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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71화 (71/83)

71화

재하의 결혼 소식과 동시에 서석호 스캔들이 터졌다. 불법 마약 투약과 성 추문 스캔들이었다. 모 유명 연예인의 연애설이 뒤로 밀릴 정도의 아주 큰 스캔들이었다.

거실로 들어선 재하를 향해 책이 날아들었다. 책이 재하의 얼굴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장본 커버에 재하의 얼굴이 긁혀 피가 맺혔다.

“염병할 새끼.”

재하에게 책을 집어 던진 석호가 씩씩거렸다.

“아주 정력도 좋으셔. 그 나이에 서주환보다 어린 애들 끼고 제대로 즐기셨어.”

재하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고 석호가 서 있는 소파로 향했다. 재하는 얌전히 테이블에 책을 내려놓고 석호를 보았다.

“네가 감히 애비한테!”

석호는 재하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야 주신 대로 돌려 드린 거고. 그러게 왜 내 여자는 건드리셨어요?”

“서재하!”

“약물 중독은 치료하면 됩니다, 부회장님. 섹스 중독은…… 치료가 될까 몰라.”

석호의 약을 바짝 올리고 있는데, 안방 쪽에서 파리한 얼굴의 은혜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재하가 입가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강은혜 여사님은 어쩌고 그 어린애들이랑 놀아나요? 난 또 세기의 사랑인 줄 알았더니. 비서실 윤나영이랑은 무슨 사이에요? 무슨 사이기에 오피스텔을 얻어 주나.”

거실을 향해 다가오는 은혜의 얼굴이 갈수록 하얗게 질려 갔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서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애비 망신을 시켜도 정도껏이지!”

석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재하의 뺨을 때렸다. 재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에 입가를 올렸다. 주환을 패고 온 날에도 이렇게 뺨을 맞았다. 그때 생각이 나 재하는 기분이 그때처럼 엿 같아졌다.

“서 부회장!”

그때, 언제 왔는지 등 뒤에서 진노한 권명섭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섭은 성큼성큼 석호에게 다가와 똑같이 뺨을 때렸다. 석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돌아간 얼굴에는 모욕감이 떠올랐다.

“재하, 네 새끼 아니고 내 새끼야. 수연이 죽던 날에 내가 분명히 말했어!”

명섭은 석호를 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온몸의 장기가 썩어 문드러졌던 그날, 명섭은 석호에게 분명히 말했다. 재하는 이제 네 새끼 아니고, 내 새끼라고. 내 새끼 애비 노릇 제대로 하라고 살려 두는 거라고. 피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말했었다.

“아버님이 계속 재하를 싸고도니 저놈이 애비 알기를 우습게 알죠.”

석호가 야속하다는 표정으로 명섭을 보며 비난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까지 WR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알기는 알아? 다 재하 덕이야! 네 능력이 좋아서 내가 너 붙잡고 있는 줄 알았니? 아니, 아니지, 서 부회장! 네가 재하 애비라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네 명줄도 붙어 있는 거야.”

흥분한 명섭의 숨이 거칠어졌다. 걱정된 재하가 명섭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수연이 죽던 날, 수연이가 그러더라. 재하는 아빠 많이 좋아한다고. 정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는 것도 애비라고 재하가 너를…….”

명섭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석호의 가슴을 퍽퍽 때렸다. 석호는 고개를 숙인 채 명섭의 주먹질을 받아 냈다.

“너는 재하 때문에 WR 부회장도 해 먹은 거다. 수연이 말 아니었으면 진작 내쳤어. 한국 땅 못 밟고 살게 했을 거야.”

“…….”

“재하, 이 녀석이 애비라고 네놈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엄마 잃은 불쌍한 것한테 아빠까지 빼앗을 수 없어서 그냥 두고 봤는데 이젠 그냥 못 놔두겠다. 지 새끼 잡아먹으려고 하는 놈은 인간도 아니지.”

