠르게 대답하고 재하의 집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황 비서가 나가고 재하는 망설임 없이 엄지에 바늘을 꽂았다. 붉은 피가 볼록 올라왔다. 티슈로 쓱 문질러 닦으며 재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손 딸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이경의 손만 따려고 하면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손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작고 하얀 손에 상처를 입힐 생각을 하면 약간 머리가 하얘진다. 못 할 짓 하는 것 같고.
재하는 다시 바늘로 엄지를 찔렀다. 피가 볼록 올라왔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바늘로 찌르고 난 후에야 엄지에서 실을 풀었다. 몇 번 더 연습하면 잘할 것 같다.
일하는 틈틈이 재하는 엄지에 실을 감고 손 따는 연습을 했다. 엄지에 검게 피멍이 들 정도로 열심히 손을 따 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황 비서는 유 전무를 데려왔다. 점심 먹은 게 체했다는 유 전무는 재하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서 상무, 진짜 잘 딸 수 있습니까?”
“속고만 사셨습니까? 맡겨 보시죠.”
껄렁한 말투로 말하고 재하는 전문가처럼 바늘을 라이터로 소독했다. 그러고는 능숙한 솜씨로 유 전무의 엄지에 실을 감았다.
“찌릅니다.”
통보를 하고는 바늘로 엄지를 찔렀다. 유 전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피가 나는 손가락을 보았다.
“아팠어요?”
“서 상무, 꽤 하네요?”
유 전무는 흡족한 표정으로 피가 난 엄지를 지혈하고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 엄지도 내밀었다. 재하는 좀 더 자신감이 생긴 얼굴로 유 전무의 엄지를 마저 따 주었다. 유 전무는 재하의 손 따는 솜씨에 매우 만족하고 돌아갔다.
유 전무가 돌아가고 몇 분 뒤, 황 비서가 속이 몹시 더부룩해 보이는 직원 한 명을 잡아 왔다.
“안녕하십니까. 인사 팀 대리 조민호입니다.”
“어, 조 대리. 잘 왔어.”
재하는 조 대리를 몹시 반겼다. 조 대리가 옆에 앉자 재하는 능숙한 솜씨로 엄지에 실을 감았다.
조 대리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염려 말라는 얼굴로 빙긋 웃고는 엄지를 바늘로 찔렀다. 그러자 조 대리가 곧바로 트림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조 대리가 깍듯하게 사과를 했다.
“아니야. 시원하게 잘했어.”
재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빙긋 웃었다. 허준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이다. 우리 이경이 아플 때마다 내가 손 잘 따 줘야지. 재하는 뿌듯한 얼굴로 바늘을 보았다.
그 이후로 한동안 재하의 집무실은 체한 사람들이 다녀가는 작은 한의원이 되었다. 그렇게 쌓은 실력으로 재하는 이경의 손을 떨지 않고 따 줄 수 있었다.
이경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손을 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경만의 손 따기 전문가가 있었으니까. 이경의 손을 따는 일은 한평생 재하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