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가 하경이한테 서 전무님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가 가만히 이경을 끌어안았다. 재하는 이경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꿈같지? 차이경이 나 좋아한다니까 되게 꿈꾸는 것 같네.”
한숨 같은 목소리로 재하가 말했다.
“꿈 아닙니다. 저 서 전무님 좋아합니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거 섹시하네.”
재하가 입가를 올렸다.
“서 전무님이 이 시리얼 드셨다고 하면 하경이도 좋아할 겁니다.”
이경이 재하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이경은 시리얼이 담긴 그릇에 우유를 따랐다. 재하에게 숟가락을 내밀고 어서 먹어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재하가 의자에 앉아 시리얼을 바라보았다. 고작 시리얼을 앞에 두고 재하는 꽤나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다. 재하가 시리얼을 먹는 모습을 보며 이경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학 시절에 드셨던 맛 그대롭니까?”
“그때보다 더 맛있어.”
이경의 물음에 재하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는 하경의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음 주 중으로 하경이랑 저녁 먹게 약속 잡아.”
“네.”
“하경이가 허락 안 해 주면 무릎 꿇고 빌어야지.”
재하가 시리얼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으며 말했다.
그 말에 이경은 작게 웃으며 재하를 보았다.
“왜? 사랑스러워 죽겠어? 네가 좋아하는 남자, 먹는 것만 봐도 행복해?”
“네, 행복합니다.”
재하의 말에 이경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죽겠네, 진짜. 빨리 먹어, 차이경. 침대로 가게.”
재하가 이경의 빈 그릇에 시리얼과 우유를 부어 주었다.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자, 아.”
이경이 눈을 흘겼지만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리얼을 떠 이경에게 먹여 주었다. 그러고는 저도 한입 크게 떠먹었다.
그렇게 시리얼을 급하게 먹고 재하는 정말 이경을 침대로 데려갔다. 작고 좁은 침대에서는 계속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유설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퍼지는 원두 향이 마음에 들었다. 큰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 전무, 껄렁껄렁해 보여도 예리하고 무서운 사람이야.”
유설은 김오범 대표의 말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저만 보시면 서 전무 얘기시네요.”
찻잔을 내려놓은 유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
“벌써 세 번째예요, 큰아버지.”
재하가 오범을 찾아오고 바로 다음 날, 오범은 유설을 불러 혼을 냈다. 그 이후로 유설을 볼 때마다 오범은 재하의 얘기를 꺼냈다.
“요즘 WR 심상치 않아서 그래. 서 부회장이든 서 전무든 어느 한쪽이랑 척 질 시기가 아니야.”
“승계권 놓고 부자지간 피 튀기게 싸우고 있다는 소문 진짜인가 봐요?”
“뒤숭숭한 시기야. 권 회장님이야 당연히 서 전무 편이지만 서 부회장 세력도 무시 못 하지.”
“그럼 송하가 킹메이커 역할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유설이 미소를 지었다.
김오범 대표실에서 나온 유설이 성현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성현이 전시회장을 찾아온 이후로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성현은 2주에 한 번씩 예준과 시간을 보냈지만 유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약도 오르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이경이 성현의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유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차 변호사.”
“김 작가님.”
유설을 알아본 이경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덤덤한 얼굴로 돌아왔다.
유설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이경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성현의 방에서 나온 것도.
“시간 되면 차 한잔할래요?”
“죄송합니다. 시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경은 유설의 제안을 가볍게 거절하고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이경의 뒷모습을 유설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픽 웃음을 터트렸다. 유설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정화 씨, 나예요. 그림 한 점 WR 서초 사옥으로 가져와요.”
—어떤 거로 가져갈까요?
“크로노스의 밤이요.”
전화를 끊은 유설이 성현의 방을 지나쳐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잠시 후, 유설은 그림을 들고 서석호 부회장을 찾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보내 주신 화환 감사합니다.”
“뭘 이렇게 따로 인사를 와요.”
서석호 부회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유설에게 말했다.
“사모님께서 오셔서 그림을 사 주셨어요.”
“아, 그 그림 좋던데요?”
석호는 은혜가 사 온 그림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그 그림, 작업하는 동안 집중해서 그리지 못했거든요. 마음으로 그린 게 아니라 손으로 그렸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었는데 사모님께서 사 주시는 바람에 제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그랬어요? 난 좋던데. 우리 주환이도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림이라고 하고.”
“부끄럽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예술가 마음 이해하기 힘들고. 보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충분하니 김 작가,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림 한 점 가지고 왔어요. 받아 주세요, 부회장님.”
유설이 옆에 놓여 있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석호의 시선도 유설을 따라 종이로 포장되어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포장되어 있어 그림이 보이지는 않았다.
“김 작가, 마음이 꽤 여린 것 같네. 김 작가 작품을 어떻게 그냥 받아요.”
