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경은 집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핸드폰에서는 신호음만 들려왔다.
전화 안 받을 건가 보다, 생각한 순간 신호음이 끊겼다.
1층으로 내려온 이경은 공동 현관을 나서며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전화를 받았지만 재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
핸드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보자 통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서 전무님?”
이경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재하를 불렀다.
그러면서 낡은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빌라에 사는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는 정자였다.
—왜?
한참 만에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받았으면 말을 해야지. 이경은 ‘서재하 양아치’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쁘십니까?”
—어.
퉁명스럽게 들려온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은 다시 감정이 치밀었다.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말해.
“하경이 수술 잘 끝났고, 미국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서 전무님 덕이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답니까?”
이어진 재하의 단답에 이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이네.
좀 뜸을 들이다 재하가 대답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비용은 꼭 갚겠습니다.”
—계산 끝난 일 가지고 질척거리지 마, 차이경.
재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도 서 전무님이랑 좀 논 것뿐이니 갚아야죠.”
—고집은.
“……근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지 못하고 이경이 말을 뱉어 냈다.
—뭐가?
“연락 한 번이 없으셨잖아요. 수술 잘 끝났냐, 잘 다녀왔냐, 그런 말 정도는 예의상, 도의적으로 물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차이경.
“네.”
—넌 내가 밉지도 않냐?
“네?”
—내가 너한테 그런 짓 해서 하경이 죽일 뻔했는데 안 미워?
뜻밖의 말에 이경은 할 말을 잃었다. 재하를 원망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하경이 쓰러진 직후에.
그에게도 그런 말을 했었던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끊자.
이경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재하가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까맣게 변해 버린 핸드폰을 들고 이경은 한동안 멍하니 정자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텅 빈 기분이었다.
***
재하의 시선이 낡은 정자에 앉아 있는 이경에게 향해 있었다. 차 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경의 모습에 재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왔더니 거짓말처럼 이경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울리는 핸드폰을 한참 쳐다만 보고 있는데 이경이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온 이경은 고맙게도 얼굴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주었다. 세워 놓은 차에서 이경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둔하긴.”
아마 차이경은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 생각도 못 할 것이다. 계속 보고 있었는데.
예의가 없다고 따져 대는 이경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뻔뻔한 개새끼가 되고 싶어진다. 어차피 차이경은 서재하 달갑지도 않을 텐데.
꼭 갚겠다는 말이 왜 이렇게 서운한지. 날 좋아했다면 갚겠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겠지. 그냥 받았을 거야.
“구질구질하게.”
이경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땅굴을 파고. 참 구질구질하다.
서재하도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차이경이 대단해 재하는 시트에 몸을 깊게 기댔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좋다.
“여전히 예쁘네, 차이경은.”
핸드폰을 들고 일어나는 이경을 눈으로 좇으며 재하가 중얼거렸다.
이경이 집으로 들어가고 재하는 차에서 내렸다. 불이 켜진 이경의 집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나 내일 선보는데. 네가 보지 말라고 하면 안 보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재하는 중얼거렸다.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들리지도 않을 것이고, 답을 얻지도 못할 의미 없는 말들.
미친놈, 여기 와서 진상이야. 재하는 자신에게 욕을 하며 이경의 집에서 돌아섰다.
운전석 문손잡이를 잡은 재하는 미련이 남은 얼굴로 다시 이경의 집을 돌아보았다.
“잘 자, 차이경.”
들리지 않을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셔츠에 외투를 걸친 재하가 뚱한 표정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러고 가냐?”
그때, 권명섭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명섭은 정원 가위를 들고 조팝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재하가 인상을 벅벅 쓰며 명섭에게 다가갔다.
“아, 거참. 다 늙어서 왜 가위를 들고 설쳐. 춘배 아저씨 있잖아. 정원 관리는 춘배 아저씨한테 맡기라고.”
“늙은이 취급 좀 그만해라.”
명섭이 가위를 들고 재하에게 삿대질을 했다.
“기운 펄펄한 거 알았으니까 가위 좀 내려놔. 무서워.”
“못난 놈.”
“조빱이는 왜 또 잘라 줘? 며칠 전에도 자르지 않았어?”
“조빱이 아니라 조팝이다, 이놈아.”
명섭이 다시 가위를 들고 재하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러다 손자 머리 자르겠네.”
재하가 명섭의 가위를 피하듯 뒤로 물러났다.
“근데 그 꼬라지로 가냐? 머리도 좀 단정히 하고. 넥타이도 좀 매고.”
명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재하를 살폈다. 꼴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끌끌 찼다.
“내 꼬라지가 뭐 어때서?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넥타이는.”
