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조용히 이경의 맞은편에 앉은 재하가 턱을 괴고 이경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경이 스르르 눈을 떴다.
“서 전무님.”
움찔한 이경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얼굴을 정돈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하가 픽 웃었다. 차이경은 나 괴롭히려고 매일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나 보다.
“왜? 침이라도 흘렸을까 봐?”
“아닙니다.”
이경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하경이는?”
“잠들었습니다.”
“맘 좀 놓이겠다.”
재하가 복잡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며 말했다.
“네.”
작게 웃으며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갈게.”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이 재하를 따라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 바쁘십니까?”
“아니.”
“그럼 하경이 곁에 잠깐만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집에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서요.”
“알았어. 내가 있을게. 갔다 와.”
재하는 흔쾌히 대답했다.
하경이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잠들어 있으니 옆을 지키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운전기사 있어. 그 차 타고 갔다 와.”
재하는 핸드폰을 꺼내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경은 재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아 준 것이 고마워 재하는 이경에게 미소를 보였다.
이경과 함께 재하는 하경의 병실로 들어갔다. 하경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잠든 하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코트를 입은 이경이 곁으로 다가섰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밖에 추워.”
재하가 허전한 이경의 목을 보며 말했다.
“차 타고 가는데요, 뭘.”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하는 이경을 보다 재하가 목에 걸친 목도리를 빼 이경에게 둘러 주었다.
“따뜻하게 다녀.”
“감사합니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응.”
재하가 이경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이 떠나고 병실이 고요에 잠겼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하경을 바라보는 재하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연애니 뭐니 나불거리지 말고 하경이 수술받게 해 줄걸. 그딴 계약 하지 말걸. 켜켜이 쌓인 후회를 곱씹고 있는데,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하경의 목소리에 재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긴장한 얼굴로 하경에게 고개를 돌리자, 원망하는 눈초리와 눈이 마주쳤다.
“응.”
재하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는요?”
“집에.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재하는 하경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하경과 눈을 마주하고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곧 쏟아질 원망이 벌써부터 두려웠다.
하지만 하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도 섞기 싫은 건가. 힐끔 재하가 하경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하경은 물끄러미 재하를 바라보았다. 재하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방황하던 시선이 결국은 무릎으로 향했다.
“아저씨.”
한참 만에 하경이 재하를 불렀다.
“응.”
재하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경을 보았다.
“우리 언니한테 왜 그랬어요?”
눈물이 고인 하경이 재하를 바라보았다.
재하는 하경의 그 표정에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순리를 거스르고 이경을 짓밟아 버렸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아저씨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미안해.”
“날 약점 잡아서 우리 언니 괴롭힌 아저씨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미안해.”
재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붉어진 눈가에는 슬픔과 후회가 담겼다.
“우리 언니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어요?”
“……좋아서. 이경이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서,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러면 차이경이라는 여자를 완전히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했어요?”
하경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멍청한 놈이라서 그래. 너무 멍청한 놈이라.”
재하는 거친 동작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 언니 팔아서 건강해지고 싶지 않아요.”
“…….”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는 하경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재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예전에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엄마랑 아빠랑 차 타고 가다가. 근데 그거 그냥 교통사고 아니에요. 우리 집에 빚이 많이 생겨서 엄마랑 아빠가 나 데리고 죽으려고……. 나는 언니한테 짐밖에 안 되니까 엄마랑 아빠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하경아.”
“아저씨, 제가 제일 속상한 건요. 엄마랑 아빠 말이 맞다는 거예요. 결국은 언니한테 짐밖에 안 됐어요.”
“너랑 이경이 잘못 아니야. 내가 개새끼라서 그래. 내가 나쁜 놈이라……. 수술받자. 사과의 뜻이고, 네가 수술받아야 나랑 이경이 관계 완전히 끝나.”
“…….”
“주고받는 관계야. 받았으면 줘야지. ……언니 속상하게 하지 말고 수술받아. 수술받고 나면 이경이랑 네 인생에서 완전히 빠져 줄게.”
그게 순리라면 그렇게 해야지. 그게 차이경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해 줘야지.
