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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62화 (62/83)

62화

재하의 시선은 줄곧 이경의 사무실 영상에 향해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이경은 참 열심히도 일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니, 넌.”

재하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경이 울며 매달릴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재하는 속이 상하다 못해 쓰렸다.

늘 나만 애태우고, 나만 전전긍긍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이경을 끊어 내고 재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난 벌써부터 미치겠는데.”

까딱하다 하경을 죽일 뻔했다. 차이경 가지겠다고 들이민 계약이 하경을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 버렸다.

그래서 더는 이경의 곁에 있을 수가 없다. 하경이 알아 버렸으니 옆에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족 목숨을 두고 거래한 개새끼가 뻔뻔하게 어딜 붙어 있어. 그 정도의 뻔뻔함은 없어 이경의 마음 편하라고 못된 놈 자처하고 보내 줬다. 근데 왜 이렇게 죽을 것 같은지.

재하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차이경.”

재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경을 불러 보았다. 마이크 기능을 꺼 놓아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이경이 한 번만 여길 봐 줬으면 좋겠다.

그러다 이경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어 카메라를 보았다. 화면 너머 이경과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카메라를 쳐다보는 이경의 모습에 재하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재하는 이경이 여길 봐 줘서 좋았다.

“이경아.”

한숨처럼 이경의 이름을 부르고 재하는 한참 동안 화면 속의 이경을 바라보았다.

***

짐을 싸던 이경의 손이 멈추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재하의 목도리가 시선에 걸렸기 때문이다.

재하가 둘러 준 목도리를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 재하의 냄새가 스민 목도리를 이경이 만지작거렸다.

회사에서는 재하를 볼 수가 없었다. 바쁜 건지 일부러 피하는 건지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았다.

가끔은 너무 억울해 이경은 일하다 말고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으면 재하가 “차이경.” 하고 부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재하는 한 번도 이경을 부르지 않았다. 심심하면 사무실을 찾아오더니 발걸음을 딱 끊어 버렸다.

정말 서재하는 차이경이랑 놀 거 다 놀았나 보다.

“나쁜 새끼.”

버림받은 기분. 그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재하가 미워 애꿎은 목도리를 주먹으로 쾅 때렸다.

결국 이렇게 하찮게 쓰고 버릴 거, 내 인생은 왜 그렇게 흔들어 댔는지. 불쑥 원망이 솟아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은 기분이다.

이경은 핸드폰을 노려보다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젠 전화도 피하는 건가, 생각할 때쯤 재하가 전화를 받았다.

—응.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서 전무님.”

—응, 이경아.

하찮게 쓰고 버려 놓고 퍽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내일 출국합니다.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따지려고 걸었던 전화지만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다정한 재하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나 보다.

핸드폰 너머 재하는 말이 없다. 끊어졌나 싶어 이경이 재하를 불렀다.

“서 전무님.”

—필요한 거 있으면 박 실장한테 언제든지 말하고. 하경이랑 잘 다녀와.

길게 말이 이어지자 재하의 발음이 뭉그러졌다. 술을 마신 모양이다.

“술 드셨습니까?”

—응.

“어디십니까?”

—아직도 내 뒤치다꺼리가 하고 싶어? 그렇게 당해 놓고?

웃음을 흘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짐을 싸는데 갑자기 억울해졌습니다. 서 전무님이 절 결국은 이렇게 하찮게 쓰고 버리셔서 원망스럽습니다.”

이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말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나왔다. 서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서 전무님한테 놀아난 것 같아 제가 너무 한심합니다.”

—칭얼거리니까 귀엽네, 차이경.

재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없는 동안 약혼도 하시고 결혼도 하십시오. 미리 축하드립니다.”

귀엽다는 재하의 말에 왈칵 감정이 난 이경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재롱부리지 마. 보고 싶어지니까.

한숨 섞인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이 굳어졌다.

도대체 서재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놀 거 다 놀았다면서.

“어쨌든 감사합니다. 하경이 수술받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받을 일 아니고. ……잘 다녀와.

“네.”

이경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재하를 향한 감정이 좀처럼 추슬러지지 않았다. 머리와 마음이 서재하로 가득 차 있다.

이 마음이 미움인지 원망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이경 본인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경은 하경과 미국으로 떠났다. 3개월의 시간 동안 재하를 향한 마음이 조금은 옅어지길 바라며. 그게 미움이든 그리움이든.

***

“재하, 상반기까지만 산업에 있고 하반기부터는 전자 쪽으로 들어가. 슬슬 전자 업무 익혀야지.”

설날, 주요 임원들과 떡국을 먹는 자리였다. 권명섭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모두 수저 든 손을 멈추었다.

명섭의 그 말은 재하를 후계자로 정하고 후계 구도를 다지겠다는 뜻이었다.

