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딴 계약-77화 (77/83)

외전 4화

“이 망나니. 이경이 알면 어쩌려고.”

하경의 전화를 끊은 재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술에 취한 하경이 김 기사인 줄 알고 재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재하가 집무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로 시선을 주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며칠 야근이 이어졌다. 그 덕에 피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술도 못 마시는 애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 놓은 재킷을 챙겨 들고 재하는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퇴근하십니까?”

밖으로 나온 재하를 보며 황 비서가 물었다. 황 비서의 눈에도 피로가 가득했다.

“황 비서도 퇴근해.”

“넵!”

퇴근이라는 말에 황 비서의 목소리가 바로 밝아졌다. 밝아진 목소리로 황 비서는 지체 없이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재하가 몸을 돌려 황 비서를 보았다.

“내가 운전해. 퇴근하라고 해.”

차하경 망나니 된 꼴을 왠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운전기사라고 해도. 내 가족 다른 사람에게 흉잡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씩씩한 황 비서의 대답을 뒤로하고 재하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탄 재하는 하경이 알려 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재하는 운전을 하며 하경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혀어엉부.

방금 전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혀가 더 꼬여 있다. 이걸 그냥. 재하는 인상을 벅벅 쓰며 입을 열었다.

“처제,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지금 가는 중이니까.”

—와아아아. 혀어엉부 온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심장 수술한 애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 이경이 알면 얼마나 걱정할까. 재하는 전화를 끊고 속도를 높였다.

하경이 말한 곳에 차를 세우고 재하가 차에서 내렸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 본 그는 어느 주점 앞에 친구들과 쪼르르 앉아 있는 하경을 발견했다.

“정말.”

그 모습이 어이도 없고 귀엽기도 해 재하는 헛웃음을 흘리고 하경에게 다가갔다.

“처제. 차하경.”

하경의 앞에 선 재하가 입을 열었다.

재하의 목소리를 들은 하경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눈가가 동글게 휘어지며 하경이 헤헤 웃었다.

이럴 때면 이경을 참 많이 닮았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재하는 이경을 닮은 딸이 궁금해졌다. 이경이 닮은 딸이면 정말 예쁠 텐데.

“형부, 여긴 어쩐 일이에요오오?”

자기가 불러 놓고도 어쩐 일이냐고 묻는다. 맛이 완전히 갔네. 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경이 형부님, 안녕하세요.”

하경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친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창하듯 재하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이 몇 시야? 왜 빨리빨리 집에 안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있어? 부모님 걱정하시게.”

재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하경과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아, 형부! 잔소리 시끄러.”

하경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운 4살도 아니고. 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하는 하경을 일으켜 세우고 하경의 친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친구들, 저기 저 차 보이지? 얌전히 타는 거다.”

“네! 하경이 형부님.”

하경의 친구들은 꼬마 병정들처럼 줄을 맞춰 비틀거리며 재하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처제, 언니한테 혼나려고.”

재하가 하경을 차로 데려가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경이 속상하게 하면 아무리 처제라고 해도 미울 수밖에 없어. 타박하며 조수석 문을 열고 하경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언니한테는 당연히 비밀이죠.”

“하는 거 봐서.”

재하는 하경의 안전벨트를 매 주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재하는 하경의 친구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마지막 친구를 따라가겠다고 하경이 조수석에서 뛰쳐나가 재하는 다시 하경을 잡아 왔다.

“집에 가야지. 가기는 어딜 가?”

하경을 조수석에 태우려는데 이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경 때문에 진땀을 빼고 있던 재하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응, 이경아.”

재하가 이경의 전화를 받는 사이 하경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뒷좌석에 탔다. 뒷좌석에 누운 하경을 보며 재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예요? 아직도 회사예요?

“어, 그게…….”

뒷좌석에 뻗어 있는 하경을 보며 재하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 퇴근하려고 하는데 일 끝났으면 같이 들어가요.

심장이 녹을 것 같은 이경의 말에 재하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우면 난 어쩌라는 건지.

“알았어. 로펌에 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천천히 와요.

이경의 전화가 끊어졌다. 행복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던 재하는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하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코알라 처제 데리고 간다는 말을 안 했네.”

재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하경을 일으켜 시트에 기대 놓았다. 그러고는 안전하게 안전벨트를 채워 주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하는 이경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경은 정말이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다.

“형부, 여기 어디예요?”

막 차를 출발시켰는데 뒤에서 하경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데리러 갈 거야. 정신 차려.”

“우리 언니! 언니 보고 싶다. 형부 달려요, 달려.”

하경이 팔을 마구 휘저으며 까르르 웃었다.

“차하경, 이렇게 자꾸 속 썩이면 경호원 붙일 거야.”

“아, 무슨 경호원이야. 다른 애들이 놀린단 말이에요.”

하경이 투덜거렸다.

“그럼 안 붙이게끔 해. 심장 수술한 애가 술이 말이 돼?”

“클럽도 못 가게 하고, 술도 못 먹게 하고. 난 되는 게 뭐야.”

