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성현은 매번 예준에게 원망을 쏟아 내는 유설을 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졌으니 무서웠을 거라고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었다.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 기간 내내, 그리고 예준을 낳고 나서도 유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해 왔다.
점점 성현은 유설보다는 예준이 이해되고 안쓰러워졌다. 유설은 그걸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저를 아빠로 아는 아이에게 정을 주고 사랑을 주게 되었다.
예준에게 정 없이 구는 걸 보는 것도 지치고, 유설 때문에 예준의 마음이 다치는 걸 보는 것도 힘들었다.
“차라리 지우지 그럼!”
“뭐?”
유설은 성현을 노려보며 그의 뺨을 때렸다.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매서운 유설의 손길에 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예준이 아빠라고 할 때는 언제고! 여자에 미쳐서 예준이도 안 보여? 차이경 그 여자한테 미쳐서 이젠 예준이도 귀찮아?”
“네 인생 버겁다고 여기저기 상처 주고 다니지 마. 당신 때문에 차 변호사 동생 상태가 어떤 줄 알아?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성현이 유설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경에게 미안해서 전화도 못 했다. 슬픔에 잠긴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어 괜찮냐고 묻지도 못했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나한테 들키지 말았어야지.”
유설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뭘 어쩌자고! 결혼 기간 내내 다른 남자 만나고 다닌 것도 당신이고, 이혼을 하자고 한 것도 당신이야. 나보고 뭘 어쩌라고. 어떻게 하라고!”
성현은 유설의 태도에 숨이 막혔다. 김유설이라는 여자는 늘 엉킨 실타래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언제나.
“당신이 나를 한심하게 봤잖아.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화를 안 내잖아. 이혼하자고 해도 알았다는 말만 했잖아. 내가 진짜 원한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은 해 본 적 있어?”
“원하는 걸 말을 해!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사랑.”
“뭐?”
“당신 사랑. 난 당신 사랑을 원했다고.”
유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늘 견고하던 얼굴에 금이 가고 유설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불안정한 얼굴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랑 없이 쇼윈도로 살자고 한 건 너였어. 내가 당신을 한심하게 봤다고 했지? 당신은 늘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봤어.”
“야망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니까. 날 수단으로 보는 남자를 내가 어떻게 마냥 사랑스럽게 봐?”
“그런 남자의 사랑을 원한 건 모순이지 않나?”
성현이 피식 웃었다.
“그럼에도 날 사랑하길 바랐으니까.”
“…….”
유설의 말에 성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신이 나한테 처음 한 말, 난 아직도 생각나. 빨간색이 잘 어울리시네요, 그 말을 하는 당신이 난 꽤 마음에 들었어.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생각했었어.”
“…….”
“그래서 예준이가 더 원망스러웠어. 예준이 때문에 당신한테 떳떳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도 예준이니까.”
“우리 처음 만난 날, 당신 예뻤어. 안쓰럽기도 했고.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어쩌면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고.”
성현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김오범 대표의 제안을 받고 나간 자리, 빨간 원피스를 입고 안으로 들어오는 유설은 화사한 꽃처럼 예뻤다.
“사랑받고 싶어, 당신한테.”
성현의 말에 유설이 진심을 부딪쳐 왔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난 후에야 꺼내 놓은 서로의 진심에 유설은 조바심이 났다.
성현은 한동안 말없이 유설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은 것 같다.”
유설을 바라보던 성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현은 그대로 유설에게서 돌아섰다. 옥상 정원을 빠져나가며 오늘도 유설이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시회장을 빠져나온 성현은 바로 하경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차를 주차해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없는 이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팀장님.
“동생 입원했다며? 한유 병원 맞아?
성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주간 보고도 안 올리고……. 죄송합니다.
이 와중에도 일 걱정을 하는 이경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더욱 짙어졌다. 유설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건 신경 쓸 거 없어.”
-죄송합니다.
“지금 한유 병원인데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네.
대답을 하고 이경이 병실 호수를 알려 주었다. 곧 가겠다는 말과 함께 성현이 전화를 끊었다.
병원 매점에서 음료를 사며 성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거 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손에 든 음료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성현은 이경이 알려 준 병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파리한 얼굴의 이경이 성현을 맞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이경이 가엾고 안쓰러워 성현은 달려가 안아 주고 싶었다. 그 대신 부끄러운 음료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앵무새처럼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이경은 몹시 지쳐 보였다.
