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건강상의 이유로 석호가 WR 전자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는 않았다.
석호는 마약 투약과 성 추문 관련 경찰 조사를 받으러 다녔고, 은혜는 별채 앞마당에서 매일같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회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사 나갈 준비나 착실하게 해.”
명섭은 한 번 뱉은 말은 절대 되돌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질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로 명섭이 은혜를 지나쳐 별채로 들어갔다.
“회장님, 너무하세요. 제가 회장님 모시고 산 세월이 얼마인데!”
내내 잘못을 빌던 은혜는 서러움이 터졌는지 닫힌 별채 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다 아예 악다구니를 쓰며 문을 쾅쾅 두드렸다.
“주환이도 회장님 손자나 마찬가지잖아요. 재하랑 피를 나눈 형제예요. 어떻게 이렇게 모질게 할 수 있으세요.”
은혜는 억울하다고 울며 소리를 쳤다.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재하는 인기척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주환이 멋쩍은 얼굴로 재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
“너도 억울하냐? 쫓겨나서 미치게 억울해?”
재하가 삐딱한 표정으로 주환을 보았다.
“원래 내 집도 아닌걸.”
주환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나 데리고 들어가라.”
속을 알 수 없는 주환의 표정에 재하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주환을 지나쳐 본채로 향했다.
“형, 결혼 축하해. 차이경 변호사랑 잘 어울려. 아, 이제는 형수님이지.”
본채로 향하던 재하의 걸음을 주환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재하는 주환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잔잔한 얼굴로 주환이 말을 이었다.
“형이 결혼식에 초대 안 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 거야.”
주환의 말에 재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재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나랑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면 널 아꼈을 것 같기는 하다.”
이경을 보면서 재하는 종종 궁금했다.
주환이 친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이경이 하경을 아끼는 것처럼 주환을 아꼈을까. 이경이 하경을 대하는 것처럼 애틋했을까.
그 답은 늘 찾지 못했는데 왠지 오늘은 알 것 같았다. 만약 주환이 친동생이었다면, 엄마가 낳아 준 동생이었다면 아마 애틋했을 것이다.
“기분 좋다. 형이 그렇게 말해 줘서.”
주환은 정말 기분이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생은 악연 같고, 다음 생을 기약해 보자.”
그 얼굴을 보며 재하가 말했다.
재하가 주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다시 몸을 돌려 본채로 향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주환의 가족은 이사를 나갔다.
은혜는 이사를 나가는 내내 울었고, 석호는 분한 표정으로 재하와 명섭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오직 주환만 씩씩한 얼굴로 재하와 명섭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떠나는 주환의 뒷모습을 보며 재하는 몇 년 후에는 어쩌면 편하게 앉아 주환과 밥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하경아, 언니 괜찮아?”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내려트린 이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경을 보았다. 벌써 세 번째 묻는 것이었다.
“예뻐. 깔끔해. 단정해.”
하경은 조금 귀찮은 표정으로 이경에게 했던 대답을 반복했다.
“목이 좀 허전해 보이지 않아? 스카프를 할까?”
“언니야, 예쁘다고.”
하경은 이제 그만하라는 표정으로 이경에게 말했다.
오늘은 권명섭 회장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이었다. 권명섭 회장은 하경도 함께 오라며, 하경까지 집으로 초대를 했다.
“하경아, 언니가 너무 떨려서 그래.”
“재하 아저씨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회장님 완전히 언니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그래도.”
이경은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다. 권명섭 회장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떨렸다.
“떨지 말라니까.”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경은 긴장되어 미칠 것 같았다. 첫 재판 때보다 더 떨리는 기분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재하가 온 모양이었다.
“재하 아저씨다. 잘됐다.”
하경이 현관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하경이 문을 열어 주자 재하가 자기 집인 양 안으로 쓱 들어왔다.
“아저씨, 언니가 많이 떨리나 봐요. 아저씨가 우리 언니 긴장 좀 풀어 줘요.”
“뭘 떨고 그래.”
하경의 말에 재하가 이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회장님 뵙는 거라 떨립니다.”
이경은 재하의 말에 대답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에 재하의 입가가 끝도 없이 올라갔다. 나 죽으라고 또 귀엽지, 중얼거린 재하가 하경을 보며 말했다.
“하경이 눈 감아.”
“네! 눈 감았어요.”
재하의 말에 하경이 얼른 눈을 감았다.
재하가 이경의 볼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재하의 행동에 이경이 작게 웃었다. 재하 덕에 긴장이 좀 풀렸다.
“이제 눈 떠.”
재하가 이경의 볼을 툭 건드리고 하경에게 말했다.