“아닙니다, 제 마음이에요. 제목은 크로노스의 밤이에요. 그림이 보이지는 않지만.”
유설이 웃으며 말했다.
“크로노스라면…….”
“네, 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그리스 신화의 신이죠.”
유설의 말에 석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유설이 그림 때문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석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석호의 표정에 빙긋 웃은 유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 송하 변호사랑 스폰 관계예요. 돈으로 여자를 사셨죠.”
“…….”
“이쪽에서야 비일비재한 일이죠.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거 역겹게 생각해요. 게다가 서 전무님은 전적이 화려하시니…….”
유설이 말끝을 흐리며 커피를 마셨다. 김오범 대표실에서 마신 커피보다 맛이 좋았다.
“그림 잘 받았어요, 김 작가.”
굳어 있던 석호의 얼굴이 풀어지고, 석호도 커피를 마셨다. 석호도 유설과 같은 생각이었다. 커피 맛이 좋았다.
***
별채에서 지내는 할아버지 권명섭 회장의 얼굴을 보고 재하는 본채로 들어왔다. 곧장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석호가 재하를 불러 세웠다.
“애비를 봤는데 인사도 안 하냐?”
“제 인사 받고 싶으셨어요?”
재하가 석호의 말을 비웃었다.
“행동거지 똑바로 하고 다녀라.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석호가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는 이미 20년 전에 제 얼굴에 먹칠하셨잖아요.”
“내가 너한테 정을 주지 않는 건 네 이런 태도 때문이야.”
석호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찾는 표정이었다.
“아들한테 정 없는 게 뭐 자랑이라고.”
“날 원망 마라. 다 네가 못나게 굴어 그런 거니.”
“제 원망도 마세요. 돌아가신 어머니 복수하는 거니까.”
재하가 싸늘한 표정으로 석호를 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재하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하지만 재하는 제 마음에 상처가 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받는 상처가 너무 익숙한 탓이었다.
“차이경 보고 싶네.”
방으로 들어온 재하는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서 전무님.
조금은 피곤한 이경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렀다. 노랫소리 같은 이경의 목소리에 재하의 입가가 올라갔다.
“어디야? 로펌?”
—네, 일하고 있습니다.
“뭔 로펌이 사람을 이 밤까지 부려 먹어?”
—할 만합니다.
이경다운 대답에 재하는 입가를 올렸다.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애교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차이경에게서는 나오기 힘들 테니 대신 내가 징징거려야겠다.
“보고 싶어, 이경아.”
—네에.
“너는 뭔 대답이 그래? 남자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하면 너도 보고 싶다고 해야지.”
—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재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근데 이게 또 차이경 매력이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핸드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이경의 웃음소리에 이미 재하는 방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보고 싶으니까 갈게.”
—일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기다리면 되니까 넌 일해.”
재하가 전화를 끊고 바로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로펌에 도착한 재하는 도착했으니 이경에게 일 끝내고 나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네♡]
이경에게서 온 답장에 재하는 미친놈처럼 웃었다. 옆에 붙은 하트가 좋아 미치겠어서 이경이 보낸 답장을 보고 또 보았다.
“이걸 잡아먹어, 말아.”
이경이 보낸 답장을 보며 재하가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야 차이경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집어삼키고 싶은데 양심상 이 밤까지 일하는 이경을 건드리기가 미안했다.
그렇게 계속 이경이 보낸 답장을 붙잡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수석 쪽을 돌아보니 이경이 허리를 숙이고 재하를 보고 있었다.
“쟤는 뭐 저렇게 예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재하가 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이경이 문을 열고 조수석에 탔다.
“일은 다 했어?”
“네, 다 끝냈습니다.”
이경이 단정한 동작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배는 안 고파?”
“안 변호사님이 떡을 나눠 주셔서 그거 먹었어요.”
“집으로 얌전히 데려다줄게.”
피곤해 보이는 이경의 얼굴에 재하는 이경을 잡아먹을 계획을 주말로 미루었다. 그렇게 이경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운전을 하다 하도 조용해 재하가 힐끔 이경을 돌아보았다. 꽤 피곤한지 이경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로펌을 폭파하든 해야지. 왜 애를 이렇게 부려 먹어.”
재하가 언짢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운전을 했다. 늦은 밤이라 차가 없었지만 평소보다 늦게 이경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를 세워 놓고 재하는 한동안 잠든 이경을 바라보았다. 좋아 죽겠어서 잠든 이경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만지면 깰 것 같아 그냥 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재하는 좋아 죽겠는 이경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후, 이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자세를 바로 한 이경이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 왔습니까?”
“응.”
“깨우시죠.”
“애처롭게 자는데 어떻게 깨워.”
재하가 이경에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깼으니까 좀 만져야겠다. 재하가 다시 이경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