명섭이 차가운 얼굴로 석호를 보았다. 차라리 그때 쫓아 낼 걸 그랬다. 강은혜 아니면 안 되겠다고 은혜랑 주환이 받아 달라고 울며 비는 서석호를 그때 쫓아냈어야 했다.

서석호가 재하 버릴까 봐, 그럼 어린 게 또 얼마나 상처받을까 안쓰러워 은혜와 주환을 꾸역꾸역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하에게 상처만 더 준 꼴이었다. 이제 더는 제 아버지에게 상처받고 사는 거 못 보겠다.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재하 애비 좀 봐주세요. 이 사람이 재하를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매일 재하 걱정이에요.”

은혜가 명섭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내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는 은혜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재하는 알고 싶었다. 남편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인지.

“할아버지, 나 이제 아버지 필요 없어요. 한 번도 내 아버지였던 적 없는 사람이에요. 서주환 아버지로 평생 살게 해 주세요.”

재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명섭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시선은 계속 석호에게 향해 있었다. 일그러지는 석호의 얼굴을 보며 재하가 한쪽 입가를 올렸다.

“서 부회장님, 쪽팔리게 페이퍼 컴퍼니가 뭡니까? WR 돈이 다 거기로 줄줄 새고 있더라고. 좀도둑도 아니고.”

“서재하, 너.”

페이퍼 컴퍼니 얘기에 석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명섭은 혀를 찼다. 재하가 얼마 전 관련 자료들을 들고 명섭을 찾아왔다. 서 부회장이 자기를 치면 이거 까발려도 되냐고 묻는 재하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내가 멍청하게 당할 줄 아셨어요? 그거 말고도 많던데.”

재하가 피식 웃으며 석호를 보았다.

“이거 까발려지면 시끄러워져. 서 부회장, 다 놓고 너희 세 식구 조용히 이 집에서 나가서 WR이랑 상관없이 살아.”

명섭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퍼졌다.

석호가 고개를 들어 명섭을 보았다. 석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걸릴 것들이야 많았다. WR처럼 큰 그룹 경영하고 그 안에서 위치를 다지려면 불법적인 일은 필수였다.

걸릴 것들이 하도 많아 석호는 재하가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아버님, 억울합니다. 그건 전부 WR을 위해서!”

“WR이 그저 그런 기업도 아니고 페이퍼 컴퍼니가 왜 필요합니까? 없어 보이게.”

재하가 석호의 말을 비웃었다. WR이 아닌 제 이익을 위해 수도 없이 불법적인 일들을 저질러 왔다. 그랬으면서 무슨 WR 핑계는.

“두말하게 하지 마라. 시끄러워지는 거 싫으면 WR에서 손 떼고 이 집에서 나가 살아.”

명섭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석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WR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재하에게 도덕적인 타격만 입혀 승계 구도에서 멀어지게 할 생각이었는데, 재하의 반격이 너무 거셌다. 재하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을 줄 몰랐다. 판단 실수였다.

“회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우리 주환이는 아무 잘못 없어요. 주환이가 재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회장님 아시잖아요. 주환이가 재하 잘 따르는 거.”

멍한 석호 대신 은혜가 명섭의 앞에서 다시 빌기 시작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은혜의 모습에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회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님, 용서해 주세요.”

멍하니 서 있던 석호도 그제야 무릎을 꿇고 명섭에게 빌었다.

“역겨운 니들 꼬라지 더는 못 봐준다. 내 집에서 나가거라.”

명섭은 엎드려 비는 석호와 은혜를 싸늘한 시선으로 보고는 몸을 돌려 본채를 나갔다.

명섭이 나가고 은혜는 울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서럽게 울던 은혜는 석호를 쏘아보았다.

“주환이한테 WR 준다며! 그게 꿈이라며!”

은혜가 석호에게 악을 썼다.

“시끄러워!”

석호도 은혜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꼴을 재하는 삐딱하게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좀도둑인 줄 알았더니. 재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재하의 웃음소리에 은혜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혜의 얼굴에 한순간 혐오감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지고 재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세요?”