“회장님, 재하 아직 산업 쪽 업무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습니다. 겨우 2년 있었던걸요. 전자는 아직 이릅니다.”

서석호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는 얼굴에 드러난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서주환도 전자에서 일하는데 뭐가 이릅니까? 내가 쟤보다 나이가 쬐금 더 많은데?”

재하가 턱짓으로 석호의 옆에 앉아 있는 주환을 가리키며 껄렁한 말투로 말했다.

주환은 자리가 불편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주환이는 비서실 근무고. 너랑 비교가 돼?”

“서 부회장님이 서주환 옆에 끼고 일 가르친다는 얘기가 파다한데 무슨.”

재하가 석호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경영 기획 팀 실장, 직함은 상무.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명섭이 긴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임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말의 내용은 의견을 묻는 것이었지만 말투는 통보에 가까웠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서 전무, 일하는 거 시원시원해서 가시적인 성과도 내고 전자 쪽 가서도 일 잘할 겁니다.”

WR 산업 대표가 재빨리 명섭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 이 대표님은 제가 얼른 갔으면 하나 봅니다.”

“나야 우리 서 전무 전자에 뺏기는 것 같아 아쉽지.”

재하의 농담에 이 대표가 웃으며 대꾸했다.

두 사람의 말에 다들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석호와 몇몇 석호 쪽 라인 임원들만 제대로 웃지를 못했다.

재하의 눈이 빠르게 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주환과 눈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고 있는 주환의 얼굴에는 아무 욕심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재하는 주환의 얼굴을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의 피를 이어받고 태어난 놈이 제 표정 하나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서 부회장, 그렇게 알고 준비 착실하게 해 놔. 아들 맞을 준비해야지.”

명섭은 석호를 보며 말했다.

“네, 회장님.”

석호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식사가 끝나고 다과를 들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재하는 지루해 연꽃이 띄워진 다기를 바라보았다. 하얀 연꽃이 꼭 차이경 같다.

이경이 미국으로 떠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사이 하경은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회복 중에 있었다.

매일 박 실장을 통해 이경과 하경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지만 재하는 갈증이 났다. 이경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다.

지루한 시간 내내 재하는 이경을 생각했다. 이경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해졌다.

다과 시간이 끝나고 재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임원들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강 대표가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 전무, 술 좀 해야지.”

“권 회장님이 아저씨 술 좀 줄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우리 영감님한테 일러요.”

재하가 강 대표에게 잔소리를 했다.

강 사장은 WR 조선 대표로 권 회장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재하도 강 대표하고는 꽤 편한 사이였다.

“마! 아저씨 혼나라고.”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간에 구멍 뚫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사모님 걱정시키지 말아야죠.”

“알았다. 알았어.”

“나이 생각해요, 아저씨.”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장가나 가, 녀석아.”

강 대표가 재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서재하 개차반이라고 소문나서 아무도 딸 안 줘.”

“우리 딸 줄까?”

“걜 언제 키워서 장가를 가.”

재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얼굴로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겨우 수능 본 핏덩이를.

“오진수 대법관 딸은?”

“본론이네. 대법관씩이나 돼서 서재하한테 딸을 주겠다고? 우리나라 사법부가 걱정되네”

“사법부 걱정은 말고. 자리 어렵게 만들었어. 회장님도 좋아하시니까 한번 만나 봐.”

“봐서요. 안 바쁘면. 어서 들어가기나 해요.”

재하가 강 대표를 억지로 밀어 넣듯 차에 태웠다.

“약속 잡으면 연락한다. 도망갈 생각 말고.”

“들어가세요, 아저씨.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재하가 강 대표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동차 문을 닫았다.

재하는 멀어지는 강 대표의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주환과 마주쳤다. 주환은 재하를 보며 빙긋 웃었다.

“형, 전자로 들어오면 이제 형 자주 보겠다.”

“자주 봐서 뭐 좋을 사이라고.”

재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회사에서 같이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시자.”

“너랑 그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욕해. 서재하 저 밸도 없는 새끼, 엄마 자리 뺏은 여자 아들이랑 친하게 지낸다고.”

“형, 오늘도 세다.”

주환은 심장께를 문지르며 실없는 얼굴로 웃었다.

저렇게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을 때면 재하는 또다시 주환의 코뼈를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저 웃는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실실 쪼개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재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난 형 거 안 뺏어.”

주환의 말에 재하가 주환을 빤히 보았다.

“이미 뺏었는데?”

재하가 삐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아. 아버지는 빼앗았으니까 다른 건 안 뺏는다고.”

“다른 것까지 욕심을 내면 사람이 아니지.”

재하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주환을 지나쳐 별채로 향했다.

“늘 미안해, 형한테는.”

등 뒤에서 주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는 말이 재하는 참 지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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