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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75화 (75/83)

외전 2화

꿀꺽, 침을 삼켰다. 다리가 덜덜 떨려 이경은 심호흡을 했다. 무섭다. 여전히 무섭다.

“왈!”

재하의 개 롭이 우렁찬 소리로 짖었다. 우리 안에 있는 롭의 꼬리가 한여름의 선풍기처럼 신나게 돌아갔다.

“엄마!”

작게 중얼거린 이경이 재하의 넓은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재하의 팔을 꽉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재하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무서워?”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롭과 가족이 된 지 어언 3개월. 이경은 여전히 시강아지 롭이 무서웠다. 롭이 순한 것도 알겠고, 이제는 가족이니까 잘 지내고 싶었는데 매일 봐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재하가 몸을 돌려 이경과 마주 보았다. 이경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는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꼭 안 친해져도 돼.”

“그래도요.”

이왕이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나. 남편이 3년이나 키운 강아지인데. 이경은 이 집안의 있는 모든 생명에게 정을 붙이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니까.

“누가 이렇게 예쁘래? 응?”

재하는 웃음을 터트리며 이경을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게 꼭 주인을 좋아하는 강아지 같아 이경은 웃음이 났다.

“됐습니다. 그만 하세요.”

재하를 밀쳐 내고 이경이 용기를 내어 우리로 바짝 다가갔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롭이 이경이 다가가자 몸을 세우고 꼬리를 흔들었다.

흡, 숨을 들이마신 이경이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옆으로 다가온 재하가 손을 뻗는 이경의 손목을 잡아 주었다.

손목에 닿은 재하의 체온에 의지해 이경이 우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킁킁, 롭이 이경의 손 냄새를 맡았다.

이경이 움찔 몸을 떨며 재하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나지막한 재하의 웃음소리가 이경의 귓가를 간질였다.

재하가 이경의 손등 위로 깍지를 끼고는 그대로 이경의 손을 롭의 머리로 내렸다. 이경의 손바닥에 롭의 부드러운 털이 닿았다.

“예쁘다. 예쁘다.”

재하가 이경 대신 손을 움직여 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에 스치는 롭의 감촉이 좋아 이경이 살짝 눈을 뜨고 롭을 보았다.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롭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이경을 반겼다. 그 모습이 꼭 서재하 같아 이경은 픽 웃음이 났다.

재하나 롭이나 첫인상은 좋지 못했다. 험상궂고 괴팍해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재하나 롭이나 꽤 귀여웠다. 따뜻하기도 하고.

“왜 웃어?”

재하가 이경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귀에 속삭였다.

“자…… 기랑 롭이랑 닮았어요.”

재하가 호칭을 자기로 정해 준 바람에 이경은 열심히 자기라고 부르고 있지만 영 어색했다. 차라리 오빠라고 부르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은데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재하가 웃음을 터트리며 안 된다고 고개를 휘저었다.

“어디가? 롭은 못생겼잖아.”

재하가 이경을 살짝 떨어트리며 물었다.

이경은 롭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못생겼다는 말에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되었다.

“롭도 나름 귀엽게 생겼습니다.”

“나도 귀엽게 생겼어?”

“아니요. 이쪽은 잘생겼습니다.”

“보는 눈 정확해. 아침부터 예뻐 죽겠네.”

이경을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고 몸을 오뚜기처럼 흔들던 재하가 갑자기 그녀를 어깨에 둘러멨다. 그대로 한 바퀴를 휙 돌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러워요.”

재하가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라 이경은 놀라지도 않았다. 주말이면 이경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재하가 하도 안고 다녀서 이경은 슬슬 그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 아침 먹으러 가자.”

재하는 이경을 어깨에 둘러멘 채로 본채로 향했다.

창피해, 생각하며 이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재하의 어깨에 매달려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이경은 방에서 나오는 권명섭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명섭은 이경의 부탁에 별채를 정리하고 본채에 들어와서 사는 중이었다. 이경은 친할아버지 같은 명섭이 좋았고, 하경도 명섭을 잘 따랐다.

하지만 아무리 친할아버지 같은 명섭이라고 해도 이런 꼴을 보이는 건 민망했다. 이경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님.”

“재하 이놈!”

명섭은 미안한 얼굴로 이경을 보고는 재하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제야 재하가 이경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왜 손자를 두드려 패?”

재하가 투덜거리고는 이경의 손을 잡아 명섭에게 맞은 부분에 올려놓았다.

문지르라는 뜻인 걸 바로 알아듣고 이경은 재하의 등을 문질러 주었다. 그 모습에 명섭이 혀를 끌끌 찼다.

“아, 이경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매일 그러고 다녀.”

“설마 내가 우리 이경이를 떨어트릴까.”

“모자란 놈한테 시집와서 네가 고생이 많다.”

명섭이 애잔한 눈으로 이경을 보았다.

이경은 명섭의 그 눈빛에 웃음을 삼켰다. 명섭의 말이 진심인 듯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생 많으면 물질로 보답해 줘. 우리 이경이 물질적인 거 좋아해.”

“재하 씨.”

