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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73화 (73/83)

73화

재하의 얼굴 근육이 움찔 움직이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었다. 하경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경만 덤덤한 얼굴로 재하와 하경을 번갈아 보았다.

“오빠는 안 되겠지?”

재하가 하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안 될 것 같아요.”

하경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그렇게들 재미있어?”

그때, 권명섭 회장이 뒷짐을 지고 현관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온화한 얼굴로 나타난 명섭은 흐뭇한 얼굴로 세 사람을 보았다.

명섭의 등장에 이경과 하경이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차 변호사, 어서 와.”

명섭은 이경을 보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는 명섭의 눈이 따스했다.

“제 동생입니다. 차하경이요. ……하경아, 회장님께 인사드려.”

이경은 명섭에게 하경을 소개하고, 하경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경 언니 동생 차하경입니다.”

하경이 생긋 웃으며 명섭에게 인사를 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회장 할아버지를 실물로 보니 하경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온화한 명섭의 모습에 떨리지도 않았다.

“아직 애기네. 잘 왔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섭의 말에 하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하고. 배고파 죽겠어.”

재하가 앓는 소리를 하고는 가족들을 챙겨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이미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와.”

하경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처제, 많이 먹어. 우리 장 주방장님이 호텔 요리사 출신이야.”

재하가 하경에게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네!”

하경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섭은 이경과 하경을 편하게 대해 주었고, 그 덕에 이경은 긴장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하기 전에는 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은 손 딸 일은 없을 것 같다.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명섭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이경에게 물었다.

“차 변호사, 정말 재하 저놈이랑 결혼해도 괜찮겠어?”

“네?”

갑작스러운 명섭의 질문에 이경이 눈을 껌벅였다.

“내 손자지만 성격이 하도 지랄 맞아서 귀한 아가씨 마음 고생시킬까 걱정이라 그래.”

진지한 명섭의 말에 하경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경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서재하 성격이 지랄 맞기는 하지.

“아, 진짜 할아버지. 처제도 있는데.”

재하가 인상을 벅벅 쓰며 식은 차를 한입에 다 들이켰다.

“누가 차를 그렇게 마셔?”

명섭이 혀를 차며 재하를 타박했다. 2% 모자란 손자를 보는 눈빛이라 하경은 다시 쿡쿡 웃었다.

“아무렇게나 마시면 어때?”

재하가 투덜거렸다.

“정말 저런 놈 데리고 살 자신 있어?”

명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 있습니다.”

명섭의 물음에 이경이 미소와 함께 단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성질머리 고약하기는 한데 내 앞에서는 빌빌거려 주니 데리고 살 자신 있었다. 이경이 실실 웃고 있는 재하와 눈을 맞추었다.

“차이경 아니면 날 누가 데리고 살아. 영감님, 자꾸 그러지 말고 가서 좋은 날이나 받아 와.”

“사돈처녀 있는 앞에서 할아버지한테 말버릇하고는. 사돈처녀 이런 건 배우면 안 돼.”

명섭은 재하를 흘겨보고는 하경에게 말했다.

“네.”

하경은 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이경은 지금 이 순간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평화로운 저녁 같은 순간. 곳곳에 밴 따스함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순간.

이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었다. 세상에 하경과 덜렁 둘만 남겨져 가끔은 무섭고 외로웠는데 갑자기 든든해졌다.

그 든든함을 준 재하가 고마워 이경은 옆에 앉아 있는 재하를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그가 입술을 쭉 내밀고 뽀뽀하는 시늉을 하더니 소년 같은 얼굴로 웃었다. 이경이 참 좋아하는 재하의 웃는 모습이었다.

***

결혼 준비가 한창인 어느 여름이었다. 가을이 결혼이라 준비할 것들이 많았지만 이경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도와주는 사람들만 다섯이라 사실 준비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니까.

힘들 것 하나 없는데 재하는 만날 때마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결혼 준비가 힘들어서 그런가? 바짝바짝 마르네.”

“몸무게 그대롭니다.”

또 시작이네. 이경이 착각한 거란 투로 대꾸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한우 먹으러 가자.”

재하는 이경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운전을 시작했다.

비싼 소고기를 먹여 놓고 재하는 이경을 호텔로 데려갔다.

“말라서 걱정이시면 얌전히 집에 보내 주세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이경이 손을 잡은 재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중요한 날인데.”

“중요한 날이요?”

이경이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재하를 보았다.

“차이경 잡아먹는 날.”

재하가 몸을 숙여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이경은 피식 웃었다. 말랐다고 걱정하면서 잡아먹는 건 또 열심히 잡아먹네.