“근데 나 성인인데 그냥 보면 안 되나?”
“애들은 이런 거 보는 거 아니야.”
하경의 말에 재하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늦겠습니다. 어서 가요.”
이경이 현관으로 향했다.
그 뒤를 재하와 하경이 따라갔다.
구두를 신고 있는데, 재하가 이경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경이 올려다보자 재하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떨지 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이미 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며느리야.”
“네.”
재하의 말에 이경이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재하는 신발장 위에 있는 선물을 챙겨 들며 투덜거렸다.
“준비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빈손으로 가요?”
“네가 선물인데 뭘 굳이 이런 걸 챙겨.”
재하의 말에 이경이 작게 웃었다.
“좋을 때다.”
먼저 밖으로 나가 있는 하경이 두 사람을 놀려 댔다.
“형부한테 까불어.”
재하가 웃음을 터트리며 하경에게 말했다.
“에이, 형부는 아니죠. 난 아직 허락 안 했는데?”
하경이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알았어. 가방 사 줄게.”
하경의 말에 재하가 얼른 입을 열었다.
“가방이랑 우리 언니를 바꿀 수는 없죠.”
“그 아이돌 콘서트 티켓?”
재하는 하경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티켓을 입에 올렸다.
“좋아요! 형부!”
하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가방이랑은 못 바꿔도 좋아하는 아이돌하고는 바꿀 수 있는 모양이다. 이경이 팔랑개비 같은 동생을 살짝 흘겨보고는 집을 빠져나왔다.
여름을 목전에 둔 찬란한 계절이었다. 초록색 잎들로 물든 세상은 싱그러웠다. 재하의 웃음만큼이나.
재하의 차를 타고 이경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얼마 후, 재하의 차가 담장이 높은 집 앞에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이경은 육중한 대문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담장 높이에는 여전히 주눅이 들었다.
“우와.”
이경의 옆에 선 하경이 입을 벌리며 높은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집 엄청 좋다고 하경이 이경의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들어가자. 우리 영감님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관리인에게 주차를 맡기고 재하가 대문으로 다가갔다.
재하를 따라 집으로 들어선 하경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원 진짜 예쁘다, 진짜 넓어, 집도 되게 예쁘다. 하경은 입을 벌리고 재하의 집을 구경했다.
“처제, 이제 처제 집이야. 적응해.”
재하가 하경의 모습에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나도 언니랑 같이 살아요?”
재하의 말에 하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누구랑 살려고?”
하경의 말에 덩달아 재하도 눈이 동그래져 되물었다.
이경의 시선이 재하에게 닿았다. 아직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지난번 재하가 할아버지랑 같이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괜찮냐고 묻기는 했었다.
불편하면 본가 근처 빌라나 단독 주택을 알아보겠다는 말에 이경은 괜찮다는 대답을 했었다. 그 대답을 하면서 하경의 거처를 고민했었다.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얻어 주어 매일 오고 가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했었는데, 재하는 하경도 같이 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고마워 이경은 재하의 곁으로 다가가 슬쩍 손을 잡았다.
그런 이경을 힐끔 한 번 보고는 재하가 하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제, 나랑 언니랑 같이 살 거야. 불편해도 처제가 좀 참아. 언니랑 형부 그늘에 있어야지 어딜 가려고.”
재하는 이경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하경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형부.”
하경은 촉촉해진 눈으로 재하를 보고는 이경에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하경과 눈이 마주친 이경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재하가 본채로 고갯짓을 했다.
“고맙습니다, 전무님.”
이경은 재하를 따라 본채로 향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제 전무 아닌데?”
재하가 이경의 손에 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재하는 얼마 전 WR 산업에서 WR 전자 경영 기획 팀 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호의 일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자리를 옮긴 재하는 석호가 저질렀던 비리를 수습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죠.”
“그러니까 제대로 불러.”
“네, 상무님.”
WR 전자 쪽 직함을 이경이 부르자, 재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차이경을 누가 말려, 중얼거리고는 재하가 본채 문을 열었다.
“처제가 한번 골라 봐.”
안으로 들어간 재하가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하경에게 입을 열었다.
“뭘요?”
하경이 눈을 깜박이며 재하를 따라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언니가 형부를 뭐로 부르면 좋을지. 1번, 자기. 2번, 여보. 3번, 서방님.”
“4번, 오빠!”
하경이 다른 호칭을 힘차게 외쳤다.
“오빠?”
재하가 이경을 보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다들 오빠라고 부르던데.”
하경이 이경을 보며 재하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차이경 입에서 오빠 소리 하는 게 상상이 안 되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재하 오빠.”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이경은 재하를 바로 오빠라고 불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