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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63화 (63/83)

63화

“짐 다 챙겼지? 빠트린 거 없이?”

이경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하경을 보며 물었다.

석 달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 하경은 힘든 수술 과정과 회복 과정을 잘 버텨 주었다.

수술도 잘됐고, 회복도 빨랐다. 이경은 잘 참고 버텨 준 하경에게 고마웠다.

“다 챙겼어.”

“잘했어.”

이경이 하경의 옆에 앉았다.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한국 가면 뭐가 제일 먼저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거 많지. 달리기도 하고 싶고, 놀이공원도 가고 싶어. 귀신의 집에 꼭 가 볼 거야.”

하경은 재잘재잘 떠들었다.

귀신의 집이라는 말에 이경이 재하를 떠올렸다. 귀신의 집이냐고 묻던 재하의 얼굴이 생각나 이경은 피식 웃음이 났다.

“자전거도 타고 싶어. 자전거 타는 거 재하 아저씨가…….”

말을 하던 하경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금기와 같은 이름이었다. 수술을 받겠다고 한 이후로 이경과 하경은 재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 전무님이 가르쳐 주신댔어?”

이경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응.”

하경이 이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는 언니가 가르쳐 줄게. 한국 가면 자전거부터 사자.”

“응.”

하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어서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드디어 한국 가는구나. 효진이가 빨리 오래. 같이 콘서트 가기로 했어.”

“신났네.”

이경이 하경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언니, 우리 이제 행복하게 살자.”

하경이 이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안 좋은 기억들 다 잊고 언니랑 매일 즐겁게 살자.”

이경은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응, 언니.”

하경은 이경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이경은 재하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

재하가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남지 않은 노란 액체가 한쪽으로 쏠렸다. 이경에게로 쏠린 자신의 마음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서 전무님.”

옆에 앉은 성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하를 불렀다.

불러다 놓고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재하는 남아 있는 술을 모두 입 안에 털어 넣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차이경, 내일이면 와.”

“압니다.”

성현이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차이경을 향한 윤성현의 솔직한 마음이 뭐야?”

재하가 술병을 쥐며 물었다.

“차 변호사 많이 아낍니다.”

성현이 재하에게서 술병을 가져와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랐다.

“후배 변호사로서? 아니면 여자로서?”

“둘 다요.”

“그래.”

성현이 채워 준 술잔을 재하가 단숨에 비웠다.

“그럼 계속 아껴 줘. 난 빠질 테니까.”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다른 개 같은 놈보다야 윤성현이 훨씬 나으니까.

“장난 끝나셨습니까?”

성현이 감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성현의 말에 재하의 얼굴이 굳었다. 재하가 바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는 성현을 보았다.

“차이경한테 장난이었던 적 없어.”

언제나 진심이었다. 차이경에게만큼은 늘.

“…….”

“윤성현 변호사도 진지하게 대해. 차이경 힘들게 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 할아버지 사람이고 뭐고 가만 안 둬.”

“그 부분은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현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차이경 놓아준 걸 후회 안 하지. 재하는 빈 술잔을 우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한국으로 돌아온 이경과 하경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경은 다시 로펌으로 출근을 했고, 하경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본다고 의욕에 차 있었다.

다시 로펌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이경은 WR 그룹 전담 팀에서는 빠지고 건설 팀에 완전히 합류했다. 서재하 전담 변호사는 박기훈 변호사로 교체되었다.

“잠잠한가 보더라고.”

지혜가 재하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서재하가 착실하게 회사만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주며 지혜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도 함께 알려 주었다.

“결혼하려고 이미지 관리하나?”

“결혼이요?”

지혜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이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 없는 사이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한다더니 정말 결혼하려는 건가.

“오진수 대법관이 우리 아빠랑 친하거든. 그 집 WR이랑 사돈 맺는다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더래.”

“서재하 전무님이…….”

수준 맞는 여자랑 약혼하고 결혼하겠다더니 정말 잘 골랐네. 이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가 오늘따라 굉장히 쓰게 느껴졌다.

“그 집 딸이 참 참하거든. 노는 거 좋아하는 남자들은 참 희한하게 그렇게 참한 여자랑 결혼하더라. 지들은 놀 거 다 놀고.”

지혜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차이경이랑 원 없이 놀았어. 후회 안 남을 정도로 잘 놀았지.’

재하에게 들었던 말이 귓가에서 울렸다. 그 얄미운 목소리가 맴돌아 머그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반기에는 전자 쪽으로 들어가고, 그쯤 결혼도 하지 않을까? 권 회장님 후계 구도 잡는 모양이던데.”

“서 전무님 잘 살고 계셨네요.”

자기 할 일 잘 하면서 잘만 살고 있었네. 양아치, 또라이 서재하. 이경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커피를 마셨다.

