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주말이니까 드라이브 갈까? 할아버지랑 하경이 떼 놓고.”
재하가 이경의 눈치를 보며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이경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재하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요.”
이경은 재하와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서재하가 일부러 망나니짓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서재하 뒤치다꺼리하는 변호사였고, 지금은 아내였으니까.
“응? 왜? 왜 기분이 안 좋을까?”
뻔히 알면서도 묻는 게 더 기분 나빠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요일이지만 출근이나 해야겠다.
“이경아.”
가족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하는 이경을 성큼 따라잡은 재하가 팔을 잡았다.
“다른 여자들이랑 아주 즐겁게 잘 놀다가 결혼하셔서 여한은 없으시겠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손을 떼어 내며 딱딱한 투로 말했다.
“나 다른 여자들이랑 논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알죠. 5분도 안 돼서 여자들 밖으로 내보낸 것도 다 압니다.”
억울한 얼굴로 말하는 재하를 이경이 흘겨보았다.
그 여자들이 볼에 입 맞추는 것 정도는 허락했으면서. 다른 여자랑 호텔로 들어간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아무 일 없었다는 것도 잘 알잖아.”
“네. 아무 일 없으셨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때는 서 전무님이 미치광이 고자인 줄 알았습니다.”
옛날 호칭을 입에 올리며 이경이 화난 티를 팍팍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재하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러더니 냅다 이경을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올라갔다.
“왜 이러세요? 내려주세요.”
이경이 재하의 어깨에서 바동거렸다.
“아내가 날 미치광이 고자 취급하는데 아닌 거 증명해야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재하가 이경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아닌 거 압니다.”
“아니야. 그 사이 고자가 됐을 수도 있잖아.”
“웃기지 마십시오.”
이경은 계속 버둥거렸지만 재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대로 이경을 침실로 데려갔다. 이경을 침대에 내려놓고 재하가 방문을 잠갔다.
이경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문은 왜 잠그십니까?”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증명하려고 그러지.”
재하가 훌렁 입고 있던 맨투맨을 벗어던지자 조각상 같은 상체가 드러났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본 것이었지만 이경은 새삼스럽게 흐뭇해졌다.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오는 재하를 보고 있는데 침대 옆 협탁에 놓아 둔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동료 변호사였다. 이경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차이경입니다.”
—차 변호사님, 주말에 죄송해요.
며칠 전에 새로 들어온 주니어 변호사였다. 이경과는 동갑이었지만 그는 제대로 선배 대접을 해 주었다. 사실 이경은 요즘 로펌 내에서의 입지가 거의 파트너 변호사급이었다.
이경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WR 그룹이라는 배경은 그녀에게 권력이 되어 주었다. WR 그룹 서재하의 아내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배경이었지만 이경은 특유의 덤덤함으로 모든 관심을 쳐냈다. WR 그룹과 상관없이 일로 인정받는 게 그녀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닙니다. 무슨 일 있어요?”
—뭐 하나만 여쭤보려고요.
이경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남자 목소리에 재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침대로 올라와 이경의 옆에 누웠다.
이경은 재하를 힐끔 보고는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이경이 입을 열면 열수록 재하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단순히 일 얘기를 하는데도 심술을 부리는 재하가 좀 어이없었다.
통화가 10분을 넘어가자 재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는지 이경의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경은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고 재빨리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재하에게 허리가 붙잡혀 침대에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대로 재하는 이경의 위에 올라타더니 풍덩한 니트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당황한 이경이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말끝에는 신음이 흘렀다. 니트 안으로 들어간 재하가 속옷을 밀어 버리고 가슴을 머금었기 때문이다. 혀로 돌리고 자극하는 움직임에 이경의 허리가 뒤틀렸다.
이경은 재하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요. 김 변호사님도 별말씀 없으실 거예요.”
이경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꾹 참으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전화를 빨리 끊었으면 좋겠건만 새로 들어온 주니어 변호사는 계속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재하는 자극의 강도를 높여 갔다. 어느새 재하의 손은 이경의 바지 안에 들어가 있었고, 이경은 정말로 그를 때리고 싶어졌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주말에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주니어 변호사는 씩씩하게 인사하고는 드디어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이경은 마음껏 신음을 냈다. 재하가 주는 자극에 몸이 한 번 크게 뒤틀린 이경이 숨을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통화 중이었습니다.”
“딴 새끼랑 통화 중이었지. 언젠가는 그 망할 로펌 내가 꼭 없애 버릴 거야.”
재하는 하의를 벗으며 말했다. 그의 토끼 꼬리는 오늘도 흉측했다.
“없애긴요. 남의 회사를.”
이경은 잔뜩 성이 난 토끼 꼬리를 외면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역시 적응이 안 된다. 정말 잘라 버릴 수도 없고.
재하는 촉촉하게 물든 이경의 몸으로 제 몸을 들이밀었다. 몸을 꽉 채운 재하 때문에 이경은 다시 신음이 흘렀다.
재하는 몸을 움직이며 이경의 핸드폰을 꺼 버렸다. 또 누군가 전화를 한다면 그때는 진짜 로펌을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내의 회사를 없애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하는 꺼진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 시간 이후로 이경은 온전히 재하의 차지였다. 이경의 몸 구석구석을 누비며 재하는 만족스러운 주말을 보냈다.
