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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65화 (65/83)

65화

“그냥 언니 혼자 가면 안 돼?”

신발을 신고 있는 이경의 등 뒤로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하경을 돌아보았다.

“가기 싫어?”

“불편해서. 내가 실수해서 언니 곤란해지면 어떡해?”

하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경을 보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너 수술하느라 고생했다고 밥 사 주고 싶다고 하셨어. 같이 가서 자전거도 보고.”

“응.”

이경의 말에 하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싫어하는 하경을 억지로 데려가는 것 같아 이경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한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들어오자.”

이경은 하경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나와 보니 성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경은 어색한 얼굴로 성현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 좋아 보이네. 나 기억하죠?”

성현이 웃으며 하경에게 말을 건넸다.

“네.”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하경이 재하와 달리 성현을 불편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거절할 걸 그랬나 보다. 이경이 어색해하는 하경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타요. 차 변호사도 타고.”

성현이 뒷좌석과 조수석 문을 차례로 열며 말했다.

이경과 하경은 성현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성현은 두 사람을 캐주얼한 분위기의 스테이크집으로 데려갔다.

성현은 하경에게 의견을 물어보며 이것저것 음식을 많이 시켰다. 하경의 마음에 들기 위해 신경 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미안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 모습에 이경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경도 성현이 묻는 것을 열심히 대답해 주고, 즐거운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경은 하경도 애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색한 식사 자리를 끝내고 세 사람은 성현이 자주 찾는다는 자전거 가게로 향했다. 성현은 꼼꼼하게 하경이 탈만 한 자전거를 봐 주었다.

“이게 좋겠다.”

성현이 자전거를 고르고 의견을 묻듯 하경을 보았다.

하경은 베이지색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 보세요.”

“아직 자전거 못 타요.”

주인의 말에 하경이 손사래를 쳤다.

“자전거 못 타면 내가 가르쳐 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언니가 가르쳐 주기로 했어요.”

성현의 말에 하경이 고개를 흔들며 빠르게 말했다. 누가 봐도 불편해서 거절하는 모양새라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직 무리하면 안 돼서 제가 챙겨야 돼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경이 나섰다.

“그렇겠네.”

성현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예요?”

이경은 주인에게 물으며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성현이 황급히 이경을 막았다.

“내가 사 줄게. 하경 학생, 고생했으니까 선물하고 싶어.”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성현의 말에 이경과 하경이 합창하듯 말했다.

성현에게 받기에는 너무 과한 선물이었다. 좋은 자전거라 그런지 가격이 꽤 나갔다.

성현은 자매의 합창에 작게 웃고는 지갑을 꺼냈다. 이경은 성현의 지갑을 잡으며 바로 주인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팀장님.”

“정말이에요. 밥 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경의 말에 하경이 얼른 덧붙였다. 자전거는 정말 부담스럽다는 얼굴이라 결국 성현은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전거를 사고, 성현은 이경과 하경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자전거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는 하경을 이경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차 한 대가 빌라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낡은 빌라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량이라 시선이 갔다. 그러다 이경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다. 서 전무님 차 같은데?

이경은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차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날 보러 왔으면 보고 가야지. 그냥 그렇게 내빼는 게 어디 있어, 서재하.

“언니?”

하경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경이 하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성현이 함께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집 몇 층이야? 자전거 올려다 주고 갈게.”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성현의 말에 이경이 멀어지는 차를 힐끔 보고 대답했다.

“그 정도는 하게 해 줘.”

성현이 웃으며 자전거를 들었다.

이경은 공동 현관으로 향하는 성현을 따라가며 빌라 단지 입구를 계속 힐끗거렸다. 차가 보이지 않은 후에야 이경은 고개를 돌렸다. 눈에는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2층으로 올라온 성현이 자전거를 대문 앞에 내려놓았다.

“자전거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려면 힘들겠다.”

“저 힘셉니다.”

이경은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성현에게 대답했다.

“언니한테 자전거 잘 배워서 좀 더 따뜻해지면 자전거 타러 가요.”

성현이 하경을 보며 말했다.

“네.”

하경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이경은 하경에게 잠깐 있으라고 말하고 성현을 따라 1층으로 향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팀장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하경이도 좋아하고, 저도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이경은 깍듯한 얼굴로 성현에게 인사를 했다.

“……서 전무랑은 이제 완전히 끝난 거지?”

성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재하가 스스로 계약을 끝냈으니 끝난 것이다. 이경은 끝났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싫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내가 했던 말 잊지 않았지? 서 전무 장난 끝나면 나한테 오라고. 망설여지는 이유가 나한테 미안해서라면 그럴 필요 없어.”

