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유설의 등장에 이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설은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침대에 올려놓으며 이경을 보았다.
“동생 일은 유감이에요.”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경은 유설의 진짜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그이 다녀갔어요?”
무표정하던 유설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이경은 힐끔 하경을 돌아보았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하경의 앞에서 유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휴게실로 가시죠.”
이경은 유설이 사 온 과일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병실을 나와 휴게실로 들어간 이경은 테이블 옆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로 따라 들어온 유설은 바닥에 놓인 과일 바구니에 시선을 한 번 주고는 이경을 보았다.
“그이한테 얘기 들었으면 대충 알겠네요. 그이가 사과하라고 해서 왔어요. 나 생각보다 그이 말 잘 듣거든요.”
“왜 그러셨습니까?”
이경이 차가운 눈으로 유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경의 앞에서 그 말을 떠든 건 세연이었지만 세연에게 얘기를 전한 건 유설이었다는 걸 이경은 알아차렸다.
“그이가 차 변호사를 좋아하니까.”
“…….”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 얼굴로 말을 하는 유설 때문에 이경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차 변호사 때문에 날 상처 줘서 나도 차 변호사 상처 주고 싶었어요. 유치한 애정 싸움에 차 변호사 동생만 다쳤네. 유감이에요.”
유설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경은 유설의 말도, 미소도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유설의 뺨을 쳤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때렸다.
유설은 이경이 때린 뺨에 손을 대고 이경을 쳐다보았다.
“제 동생 목숨 가지고 장난친 값입니다.”
이경이 유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꽤 매섭네요.”
“유감입니다.”
이경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하경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유설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고작 질투 때문에 하경을 망가트린 유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유설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살면서 누구한테 맞아 본 적 없는데 차 변호사한테 맞았네요? 이러면 내가 차 변호사를 더 미워할 텐데.”
“전 제 동생 건드리면 그게 누구라도 안 참습니다. 다시는 제 동생 건드리지 마세요.”
이경이 유설을 똑바로 보며 경고했다.
“명령받은 적도 없는데. 차 변호사, 오늘 나한테 선 많이 넘는다.”
“선은 김 작가님이 먼저 넘으셨습니다.”
“나는 그게 허락되는 사람이고.”
“…….”
“근데 과연 차이경 변호사도 그게 허락되는 사람일까?”
유설이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높게 치켜든 유설의 손이 움직이고, 이경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전해져야 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 작가도 그게 허락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 감은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재하가 유설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서 전무님?”
유설이 한쪽 입술을 올렸다.
“뻔뻔함이 도를 넘잖아.”
재하가 피식 웃으며 잡은 유설의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유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병원에서 소란 떨지 말고 가시죠, 김 작가님. 나가는 문은 저쪽.”
재하가 휴게실 문을 가리키며 껄렁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유설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한테 차이경 변호사 단순한 장난감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건 김 작가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재하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유설은 이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생 빨리 쾌차하길 바랄게요.”
그 말을 남기고 유설은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유설이 떠나고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걱정스레 얼굴을 살피는 것이 느껴져 이경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차이경 고소당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 차이경 손 맵잖아. 내가 맞아 봐서 알아.”
재하의 말에 이경이 입가를 올렸다. 서재하 뺨을 때린 적도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떠오른 기억에 이경은 멋쩍어졌다.
“차이경, 윤 변이랑 놀려면 힘들겠다. 김 작가 견뎌 내려면. 오늘처럼 먼저 치고, 맞지는 마.”
재하가 휴게실을 빠져나가며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재하의 말에 이경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쫓아가며 되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꼭 팀장님한테 가라는 소리처럼 들려 이경은 기분이 이상했다.
“맞고 다니지 말라고. 속상하니까.”
휴게실을 빠져나간 재하가 뒤를 돌아보며 이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맞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이경이 대답했다.
“그래, 잘했어.”
재하는 이경의 입술을 엄지로 한 번 쓰다듬고는 몸을 돌려 하경의 병실로 향했다.
이경은 재하의 손이 닿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가슴을 누르던 감정들이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
하경이 깨어났다. 딱 열흘 만이었다.
