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저거 재하 아저씨 거야.”
“응?”
김치통을 꺼내다 말고 이경이 하경을 돌아보았다.
“미국 가면 재하 아저씨한테 사다 주기로 약속한 거야. 아저씨 유학할 때 저 시리얼 많이 먹었다고 해서. 가끔 저게 먹고 싶대. 그래서 사다 주기로 약속했었어.”
하경이 이경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랬어?”
“언니랑 아저씨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 몰랐을 때 약속한 거라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언니.”
“뭐가 미안해.”
“재하 아저씨가 언니한테 상처 줬잖아. 근데 나는 자꾸만 재하 아저씨가 잘해 준 것만 생각나.”
하경이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미안한 감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경아.”
“……언니가 너무 좋아서 그랬대. 언니가 너무 좋아서. 우리 언니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그렇게 말했어.”
발끝에 주었던 시선을 들고 하경이 말했다.
하경의 말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재하의 진짜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 이제 놀 거 다 놀았으니 가라고 했으면서 하경이한테는 좋다는 말을 하고.
답이 없는 남자. 그 어떤 보기에서도 답을 골라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오류인가. 서재하가 낸 문제가 잘못된 걸까. 놀 거 다 놀았으니 가라는 그 말, 잘못 출제된 문제였으면 좋겠다.
“언니, 저 시리얼만 재하 아저씨한테 주면 안 돼? 나 건강해졌으니까 고마…….”
말을 하던 하경은 화들짝 놀라, 말을 삼켰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듯 하경의 시선이 불안했다.
“하경아.”
이경이 하경의 손을 잡았다.
“언니 생각하면 재하 아저씨한테 고마워하면 안 되는데,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
하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마워해도 돼. 언니도 서 전무님한테 고마워. 너 수술받게 해 주고, 이렇게 건강하게 옆에 있게 해 준 사람이니까.”
“밉잖아. 언니한테 그런 짓을 한 사람이잖아.”
“언니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이경은 하경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비밀?”
“사실은 언니도 서 전무님이…… 좋아.”
뱉어 낸 그 말에 이경은 심장이 뛰었다.
좋아하는구나, 나는 서재하를 좋아하는구나.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에 이경은 제 감정과 제대로 마주했다.
둔해서 몰랐던 건지, 좋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감정을 막은 건지,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재하가 좋다는 것이었다.
“언니?”
“좋았어. 서 전무님이랑 함께했던 시간들 좋았어.”
이경의 머리에서 재하와의 시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첫 만남.
거친 재하를 변호사로서 감당했던 시간.
모욕적이던 첫 밤.
그 밤이 지나고 보여 주었던 재하의 행동들.
좋아해 달라고 애원하던 얼굴.
물수제비 뜨는 법을 가르쳐 주던 밤.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들 속에서 이경은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들을 알아보았다. 서재하니까 그런 계약이 가능했었다는 말의 의미도.
“좋아해, 하경아. 언니는 서 전무님 좋아해. 좋아해서 할 수 있었어. 그딴 계약도.”
이경은 하경을 보며 말했다.
이제야 깨달아 버린 마음에 이경은 허탈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
봄기운으로 가득한 창밖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이경의 얼굴에는 조금의 감흥도 없었다.
“벚꽃도 벌써 다 지고. 올해도 벚꽃 놀이를 못 갔네.”
운전을 하는 성현의 목소리에 그제야 이경이 고개를 돌렸다.
“봄은 너무 짧아요.”
“예쁜 계절이라 길면 좋을 텐데.”
성현이 웃으며 이경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경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현의 차가 호텔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성현이 발레파킹을 맡기고 이경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현을 따라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던 이경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재하가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하게 생긴 낯선 여자가 누구인지 이경은 알 것 같았다. 대법관 딸이라는 사람, 요즘 서재하가 만나고 있다는 그 사람인 듯했다.
“차 변호사?”
따라오지 않는 이경을 성현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경은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 이경은 성현에게 답을 들려줄 생각이었다. 서 전무의 장난이 끝나면 오라고 했던 그 말에 대한 답을.