재하는 병실에서 성현의 품에 안겨 있던 이경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며칠 고집을 부리던 하경이 결국은 수술을 받겠다며 고집을 꺾었다. 그 덕에 원래 일정에 맞춰 수술할 수 있게 되었다.
안심한 이경은 휴가 조정을 위해 출근하자마자 재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재하는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넥타이는 어깨에 걸쳐 놓고, 펜은 입에 문 채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성실해 보여 이경은 작게 웃음 지었다.
“뭐야, 차이경이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네, 접니다.”
“용건.”
재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하경이가 수술받겠다고 해서 원래 예정대로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잘됐네.”
재하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휴가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석 달.”
재하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차이경 휴가 석 달. 하경이랑 같이 나갔다가 같이 들어와. 로펌 쪽에는 미국 출장 보낸 거로 할 거니까.”
“아닙니다. 한 달이면 됩니다.”
석 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경이 수술하고 무사히 깨어나는 모습 보는 거로 족했다.
“석 달 다녀와. 다녀와서는 여기로 출근할 필요 없고.”
모니터에 향해 있던 재하의 시선이 다시 이경에게로 돌아갔다.
“그럼…….”
재하의 말에 이경이 말끝을 흐렸다.
“파견 근무 끝이라고.”
“네에.”
“아쉬워 보이네?”
재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니 한 달만 다녀오겠습니다. 남은 두 달은 WR에서 일하겠습니다.”
“네가 없어야 내가 편해서 그래.”
“제가 없어야 편하십니까?”
의아한 듯 이경이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응. 널 정리해야 내가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지.”
“…….”
무심한 투로 꺼내 놓은 재하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이경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못 알아듣겠어? 이제 그만 놀자고, 차이경.”
“서 전무님?”
언뜻 차가워 보이는 재하의 얼굴이 낯설어 이경이 그를 불렀다.
“우리 볼 장 다 봤잖아. 즐겁게 놀았으니 이제 또 열심히 살아야지, 안 그래?”
여전히 낯선 얼굴로 재하가 말을 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
“계약 끝내자고. 진한 연애 끝. 차이경이랑 잘 놀았으니 이제 적당히 수준 맞는 여자랑 약혼하고, 결혼해야지.”
재하의 말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약을 끝내자는 말도, 수준 맞는 여자랑 결혼하겠다는 말도 모두 상처였다.
그 말들이 이렇게 상처를 낼 줄은 몰랐지만 이경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났다.
“차이경 가지고 놀 만큼 놀았고, 이제 더 볼 것도 없고. 윤성현한테 가. 둘이 잘 어울려.”
나른한 말투,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지금 재하의 모든 것이 이경에게 상처가 되었다.
“이제 와서 가란 말씀이세요?”
말을 내뱉는 이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의 감정을 명확하게 인지도 못 한 채 이경이 말을 내뱉었다.
“응.”
“서 전무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제는 이해했어?”
“아니요. 늘 이해가 안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를 이해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서재하가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지 이경은 알고 싶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목도리를 둘러 주던 사람이었다. 사랑받고 싶다고, 좋아해 달라고 애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난 언제나 개새끼야. 그러니까 이해하려고 들지 마. 네 골만 아파.”
“서 전무님 사람 하고 싶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하찮게 쓰지 마시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말아 쥔 이경의 주먹이 떨렸다.
“내가 고작 너 같은 걸 내 사람으로 두겠어? 몇 번 자고 치울 여자면 몰라도.”
“하.”
이경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난 차이경이랑 원 없이 놀았어. 후회 안 남을 정도로 잘 놀았지.”
“결국은 하찮게 쓰고 이렇게 버리시네요.”
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경의 감정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이경은 다양한 감정의 늪으로 떠밀렸다.
“너랑 논 값은 제대로 갚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경이랑 미국이나 잘 다녀와.”
“고작 저 같은 거랑 논 값치고는 과하시네요.”
“내가 돈 신경 쓰면서 놀 것 같아?”
재하는 한쪽 입가를 삐딱하게 올렸다.
이경은 재하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꾸벅 인사를 했다.
“덕분에 저도 잘 놀았습니다.”
그런 후, 그대로 재하에게서 돌아섰다. 짓밟힌 자존심, 그렇게라도 세우고 싶었다. 걷는 걸음마다 애써 세운 자존심은 무너져 내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