“예쁘게 보여야 할 거 아니야, 이놈아. 가뜩이나 너 미친놈인 거 동네방네 다 소문났는데 겉모습이라도 예뻐야지.”
“이 정도로 예뻤으면 됐지. 자 봐, 우리 권 회장님 닮아서 얼굴 번쩍번쩍 빛나는 거.”
재하가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명섭에게 보여 주었다.
다 큰 손자의 애교에 명섭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섭은 재하 때문에 살았다.
“잘해, 이 녀석아. 너한테 겁먹고 도망가지 않도록. 장가는 가야 할 거 아니야?”
“안 가고 영감님이랑 그냥 살면 되지, 뭐. 요즘은 너도 나도 결혼 안 해.”
“너 같은 놈은 똑 부러진 여자가 휘어잡고 살아야 사람 돼. 차 변호사 같은 여자면 딱 좋겠는데.”
“영감님은 차 변호사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명섭의 말에 재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똑 부러지고, 차분하고. 그만한 아가씨 없지.”
“내가 차이경이랑 잘해 보려고 했는데…….”
굴러다니는 돌을 툭 차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었다.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에게 내가 그 여자를 참 많이 좋아했었다고. 지금도 여전히 좋다고.
“했는데?”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명섭이 되물었다.
“내가 망쳤어. 내가 다 망쳤어.”
“에라, 이놈아. 그러면 그렇지. 잘 좀 하지.”
명섭이 재하의 등을 후려쳤다.
명섭에게 얻어맞은 재하는 등이 따가워 몸이 꼬였다. 우리 영감님 정정한 건 확실히 알겠다.
“우리 영감님 100년은 살겠네.”
등을 문지르며 재하가 말했다.
“아휴, 아깝다. 아까워.”
명섭은 가위로 조팝나무 가지를 싹둑 자르며 혀를 찼다.
“어쨌든 갔다 올게. 조빱이랑 잘 놀고 있어.”
“조팝이다, 이놈의 시키야!”
명섭이 버럭 화를 냈다. 이번에는 가위를 집어 던질 것 같아 재하가 빠른 걸음으로 대문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재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상대 여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재하가 멋쩍은 얼굴로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평범한 인상의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저도 막 왔어요.”
여자는 살면서 화 한 번 안 내 봤을 것 같은 온화한 모습이었다.
“앉으세요.”
재하가 의자를 가리켰다. 제법 멀쩡한 남자인 척하고는 있지만 재하는 어쩐지 좀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오수영이에요.”
“서재하입니다.”
재하는 수영처럼 예의를 차려 제 소개를 했다. 이미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 살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서로 다 꿰고 있지만 예의를 차렸다.
넥타이도 안 했는데 목이 조이는 기분이라 재하는 셔츠 깃을 매만졌다.
수영은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들었다. 재하도 수영을 따라 메뉴판을 보았다.
음식을 시키고 나자 룸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재하는 수영을 힐끔 보며 물을 마셨다. 남자니까 대화를 주도해야겠지.
“지금 하시는 일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재하가 물었다.
재하의 물음에 수영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답을 했다. 그 이후로 줄곧 재미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수영은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닌 듯했다. 묻는 말에만 참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재하는 대화를 이어 나가도록 애를 썼다. 하지만 종종 룸 안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재하는 이 식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식사를 마치고 재하와 수영이 밖으로 나왔다.
“그럼 들어가세요.”
수영은 끝까지 참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후.”
숨 막혀 뒤질 뻔했네, 중얼거린 재하가 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에 타자마자 단추 하나를 더 풀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착하고 참한 여자인 건 알겠는데 너무 재미가 없다.
차이경 따박따박 말대답하던 모습만 생각나고, 그만큼 이경이 더 그리워졌다.
시트에 앉아 잠시 고민하던 재하는 결국 이경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 앞에 대기하고 있으면 차이경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경의 집 앞에 도착한 재하는 차를 세워 놓고 공동 현관문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경이 금방이라도 나올까 봐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꼼짝없이 공동 현관만 바라보고 있는데 SUV 차량이 재하의 시야를 가렸다.
“안 보이잖아, 씨…….”
욕을 하려던 재하는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며 인상을 썼다.
성현이 먼저 운전석에서 내리고, 뒤이어 이경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뒷좌석에서는 하경이 내렸고.
성현은 트렁크를 열어 자전거를 꺼냈다. 하경이 웃으며 자전거 핸들을 잡고 흔들었다. 하경의 자전거인가 보다.
“괜히 왔네.”
재하의 입가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치미는 질투와 씁쓸한 패배감이 가슴에 빼곡하게 자리했다. 하경이 건강해지면 자전거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그걸 성현이 대신하기로 한 모양이다.
“좋겠다, 윤성현은.”
중얼거린 재하가 거칠게 차를 몰고 빌라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