호텔 안으로 들어온 재하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이경을 빠르게 욕실로 밀어 넣었다. 매일 같이 씻겠다고 난리더니 오늘은 웬일로 이경만 혼자 욕실로 보냈다.

씻고 나오자 재하가 기다렸다는 듯 이경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씻고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그런 후, 재하는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이경은 재하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렸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재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재하는 오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머리에는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벤트.”

토끼 머리띠를 하고도 재하는 참 당당하게 말했다.

“이벤트요?”

“오늘 생일이잖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늘은 이경의 생일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기에 모르는 줄 알았다. 가르쳐 준 적이 없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 서운하지도 않았다.

“부인 생일도 모를까.”

“생일인데 선물은 없습니까?”

이경이 웃으며 물었다.

“선물이 왜 없어. 나. 내가 선물이지.”

재하가 가슴팍을 툭툭 때리며 말했다.

거부하고 싶은 선물이었다. 토끼 머리띠며, 얼굴이며, 몸이며, 전부 따로 놀았다.

어느 댁 도련님 같은 얼굴에 토끼 머리띠는 별로 안 어울렸고, 산도적 같은 몸에 토끼 머리띠는 정말 안 어울렸다.

게다가 허리 아래는……. 이경은 한숨과 함께 재하를 외면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토끼 귀를 달고 그건 대체 뭡니까?”

이경이 힐끗 성이 난 재하의 허리 아래를 보았다. 토끼라면 귀여워야지 저렇게 흉흉한 건 왜 달고 있는 거람.

“이거 좋아하잖아? 이게 제일 큰 선물인데.”

재하가 슬쩍 제 물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토끼 귀랑 안 어울리잖아요.”

“토끼 꼬리라고 생각해.”

재하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토끼 꼬리는 그렇게 크고 길지 않습니다.”

토끼 꼬리 한 번도 못 봤나. 이경이 쿡 웃었다.

“만져 볼래? 감촉은 비슷할걸?”

재하가 그 꼴을 하고 이경을 향해 걸어왔다.

진짜 못 볼 꼴이다. 이경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재하가 침대로 올라와 이경의 앞에 앉았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귀에 속삭였다.

“그럼 먹어 볼래?”

그 말에 이경은 픽 웃음이 터졌다.

“저는 속물이라 물질적인 게 좋습니다.”

“속물이라 섹시하네.”

재하가 이경의 양쪽 볼을 한 손으로 잡고 입을 맞춘 뒤 떨어졌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재하의 손에는 반지 케이스가 있었다. 재하는 반지 케이스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다시 이경의 앞에 앉았다.

“토끼랑 결혼해 줄 거지?”

재하가 이경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물었다.

“프러포즈입니까, 생일 선물입니까?”

토끼랑 결혼하게 생긴 이경이 웃으며 물었다.

“이 반지는 프러포즈용. 생일 선물은 나.”

재하가 입을 맞추며 이경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토끼 머리띠를 빼 이경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귀엽고 섹시하네.”

재하가 이경의 샤워 가운 끈을 풀었다. 샤워 가운을 밀어젖히고 이경의 하얀 속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만 보십시오.”

재하의 시선에 부끄러워진 이경이 재하의 눈을 가렸다. 재하는 이경의 손목을 잡은 채 허리를 숙여 이경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찌릿,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경은 저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한동안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가슴에 머물렀다. 실컷 희롱을 하고 고개를 든 재하가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생일 선물 소파 위에 있어. 세상에 딱 세 개밖에 없는 시계. 그거면 만족해? 속물 차이경 변호사?”

재하가 이경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네, 마음에 듭니다. 근데 제일 마음에 드는 선물은 역시 서 전무님 같습니다.”

이경이 재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프러포즈 반지도, 세상에 딱 세 개밖에 없는 시계도, 사실 이경은 별 관심이 없었다. 눈앞의 토끼 같은 남자가 제일 좋아서.

“토끼 귀를 달았다고 여우가 토끼가 되는 건 아니지.”

재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여우 할 테니 서 전무님은 토끼 하십시오.”

“그럼 여우랑 계속 놀아 볼까?”

이경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재하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아.”

작게 내뱉은 이경의 신음에 재하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맞추었다.

재하의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을 받으며 이경은 생각했다. 이 토끼 같은 남자를 하루빨리 데리고 살고 싶다고.

토끼가 여우에게 잡아먹힌 밤이었다.

흉흉한 꼬리를 단 토끼는 한평생 여우에게만 잡아먹히겠다고 맹세한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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