“팀장님, 저는…….”

성현에게 느꼈던 감정은 어느새 말끔하게 지워져 버렸다. 누가 지워 버린 건지, 언제 지워 버린 건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성현에게 품었던 여물지 못한 감정이 결국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꺾여 버렸다. 꽃을 피우지 못했으니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다.

“서 전무 오늘 선본다고, 회장님이 그러시더라. 잘됐으면 좋겠네.”

성현이 이경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아까 본 차가 서재하의 차는 아닌 모양이다. 선보느라 바쁠 텐데 여기 왔을 리가. 순식간에 기운이 빠져 버렸다.

성현이 멋쩍은 표정으로 이경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고는 차로 향했다. 성현이 떠나고 이경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망해라, 서재하. 이경은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선본 여자가 서재하 양아치인 거 알아차리고 도망갔으면 좋겠다. 또라이에 양아치인 거 꼭 알아차려야 할 텐데.

그래서 약혼도, 결혼도 못 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이경은 작은 현관을 넘어 거실까지 침범한 자전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전거를 산 것까지는 좋은데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언니, 자전거 어떡하지?”

하경도 난감한 얼굴로 자전거를 보았다.

“앞 베란다에 둬야지.”

둘 곳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었다. 정리가 좀 필요하긴 하겠지만.

이경과 하경은 오후 내내 자전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베란다 정리를 했다. 버릴 것이 꽤 많이 나와 자전거를 둘 공간은 마련이 되었다.

“자전거 들고 나가는 것도 일이겠다.”

“밖에다 둘 걸 그랬나?”

하경의 말에 이경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안 돼. 102호 할머니가 동네에 자전거 도둑 산다고 했어.”

“언니가 내려 줄게.”

“나도 이제 튼튼해. 내가 할 수 있어.”

하경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에 웃고 있는데 명치가 욱신거렸다. 아까부터 속이 좀 메슥거리더니 체한 모양이다. 이경은 명치를 문지르며 서랍에서 반짇고리를 찾았다.

“왜? 언니 체했어?”

“응.”

“내가 약 찾아볼게.”

하경이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하경이 주방에서 약을 찾는 사이 이경은 소파에 앉아 능숙한 솜씨로 손가락에 실을 감았다.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찌르려는데 재하가 손을 따 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양아치 주제에 고작 손 따는 거 가지고 손을 덜덜 떨던 재하가 생각나 이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어려운데 차이경은 왜 익숙해?’

어디선가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어려운데 왜 익숙하냐고 묻던 재하에게 그날 이경은 위로를 받았다. 손 따 줄 사람 없이 혼자 전전긍긍하며 지내 온 시간에 대한 위로.

‘체하면 와. 내가 따 줄게.’

재하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울렸다. 달려가고 싶어지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이경은 귓가에 들러붙은 재하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는 듯 바늘로 손가락을 푹 찔렀다. 따끔함을 넘어 욱신거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너무 세게 찌른 모양이다. 검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 바로 흘러내렸다.

“언니, 너무 세게 찌른 거 아니야?”

약을 가지고 오던 하경이 이경의 손에서 흐르는 피에 놀라 얼른 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경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며 티슈로 손가락을 꾹 눌렀다. 지혈을 하고 이경은 반대쪽 손가락도 바늘로 쿡 찔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찔러 붉은 핏방울이 볼록하게 맺혔다.

“고기 먹은 게 체했나?”

하경이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

이경이 약을 먹고는 컵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런가.”

괜찮았었는데. 처음 속이 울렁거린 건 재하가 오늘 선을 봤다는 성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고기 때문인지, 서재하 선본 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명치가 쿡쿡 쑤셔 왔다.

“언니, 좀 쉬어. 저녁은 내가 할게.”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언니 아프다고 저녁은 자기가 하겠다는 하경이 기특해 이경은 웃음이 났다.

“유튜브 보면서 하면 금방 해. 잘할 수 있어.”

“정말?”

“응. 언니 체했으니까 김치죽 끓여 줄게.”

“김치 꺼내야 돼. 언니가 김치만 꺼내 줄게.”

이경이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작은 김치 냉장고 위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어 이경은 그것들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하경아, 저 시리얼은 안 먹어?”

미국에서부터 하경이 애지중지 품에 품고 온 시리얼이 보여 이경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꽤 되었는데 아직 시리얼을 뜯지도 않았다.

“저거?”

“내일 아침에 먹어.”

이경이 김치통을 꺼내며 말했다.

“……저거 재하 아저씨 거야.”

하경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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