성현은 누워 있는 이경의 동생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몸에 달려 있는 기계 장치들만 봐도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 변호사, 많이 힘들지?”
“괜찮습니다.”
이경이 덤덤한 얼굴로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정말 미칠 것 같아 결국 성현은 손을 뻗어 이경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경은 성현의 품에 잠시 안겨 있다 빠져나왔다.
“뭐 좀 드릴까요?”
이경이 냉장고 쪽으로 향하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성현은 등을 보이고 선 이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품에서 빠져나올 때 난감해하는 이경의 표정을 못 본 척 머리에서 지우고, 성현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 차 변호사.”
냉장고 안에 성현이 사 온 음료를 집어넣던 이경이 의아한 얼굴로 성현을 돌아보았다.
“팀장님이 왜 미안하세요.”
“예준 엄마 짓이잖아.”
성현이 이경의 시선을 피해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니 내가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성현은 이경을 볼 면목이 없었다.
“김 작가님이요?”
이경의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들었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이경의 눈동자에 스몄다. 성현은 이경의 표정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몰랐던 건가.
“김 작가님이 그럼…….”
이경의 눈빛에 차갑게 날이 섰다. 파리하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경의 얼굴을 보는 성현은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팀장님.”
그만 가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이경이 성현에게서 돌아섰다. 성현은 씁쓸한 얼굴로 이경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음 추스르고, 밥 잘 챙겨 먹고. 내일 또 올게.”
“멀리 못 나가요.”
“나오지 마.”
성현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지친 얼굴에는 씁쓸함이 낙엽처럼 쌓였다.
***
성현이 돌아가고 이경은 의자에 앉아 하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몸을 태우는 분노가 이경을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불안했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됐다. 유설도 원망스러웠고, 안일하게 생각해 하경을 전시회에 데려간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하경아.”
이경은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경의 따뜻한 체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언니한테 짐 아니야. 언니 너 없으면 못 살아. 살 이유도 없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다시 언니 옆으로 와 줘.”
이경은 계속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날도 하경은 이경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며칠 내내 병원에만 있었던 이경은 오랜만에 출근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향하는데 복도에서 재하와 마주쳤다.
“서 전무님.”
“왜 왔어?”
이경을 보자 재하가 바로 인상을 썼다.
“출근해야죠.”
“급한 일도 없는데 뭘 와.”
“정신 차렸습니다.”
이경이 괜찮다는 얼굴로 작게 웃어 보이고는 재하를 지나치려 했다.
옆을 스치는 이경의 팔을 재하가 붙잡았다.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재하의 감정이 읽혔다.
“서 전무님.”
“알았어. 가서 일해. 출퇴근 시간 조정해 줄게.”
이경이 부르자 재하가 스르르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대로 재하는 이경을 지나쳐 갔다.
이경은 멀어지는 재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신의 제안 덕에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 말은 나중으로 미루고 이경은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4시쯤, 황 비서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경이 문을 열어 주자, 황 비서가 재하의 말을 전해 주었다.
“차 변호사님, 퇴근하시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업무 시간 10시에서 4시까지로 조정된다고 하셨습니다.”
“서 전무님 어디 가셨습니까?”
“아니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황 비서가 빙긋 웃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사무실 문을 닫고 이경은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 말은 직접 와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서운한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코트를 입고 이경이 다시 카메라에 시선을 주었다.
“퇴근하겠습니다, 서 전무님.”
혹시나 해 이경이 카메라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쓱한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 문이 닫힌 후에야, “응.” 하는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듣지 못한 목소리였다.
회사에서 나온 이경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하경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박 실장이 이경을 반겼다.
“일찍 퇴근하셨네요, 차 변호사님.”
“서 전무님이 일찍 가라고 하셔서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제가 있을게요.”
“그럼 내일 8시까지 올게요.”
“9시까지 오셔도 돼요. 출근 시간 늦어졌어요.”
“알았어요. 고생해서 어쩌나.”
박 실장은 안쓰럽다는 듯 이경의 팔을 쓸어 주고 병실을 떠났다.
이경은 하경의 손을 잡아 주며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그 후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 하경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이경은 씩씩하게 하경의 간호를 했다. 저녁도 열심히 먹었고, 성현이 사 온 음료도 마셨다. 하경은 꼭 일어날 거라고 굳게 믿었다.
8시쯤,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네.”
대답을 하자, 문이 열리고 유설이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