하필이면 그런 날, 이런 곳에서 서재하를 보게 되다니.
성현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여자를 보고 있던 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경은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재하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상을 구겼다.
“여기서 뵙네요, 서 전무님.”
재하를 발견한 성현이 테이블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러게. 여기서 보네.”
재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현과 이경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차 변호사랑 식사하러 왔습니다.”
성현이 조금 뒤에 서 있는 이경을 돌아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냥 갈 수도 없어 이경은 재하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재하의 시선을 오롯이 느끼며 이경은 성현의 옆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이경은 재하에게 인사를 했다.
재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경을 빤히 보았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성현이 재하와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이경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재하의 시선이 이경의 허리에 있는 성현의 손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이경은 꾸벅 인사를 하고 성현을 따라 움직였다. 자리에 앉은 이경은 저만치 보이는 재하의 테이블을 힐끔 보았다.
재하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꽤 진지한 얼굴이라 재하가 좀 낯설게 느껴졌다.
“A 코스 괜찮지?”
“네? 네.”
성현의 말에 이경이 재하에게서 시선을 뗐다. 성현이 복잡한 미소를 보이고 살짝 재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이경을 보았다.
“A 코스로 하자.”
성현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하고 주문을 했다.
주문을 끝낸 성현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이경은 성현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지만 신경은 내내 재하에게 쏠려 있었다.
한 번씩 재하가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럴 때면 이경은 먹고 있는 음식들이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사실은 오늘 팀장님께 제 대답 드리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
식사 말미 이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성현은 긴장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요. 제게 팀장님께 오라고 하셨잖아요.”
“응. 그랬지.”
성현은 이경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대답, 오늘 하려고요.”
“……천천히 생각해도 돼, 차 변호사.”
성현은 이경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시라도 빨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흔들리는 성현의 눈동자와 달리 이경의 눈동자는 차분한 빛을 냈다. 생각이 확고하게 정리된 얼굴로 이경은 성현을 바라보았다.
“차 변호사.”
“팀장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유능한 파트너 변호사. 제 롤모델이었어요. 사적으로 가까워진 후에는 팀장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
성현이 이경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얼굴이었다.
이경은 말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 천천히 물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성현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확실하게 자각한 이상 더는 답을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이 성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람 대 사람으로 팀장님 정말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인 것 같습니다. 남녀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이경이 분명하고 바른 어조로 말했다.
재하와의 계약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성현과 남녀 관계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다.
마음이 흐르는 방향은 성현이 아니라 재하였다. 인지가 조금 늦었을 뿐 이경에게 재하는 단순하게 좋은 사람이 아닌 좋아하는 남자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차 변호사가 나한테 들려줄 말이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더라.”
고개를 든 성현이 씁쓸한 미소로 이경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죄송하기는. 사람 감정 문제인데 죄송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성현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좋은 분이십니다, 팀장님은. 제가 많이 의지했고요.”
이경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성현을 보았다. 성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라 의지도 했었고, 착각도 했었다. 동경을 사랑이라고.
“조금이라도 차 변호사한테 의지가 됐다니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나 먼저 일어나도 될까? 지금 좀…… 도망치고 싶네?”
성현이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밥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이경은 미안한 마음에 밥값을 내겠다고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차 변호사한테 밥을 얻어먹으면 내가 정말 창피해지잖아.”
성현은 조금은 가벼운 어투로 말하고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떠났다.
성현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이경은 잠시 성현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그 자리에 고였다.
한동안 성현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이경은 속이 울렁거려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렀다. 속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한 모양이었다.
‘체하면 와. 내가 따 줄게.’
재하의 목소리가 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 이경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앉아 있는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재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재하와 눈이 마주친 이경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던 것을 멈추고 이경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재하를 향해 걸어갔다.
‘체하면 와. 내가 따 줄게.’
여전히 귀에서는 재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솔직하게 부딪혀 보고 싶었다. 놀 거 다 논 여자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솔직하게 서재하에게 말하고 싶었다.
놀 때는 못 했던 말을 다 놀고 나서야 하려고 한다. 이경은 귓가에서 계속 울리는 재하의 목소리를 의지해 그에게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