하경이 조수석을 발로 쿵쿵 차며 반항했다.

“얌전히 공부나 해. 그림이나 그려.”

“형부,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내가 뭘 했다고 세상에서 제일 미워?”

신호가 걸린 사이 재하가 억울한 얼굴로 하경을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채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꼭 오리 같아 웃음이 터졌다.

“언니한테 혼 좀 나야지.”

하경의 저런 모습을 보니 이경이 더 보고 싶어졌다. 재하가 차의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재하는 이경의 로펌 앞에 도착했다. 로펌 앞에 차를 세우자 기다리고 있던 이경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직접 운전…… 하경이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조수석에 타던 이경이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하경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처제, 밤길 위험하니까 내가 픽업했지.”

재하는 ‘공부 열심히’라는 말을 강조하고 빙긋 웃었다. 하경은 혼이 좀 나야 하지만 이경이 알면 속상할 테니 일단은 이런 식으로 덮어 줘야겠다.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이경이 뒷좌석으로 고개를 내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경은 상황을 파악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온니이이.”

이경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하경이 어리광을 부렸다.

“하경이 너, 술 마셨어?”

이경이 심각한 얼굴로 하경을 보았다. 수술한 지 1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미국으로 정기검진도 받으러 가야 하는 애가 술을 마셨다니 이경은 좀 화가 났다.

“쬐에끔. 한 잔, 아니다 두우 잔. 헤헤.”

술에 취한 하경은 이경이 화가 났다는 것도 모르고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대답했다.

“술을 마시면 어떡해? 관리해야 하는데. 술은 심장에 안 좋아.”

“왜애? 뭐어? 조금밖에 안 마셨단 말이야.”

“너 정말 언니한테 혼나 볼래?”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분한 목소리보다 그게 더 무서워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재하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움찔했다.

“싫어. 나도 술 마셔 보고 싶었단 말이야.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왜 나는 못 해?”

하경이 떼를 쓰듯 말했다.

“다른 애들이랑 너랑 같아?”

“억울하단 말이야.”

하경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이경아, 진정하고 일단 가자. 벨트 매자.”

재하가 부드럽게 이경의 어깨를 토닥이고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이경은 몸을 바로 하며 속상하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재하는 더 많이 속이 상했다.

“언니 미워!”

집으로 차를 모는데 하경이 뒤에서 소리쳤다.

“처제, 언니가 왜 미워? 언니가 다 처제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속상해하는 이경 대신 재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하경은 화살을 재하에게로 돌렸다.

“형부는 더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우리 언니 빼앗아 가고.”

“하경아, 형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경이 고개를 돌려 하경을 보며 말했다. 차분하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쟤 취해서 그래. 네가 참아 이경아.”

재하가 이경을 달래듯 말했다.

술에 취한 하경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구시렁거리며 이경과 재하의 속을 긁었다. 하경을 안전하게 방까지 데려다준 재하는 생각했다. 애 키워 먹기 정말 힘들다고.

***

아침 시간은 냉전 시대 저리 가라였다. 이경과 하경은 어제의 일로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낀 재하와 명섭만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하경이 쪼르르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하경이랑 무슨 일 있니?”

하경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명섭이 이경에게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님.”

이경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하는 속상해하는 이경 때문에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결국 출근해서도 재하는 이경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 무렵 재하가 회사를 빠져나와 하경의 학교로 향했다.

“처제, 어디야? 수업 없으면 잘생긴 형부 얼굴 좀 보지? 학교 정문.”

정문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재하는 하경을 기다렸다. 잠시 후, 하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무룩한 얼굴에 재하는 피식 웃으며 안전벨트를 매는 하경을 보았다.

“여기 근처에 괜찮은 일식집 있어. 초밥 괜찮지?”

“네.”

입을 삐죽이며 하경이 대답했다.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재하가 차를 몰았다.

하경을 일식집으로 데리고 온 재하는 별다른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따뜻한 차와 과일이 나오자 재하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재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하경에게 내밀었다.

“형부가 준 카드 아직 한도 많이 남았는데요?”

하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재하가 내민 카드를 보았다.

“그건 용돈 하라고 준 카드고 이거는 오늘 저녁에 언니랑 맛있는 거 사 먹고 들어오라고 주는 거야.”

“언니랑요?”

이경의 얘기가 나오자 하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내려트렸다.

“이경이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알아? 언니 속 썩이면 안 되지. 언니는 다 처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알아요. 저도 후회하고 있어요.”

“반성 많이 했어?”

재하는 고개를 푹 숙인 하경의 모습에 입가를 올리며 물었다.

“네.”

“언니는 우리 집 왕이야. 원래 왕한테는 바짝 엎드려 살아야 행복한 법이야.”

“알았어요, 형부. 오늘 언니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하경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뺏어서 미안해.”

“형부가 언니 뺏은 게 아니라 저한테 오빠 한 명이 더 생긴 거예요. 형부 있어서 든든해요. 어제는 저도 잘못했어요.”

하경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재하는 하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내 가족이 생겼다는 건 생각보다 더 근사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