***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은 유난히 화사했다. 재하와 맞는 두 번째 봄에는 행복과 설렘만 가득했다.
눈에 닿는 감촉에 이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헐벗은 재하였다. 재하의 몸 여기저기 생긴 손톱자국은 간밤에 이경이 남긴 흔적이었다.
“잘 잤어?”
이경의 코에 입을 맞추고 떨어진 재하가 씩 웃었다.
이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이 좋아하는 싱그러운 웃음을 아침부터 보여 주어 오늘도 참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재하가 이경을 번쩍 안아 무릎에 올려놓았다. 이경의 머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는 재하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바람 쐬러 가자. 하경이 데리고 팥죽 먹으러 갈까?”
“할아버님도 모시고 가야죠.”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재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이경을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 이경이 행복한 만큼 재하도 행복했다.
착하게 산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복을 다 받고. 행복해 미치기 직전인 재하는 이경의 얼굴에 뽀뽀를 쏟아 냈다.
“간지럽습니다.”
그만하라는 듯 이경이 재하를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로 가려는데 바로 재하에게 허리가 붙잡혀 다시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씻을 거예요.”
허리를 잡은 재하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경이 손을 떼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재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씻지 마.”
재하가 이경의 귓불을 입술로 잘근거리며 소곤거렸다.
“으.”
재하의 손길과 입술에는 바로 예민해져 이경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재하가 이경을 바짝 끌어당기며 귀를 희롱했다. 귓바퀴를 핥아 내고, 귓불을 빠는 입술이 자극적이었다.
“하아.”
이경이 신음 섞인 숨을 토해 냈다. 또 제멋대로 건방지게 구는 재하의 하체가 선명하게 느껴져 이경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정말 아침부터…….”
이경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하체만큼이나 제멋대로인 재하의 손이 이경의 허리 아래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신음 소리 섹시하네. 아침부터 잡아먹고 싶게.”
재하가 이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경의 안이 재하로 가득 차고, 그 후로는 이경의 신음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아침부터 진을 빼놓은 재하를 슬쩍 흘겨보며 이경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지금은 롭을 데리고 아침 산책 중이었다.
여전히 개는 무서웠지만 롭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한 결과, 재하와 함께 산책시키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경과 롭 사이에 서재하라는 커다랗고 든든한 벽이 존재한 덕이지만.
“산책 나 혼자 시켜도 되는데.”
“아닙니다. 롭이랑 더 친해져야죠.”
재하의 말에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무섭기만 하던 롭이 요즘은 종종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조금만 더 친해지면 안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애쓸 필요 없다니까.”
잔디밭에 코를 박은 롭 때문에 걸음을 멈춘 재하가 말했다.
“저도 롭 안아 보고 싶어요. 하경이가 엄청 부드럽고 기분 좋다고 해서 안으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생긋 웃으며 말하자 재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안으면 부드럽고 기분 좋아.”
“자기는 딱딱해요. 많이 안아 봐서 알아요.”
롭한테도 질투하는 재하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이 토끼 같은 남자는 몇 살까지 귀여우려나.
귀여운 롭과 더 귀여운 재하와 함께하는 산책이 이경은 참 행복했다.
공원 한 바퀴를 돌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중이었다. 주말 아침의 공원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로움 속,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경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완전히 끝난 기분이다. 이 모든 걸 선물해 준 재하가 고마워 이경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경의 행동에 재하는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이경이 재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 저만치 혼자 자전거를 타고 있던 아이가 넘어졌다. 어깨에서 머리를 뗀 이경이 재하를 보았다.
“롭이랑 잠깐 있을래?”
재하가 괜찮겠냐는 얼굴로 물어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재하의 이런 점이 좋았다. 성질머리 더럽지만 그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
재하는 벤치 다리에 롭을 묶어 놓고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달려갔다.
재하가 떠나고 롭과 남겨진 이경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롭을 보았다. 롭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벤치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쿡 웃는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나운 소리에 이경은 잔뜩 몸이 굳었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진돗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겁을 먹은 이경이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롭이 몸을 일으켜 이경과 진돗개 사이를 가로막았다.
왈!
롭은 몸을 낮추며 진돗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순한 롭이 이빨을 드러내고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롭의 등장에 진돗개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롭에게 맞섰다. 진돗개가 롭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진돗개 주인이 달려와 목줄을 잡아당겼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돗개 주인인 아저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이경에게 사과를 했다.
“괘, 괜찮습니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이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돗개 주인은 몇 번이나 사과하고 떠났다. 진돗개가 사라지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이경이 롭을 쳐다보았다.
“고마워, 롭.”
자신을 위해 나서 준 롭에게 이경은 감동했다. 누구 개인지 참 예쁘다.
롭은 칭찬해 달라는 듯 조심스럽게 이경의 무릎 위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롭의 체온이 무릎 위에 닿았다. 참 이상하게도 롭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경은 롭의 머리를 쓰다듬다 조심스럽게 안아 보았다. 하경의 말대로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이제 롭과 제대로 가족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