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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58화 (58/83)

58화

재하는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세연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 20분이 지나고 나서야 세연이 쭈뼛거리며 룸으로 들어왔다.

재하는 맞은편에 앉는 세연을 삐딱한 얼굴로 보며 입을 열었다.

“하도 안 와서 난 먼저 밥 먹었어. 먹고 싶으면 시켜 먹든지.”

네가 밥을 먹건 말건 나는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고 재하가 물을 마셨다.

“재하 씨 같으면 밥 먹고 싶겠어?”

세연이 톡 쏘아붙였다.

“아니,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겠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세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고의로 그랬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세연이 재하를 노려보았다.

“애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재하는 차가운 얼굴로 세연을 보았다.

세연은 재하의 표정에 움찔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는 듯 세연은 살짝 질린 얼굴이었다.

“난 아픈 줄 몰랐어. 차 변호사 동생이 아픈 줄 진짜 몰랐다고.”

“아픈 줄은 몰랐는데 그딴 얘기는 어떻게 했어? 알았으니까 했을 거 아니야!”

재하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재하는 지금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자는 때려도 여자는 건드릴 수 없으니까 치솟는 분노를 억눌렀다.

“진짜 몰랐다고. 난 그냥 차 변호사가 미대 다니는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돈 필요해서 재하 씨 스폰 받는 줄 알았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미대 다니는 거 알 정도면 아픈 것도 알았을 거 아니야. 차이경 뒷조사했어? 그럼 걔가 동생이랑 빚 때문에 힘든 거 알았을 거 아니야. 가엾지도 않아?”

“아픈 거 알았으면 차 변호사 동생한테 그런 말 안 했어! 나,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야. 차 변호사 사정 알았으면 서재하를 욕하지 차 변호사 욕 안 해.”

세연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하는 못 믿겠다는 듯 세연을 가만히 보았다. 하경이 미대 다니는 것도 알고 이경과 내 관계를 아는데 아픈 걸 몰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 차 변호사 뒷조사 안 했어. 그 정도로 재하 씨한테 열정적이지도 않아. 솔직히 그래, 기분은 나빴어. 나 가지고 놀았으니까. 근데 이번 일은 정말 나도 몰랐다고. 나는 유설 언니 말만 믿고…….”

“유설? 김유설 작가?”

재하는 세연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응. 나도 그날 들은 거야. 유설 언니가 재하 씨랑 차 변호사 관계 얘기해 주는데 눈이 돌잖아. 좋아한다고 포장해 놓고 스폰 관계라니까 차 변호사는 뻔뻔해 보이고, 재하 씨는 나쁜 새끼 같고.”

“…….”

“동생 뒷바라지한다고 돈 받고 그런 짓 한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열도 받고 그래서 망신 좀 당해 보라고 차 변호사 동생한테 말해 준 거야.”

세연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재하의 얼굴에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또 이용당했네, 성세연.”

재하가 세연의 말에 실소했다.

김유설, 보통 아닌 건 알았지만 더 대단하네. 자기 손에는 더러운 거 안 묻히겠다? 재하의 입가가 비틀렸다.

“뭐?”

이용당했다는 말에 세연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똑똑하게 살아. 남들한테 매일 이용만 당하지 말고.”

재하는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유설 언니한테 이용당했다는 거야?”

세연이 재하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아마도?”

재하가 어깨를 으쓱이고 룸을 빠져나왔다.

호텔 한식당을 나와 차에 탄 재하는 바로 성현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성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바로 꺼내 들었다.

“어디야? 로펌이야?”

—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성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재하가 전화를 끊었다. 윤성현 대답 들어 줄 기분 아니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윤성현은 꼭 자신을 만나야 했다.

로펌에 도착한 재하는 성현에게로 향했다. 성현이 비서에게 미리 말을 해 두었는지 비서는 놀란 기색도 없이 재하를 성현에게 안내했다.

“커피는 됐고, 얼음물.”

재하가 성현의 비서를 보며 말했다.

비서가 꾸벅 인사와 함께 나가고 성현이 재하에게 소파를 권했다. 재하가 자리에 앉자 성현도 소파에 앉았다.

“김 작가랑 윤 변 무슨 관계야?”

“무슨 말씀입니까?”

대뜸 전 부인과의 관계를 물었는데도 성현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이런 점은 참 차이경이랑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이 순리고 나랑 김유설이 방해꾼인가. 두 사람의 사랑을 훼방 놓는 악역. 나나 김 작가나 잘 어울리네. 재하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애증?”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차 변호사 동생이 좀 아파. 혼수상태야.”

“네?”

무표정하던 성현의 얼굴에 그제야 감정이 떠올랐다. 걱정스러움이 잔뜩 떠오른 얼굴에 재하는 심장이 쿡 아파 왔다.

“성세연은 알던데 몰랐어? 그 자리 있었잖아.”

“몰랐습니다. 많이 안 좋습니까? 차 변호사는요?”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얼굴로 성현이 물었다.