애를 태우던 이경은 하경이 깨어나 안심했다. 깨어난 하경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언니, 그만 울어.”
하경이 말했다. 작은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없었다.
그 힘없는 목소리가 애처로워 이경은 하경을 안아 주었다.
“언니가 미안해, 하경아. 언니가 정말 미안해.”
“언니가 왜? 내가 미안하지.”
하경이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경아, 언니한테 너 짐 아니야.”
이경은 하경에게서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하경의 손을 꼭 잡고 이경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언니는 한 번도 너를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넌, 언니가 살아가는 이유고 목적이야. 언니는 너 없으면 살 이유가 없어.”
“언니.”
하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경아, 엄마랑 아빠 말은 잊어. 그 사고도 잊어. 두 분 다 그때 제정신 아니라서 그런 선택 하신 거야. 너한테 한 말도 진심 아니야.”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미안해.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해서.”
“그런 말 하지 마. 언니 속상해.”
이경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경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 사고 이후로 어떻게 견뎠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동생의 애처로운 모습에 이경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언니, 미안해.”
“네가 살아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경아, 언니 세상에 혼자 두고 가지 않아 줘서 고마워.”
이경이 하경에게 진심을 전했다. 하경이 살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세상에 덜렁 혼자 남겨지지 않게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언니, 나는 이기적이야. 그래서 사고 얘기도 안 한 거야. 언니가 나를 정말 짐으로 생각할까 봐. 날 버릴까 봐.”
“언니가 널 왜 버려?”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듯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언니, 매일 힘들게 야근하는 거 보고도 애써 아닌 척했어. 나 언니한테 짐 아니라고, 심장만 나으면 그림 열심히 그려서 언니 호강시켜 줄 거라고.”
“…….”
“재하 아저씨 약혼녀라는 언니가 한 말 듣고 이제는 아닌 척할 수도 없구나, 깨달았어. 나를 위해서 언니가 그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어.”
하경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경은 떨리는 손으로 하경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난 언니랑 재하 아저씨랑 서로 좋아하는 줄만 알았어. 서로 좋아해서 나 수술받을 수 있게 도와준 건 줄 알았어.”
“싫은데 억지로 한 일 아니야. 언니도 서 전무님 싫지 않았어.”
이경은 하경이 괴로워하지 않도록 재빨리 말했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지금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경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면 그런 일 안 했겠지. 할 필요가 없었겠지.”
“하경아.”
“나 미국 안 갈 거야. 수술 안 받을래. 여기서 심장 이식 기다릴래.”
“좋은 기회야, 하경아. 놓치면 안 돼.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경은 하경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회복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서 수술만 받으면 된다. 그럼 이제 건강해질 텐데,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뭘 주고 얻은 기회인지 아니까. 나 못 해. 언니 인생 짓밟고 얻은 기회로 건강해지는 거 나 싫어.”
하경이 숨을 헐떡이며 울기 시작했다. 숨이 가쁜 게 느껴져 이경은 겁이 났다.
“알았어. 알았어, 하경아. 진정해. 마음 가라앉혀.”
이경은 하경을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 진정된 하경은 다시 잠이 들었다. 이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경이 계속 고집을 부릴까 봐 걱정되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심란한 얼굴로 병실을 나간 이경은 멍한 얼굴로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박 실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경은 박 실장과 미국 출국 스케줄을 의논했다.
“근데 하경이가 미국 안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요.”
이경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경 학생이요?
“네.”
—어머, 갑자기?
“사정이 좀 생겨서요. 혹시 수술을 미룰 수도 있나요?”
—알아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경은 박 실장과의 전화를 끊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경은 고집이 꽤 센 편이었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었다.
이경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
“알았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재하가 박 실장에게서 온 전화를 끊었다. 하경이 미국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전화였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박 실장은 잘 지켜 주었다.
재하는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경이 미국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하경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오전에 이미 들었지만 밤이 되어서야 재하는 병원을 찾았다.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하경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 무거운 걸음을 했다.
휴게실을 지나쳐 가는데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이경의 모습이 보였다. 재하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차이경은 자는 것도 뭐 저렇게 예뻐.”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재하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이경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