재하가 인상을 썼다.

“재하야, 내가 잘못했어. 나도 너랑 잘 지내고 싶었어. 근데 네가 곁을 안 주니까…….”

은혜는 후회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은혜도 나름 노력이라는 것을 했었다. 재하의 마음을 얻어 권 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었다.

하지만 어린 재하에게는 그 노력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은혜도 포기하고 말았다. 미운 감정은 쌓일 대로 쌓여 이제는 서로에게 혐오감만 남은 사이였다.

“내 탓을 하네?”

재하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멍청한 새끼도 아니고 엄마 죽인 여자한테 곁을 주는 게 말이 되나.

“이제라도 새엄마 노릇 제대로 할게. 네가 회장님 마음 좀 돌려줘.”

“강은혜 여사님, 새엄마 필요 없고요. 내 나이가 몇인데 엄마가 필요해. 우리 영감님은 대쪽 같은 분이라 마음 쉽게 못 돌리고요.”

재하가 은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껄렁한 투로 말했다.

“재하야.”

은혜는 간절한 얼굴로 재하에게 매달렸다.

“우리 영감님, 손자가 잘못한 일 있으면 사위 내연녀한테도 사과시키는 양반이야. 그거 보면 모르겠어요? 강은혜 여사나 서석호 부회장님이나 끝났다는 얘기지.”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가 은혜와 석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재하야, 애비가 미안하구나.”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석호는 재하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재하는 그 말에 비죽 웃으며 석호에게 다가갔다. 석호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쉰 재하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아버지, 제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시지. 자전거 가르쳐 주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요, 이제 다 커서 아버지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됐습니다.”

재하의 말에 석호가 얼굴을 구겼다. 억지로 화를 참는 표정이 참 볼만하다고 생각하며 재하가 몸을 돌려 본채를 빠져나왔다.

재하는 별채로 향했다. 별채 거실로 들어선 뒤 부루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명섭에게 다가갔다.

“얼굴 꼴이 그게 뭐야!”

명섭은 재하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며 벌컥 화를 냈다.

슬픈 얼굴로 화를 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재하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영감님, 많이 속상했겠네. 조각 같은 손자 얼굴에 흠집 나서.”

“왜 가만히 맞고만 있어!”

“그럼 아버지를 패? 왜 손자 패륜아 되라고 등을 떠밀어.”

재하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명섭은 속이 상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면 금방 늙어. 여기서 더 늙으면 어떡해? 증손자 봐야지.”

“……차 변호사가 진짜 너랑 결혼해 준다냐?”

한숨을 내쉬던 명섭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재하를 보았다. 반박 기사도 보았고, 재하가 직접 얘기도 했지만 명섭은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이경이가 이제 나 좋아해.”

재하는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차이경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서 재하는 좋았다. 짝사랑 아니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다.

“차 변호사 헛똑똑이네. 어쩌자고 이런 놈이랑.”

명섭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손자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저런 망나니 같은 놈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뭐.”

“너, 이놈의 자식, 결혼하자고 차 변호사 협박하고 그런 거 아니지?”

여전히 명섭은 재하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재하는 명섭의 태도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걔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런 것도 보내 준다고.”

재하가 핸드폰을 꺼내 이경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네♡] 겨우 하트 하나 보내 준 것이었지만 재하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것도 보내는 걸 보면 아주 네가 싫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니까. 나 좋아한다고.”

재하는 명섭의 옆에 붙어 이경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명섭은 즐거운 얼굴로 재하의 말을 들어 주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던 재하가 명섭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나 이제 아버지 내 마음에서 완전히 놓을 거야. 이경이한테 사랑 주고, 사랑받고 그러면서 살게.”

“자식 낳으면 네 자식한테 아버지랑 하고 싶었던 거 다 해 줘. 그럼 네 상처 다 아물어.”

명섭이 재하의 무릎을 토닥이며 말했다.

“응.”

재하는 이경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제 재하에게 가족은 이경과 하경, 그리고 할아버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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