“윤 변은 몰랐어도 김 작가는 알았을걸?”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문득 든 생각인데, 윤 변이랑 김 작가 생각보다 사이가 좋은가 봐?”

“서 전무님, 말 돌리지 말고 바로 하십시오.”

성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차이경이 무슨 계약을 했는지 아는 건 세상에 딱 셋밖에 없었어. 나, 차이경, 그리고 윤 변. 근데 김 작가가 그 계약을 알고 있다면 말할 사람은 딱 한 명이지.”

재하가 턱짓으로 성현을 가리켰다.

“말한 적 없습니다.”

성현은 아까보다 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김 작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성세연한테 나불거리냐고. 성세연한테 나불거린 덕분에 하경이가 알게 됐고, 지금 상태 굉장히 안 좋아.”

재하가 성현을 노려보았다.

“하.”

성현이 충격을 받은 듯 숨을 토해 냈다.

“이 일의 시작이 윤성현이면 내가 누구를 조져야 하는 걸까?”

재하가 삐딱한 얼굴로 소파에 기댔다. 불량한 자세로 앉아 성현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이 일의 시작이 알고 싶으신 거라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서 전무님이고, 차 변호사를 불행하게 만든 것도 서 전무님입니다.”

성현은 재하의 사나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재하의 입가에 걸려 있던 삐딱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곡을 찔린 재하는 굳은 얼굴로 성현을 보았다.

성현이 한 말이 칼날이 되어 재하의 심장을 쑤셨다. 흘러내리는 피가 역류해 재하의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젠장.”

재하는 욕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비서가 얼음물과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재하는 비서가 들고 있는 얼음물을 가져가 단숨에 들이켰다.

“김유설 작가는 윤 변한테 양보할게. 그래도 윤 변 전 부인인데 내가 예의는 지켜야지?”

재하는 비서가 들고 있는 쟁반 위로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으며 성현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성현의 방을 빠져나와 곧장 김오범 대표의 집무실로 향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로 들어가자 김오범 대표가 깍듯한 얼굴로 재하를 맞았다.

“얼마 전에 선물 들어온 그 차 내와요.”

김오범 대표가 비서에게 말하고는 재하에게 소파를 권했다.

“좋은 차가 선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재하가 다리를 꼬며 오범을 보았다.

오범의 시선이 잠깐 재하가 꼰 다리로 향했다가 이내 웃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그 모습에 재하가 한쪽 입술을 올렸다.

우리 김오범 대표, 예의 없는 건 또 못 참지. 재하는 다리를 꼬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소파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댔다.

“내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편이라서요. 아시죠? 서재하 미친 새끼인 거.”

“회장님이 들으시면 속상해하십니다.”

“서 부회장이랑 골프 자주 치시던데. 우리 영감님은 그 사실을 아시나.”

재하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같은 골프 모임이라 서 부회장님을 자주 뵙죠.”

“나는 골프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던데. 테니스가 더 취향이라. 우리 영감님 젊었을 때도 그렇고.”

“저도 젊었을 때는 테니스를 더 좋아했죠. 나이 먹으니 무릎이 안 좋아서.”

“우리 김 대표님 더 늙기 전에 조카딸 관리 좀 하시죠.”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재하가 몸을 바로 하며 말했다. 입가에 걸려 있던 불량한 미소마저 지웠다.

“조카딸이면 유설이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오범이 물었다.

“자식 없으셔서 조카들 친자식으로 생각하시고, 그중 김유설 작가를 제일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아끼는 자식일수록 매 많이 들라고 했습니다. 저 할아버지한테 많이 맞고 컸거든요.”

“유설이한테 매를 들라는 말로 이해해도 될까요?”

오범은 이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매를 들 이유는 김 작가한테 물어보시고.”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는 제법 예의 바른 태도로 오범에게 인사를 했다.

“차는 마신 걸로 하겠습니다, 김 대표님.”

재하는 그 말을 하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난 오범을 돌아보았다.

“노선 확실히 정하시고요. 골프인지, 테니스인지.”

“그럼요.”

재하의 말에 오범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하가 오범을 잠시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

성현이 전시회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설이 바로 그에게 다가왔다.

“옥상으로 가자. 옥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아.”

싱긋 웃는 유설의 얼굴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유설을 따라 옥상으로 향하는 성현의 얼굴도 유설과 비슷했다.

잘 꾸며진 옥상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난간에 가까이 선 유설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유설에게 다가선 성현은 거친 동작으로 담배를 빼냈다. 담배를 부러트리고 바닥에 던져 버린 성현이 사나운 얼굴로 유설을 보았다.

“내가 처음 담배를 시작한 게 예준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나서야.”

유설이 성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늘 최악이네.”

“소름 끼쳤거든. 나도 모르는 게 내 배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게. 죽었으면 좋겠더라고.”

“차라리 지우지 그럼!”

잔인한 유설의 말에 성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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