그 말에 이경이 재하를 흘겨보았다. 내가 언제 뭘 그렇게 좋아했다고. 할아버님 앞에서 그런 말을 막 하면 어떡해. 이경은 명섭의 말이 틀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모자란 놈 데리고 사느라 내가 고생이 많다.

“백화점에 연락해 둘 테니까 이경이 가지고 싶은 거 가져와.”

“괜찮습니다, 할아버님.”

이경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이미 재하에게 한도 없는 카드를 받아서 잘 쓰고 있었다. 그리고 재하가 시도 때도 없이 선물을 사 와 이경은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건물 하나 주든지. 아니면 주식이나.”

“자기.”

재하의 말에 이경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를 불렀다. 그만하라는 표정으로 재하를 보자, 모자란 놈은 실실 웃는다.

“네가 말 안 해도 다 생각하고 있어, 이놈아.”

“진짜? 우리 이경이 부자 되겠네.”

재하가 이경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경은 얼른 허리에 닿은 재하의 손을 떼어 내며 명섭의 옆에 섰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어서 가셔서 식사하세요.”

이경은 명섭을 다이닝 룸으로 안내하며 재하를 슬쩍 흘겨보았다. 재하는 실실 웃으며 이경과 명섭을 따라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막 의자에 앉았는데 하경이 밝은 얼굴로 다이닝 룸에 들어왔다. 씩씩한 얼굴로 명섭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올린 재하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이경의 옆에 앉았다.

“처제,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하경이 자리에 앉자마자 재하가 추궁하듯 물었다.

“1시쯤?”

하경이 재하와 이경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늦게?”

이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경을 보았다. 하경은 학교생활이 재미있는지 매일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작업하느라. 작업하느라 그랬지. 김 기사님도 계시고 괜찮아. 안 위험해.”

하경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하경아, 방학했잖아. 어제 마지막 교양 시험 끝나서 해방이라고, 과제 제출도 끝내서 홀가분하다고 분명히 처제님이 말씀하셨는데요?”

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흠칫한 하경이 눈을 굴렸다. 거짓말이 바로 들통났다.

“또 클럽 갔어?”

“클럽이요?”

재하의 말에 이경이 놀라 되물으며 하경을 보았다. 우리 하경이가 클럽같이 시끄럽고 위험한 곳에 갔다고? 게다가 ‘또’라니.

“아, 형부. 언니한테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요.”

“그건 다시는 안 간다고 했을 때 비밀로 하기로 한 거고.”

“클럽 간 거 아니거든요?”

하경이 뾰로통한 얼굴로 재하에게 대꾸했다.

“그럼 어디 갔다 왔어? 김 기사가 클럽에서 픽업했다던데.”

“김 기사님 배신자.”

하경이 시무룩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재하는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고는 곧바로 정색했다. 재하는 아빠처럼 큰오빠처럼 하경을 챙겼다.

가끔 하경이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는 날이면 직접 데리러 가기도 했고, 학교로 찾아가 하경과 하경의 친구들에게 밥을 사 먹이기도 했다.

“밥부터 먹자. 밥상머리 앞에서 애 잡는 거 아니야.”

가만히 있던 명섭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제 편을 들어준 게 고마운지 하경이 어리광을 부리듯 명섭을 보았다.

“든든하게 먹여 놓고 혼내야지.”

“힝.”

자신의 편인 줄 알았던 명섭이 혼나야 한다는 말을 하자 하경은 입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가족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하경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혼이 났다. 제일 열정적으로 혼을 내는 건 재하였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눈 회까닥 돈 놈들이 돌아다니는 곳이 클럽이라고.”

“아니에요. 그냥 춤만 추는 곳이에요.”

재하의 말에 하경이 반박했다.

“처제, 나도 많이 다녀 봐서 알아. 내가 다 봤다고. 술 마시고, 마약하고, 여자들 어떻게 해 보려고 쫓아다니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형부, 클럽 다녔어요?”

하경이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재하를 보았다.

“에라, 이놈아.”

명섭이 재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경은 재하를 클럽에서 하도 많이 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데 재하가 이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다니는 척만 한 거야. 변호사들이 귀찮게 구니까.”

“자랑이다, 이놈아.”

명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실을 빠져나갔다.

“언니도 너 그런데 다니는 거 싫어. 하경아, 언니 걱정시키지 마.”

이경이 하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딱 두 번밖에 안 갔어. 친구들이 하도 가자고 해서. 종강 파티한 거야. 나는 룸에서 콜라만 마셨단 말이야.”

“나도 룸에서 술만 마셨어.”

재하가 얼른 이경을 보며 말했다.

새삼 클럽 룸에서 보았던 재하의 모습들이 떠올라 이경은 슬금슬금 짜증이 올라왔다. 그때는 한심하게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좀 화가 났다.

“하경이, 다시는 클럽 가지 마. 또 클럽 가면 언니 정말 화낼 거야.”

“알았어. 안 갈게. 진짜 안 갈게.”

하경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 언니는 형부랑 할 말 있어.”

이경은 하경을 올려 보내며 재하를 째려보았다.

재하가 움찔, 이경의 눈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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