“근데 그쪽 분위기 요즘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지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WR이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이경이 물었다.

“서 부회장, 서 전무 찍어 내고 싶어 한다는 얘기가 들려. 권력이랑 돈 앞에서는 부모 자식 사이도 소용없나 봐. 아버지가 아들을.”

지혜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혜의 말에 이경은 재하의 사무실에서 보았던 서류들을 생각했다. 아마 재하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일어나자. 나 회의 들어가야 돼.”

“네.”

그 말에 이경도 얼른 지혜를 따라 일어났다.

지혜와 헤어져 사무실로 들어온 이경은 머릿속에 따라붙는 재하를 애써 털어 버리고 일에 집중했다.

저녁 6시쯤, 삼각 김밥으로 저녁을 대충 때우려는데 성현이 호출을 했다. 건설 쪽 업무인가 싶어 가 보니 성현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네.”

잠시 망설이다 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재킷을 챙겨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이경이 성현의 뒤를 따라갔다.

성현이 데리고 온 곳은 정갈한 분위기의 한정식집이었다. 분위기답게 나오는 음식들도 하나같이 깔끔하고 정갈해 꼭 성현을 보는 것 같았다.

“한국 음식 많이 그리웠을 것 같아서.”

“한국 음식 자주 먹었어요. 미국에도 다 있던데요?”

이경이 국을 떠먹으며 말했다.

“그랬어?”

“네.”

“얼굴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성현이 이경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내가 뭘 했다고.”

“많이 해 주셨죠.”

“……언제 차 변호사 동생이랑 같이 밥 먹게 자리 좀 만들어. 수술받느라 고생했으니까 밥 한 끼 사 주고 싶어.”

성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차 변호사가 거절하면 난 좀 속상할 것 같은데.”

여전히 조심스럽게 성현이 말했다.

이경은 가만히 성현을 보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한테 얘기해 보겠습니다.”

“응.”

성현은 부드럽게 웃고는 반찬을 집어 먹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식사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어색한 공기에 불편해진 이경이 예준이는 잘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성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동생은 이제 뭐 하고 싶대? 건강해져서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요즘은 복학하기 전까지 아르바이트한다고 의욕이 넘쳐요. 좀 더 쉬고 학교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편한 자리 좀 알아볼까?”

“또래 친구들이 하는 알바를 하고 싶은가 봐요. 카페나 패스트푸드점 같은.”

“다른 건?”

“자전거를 배우고 싶대요. 그래서 주말에 자전거 사러 가기로 했어요.”

말을 하는 이경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재하가 자전거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던 하경의 말이 가슴에 콱 박혀 쿡쿡 아프게 찔러 댔다.

하경까지 그렇게 챙기던 사람이 한순간에 미련 한 톨 남지 않은 얼굴로 가 버렸다. 차이경이랑 놀 거 다 놀았으니 이제 제 삶 살겠다고 떠났다.

여전히 어이없고, 여전히 기가 막힌다.

“같이 가. 내가 봐 줄게.”

“괜찮아요. 바쁘시잖아요.”

이경이 성현의 말에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성현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금방 표정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차 변호사가 자꾸만 속상하게 만드네.”

“…….”

“나한테 올 생각은 아직 없어?”

성현이 컵을 매만지며 물었다.

조바심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이경은 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 천천히 하자. 천천히 가.”

성현은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럼 자전거 봐 주실래요? 사실 잘 몰라서요.”

씁쓸한 성현의 얼굴에 미안해진 이경이 입을 열었다.

“그럴게.”

그제야 성현의 얼굴에 내려앉은 그늘이 사라졌다. 이경은 성현에게 더 많이 미안해졌다.

***

“나 다음 주부터 알바 하기로 했어. 사거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던 이경은 하경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 하경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복학하기 전까지 쉬라니까.”

“용돈 정도는 내가 벌고 싶어. 그리고 나 알바 해 보고 싶었단 말이야.”

하경이 조르듯 말했다.

“힘들면 바로 그만둬.”

“알았어.”

대답을 하던 하경은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친구 효진에게서 온 전화에 키득 웃고는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경이 방으로 들어가고 이경은 다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재하는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그게 서운해 이경은 틈만 나면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하경이 수술 잘 끝났냐고 한 번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미국에서도 연락 한 번이 없었다. 박 실장님을 통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직접 잘 끝났냐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우리 사이에 예의는 무슨.”

그러다 이경은 차이경과 서재하 사이에 예의를 차리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몇 번 놀다가 버리고, 버려진 사이 아니던가.

치미는 감정이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재하가 집안 좋은 여자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어 더 그랬다. 나더러 속물이라더니.

왈칵 짜증이 난 이경은 결국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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