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경의 얼굴에 무기력한 빛이 고였다. 이게 내 의무라면 해야지. 해 줘야지.
이경의 머릿속에는 빨리 끝내고 하경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재하가 성큼 이경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숙여 이경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달래는 입맞춤이 따스해 이경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재하의 부드러운 입맞춤에 이경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지금 원하는 게 제 몸이 아니라는 걸. 서재하식으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한없이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며 재하가 어깨 뒤로 넘어간 이경의 셔츠를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런 후, 하나씩 단추를 다시 채워 주었다.
단추를 다 채우고 재하가 이경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이경은 다시 단추가 채워진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서재하의 마음이 보였다. 걱정하고 있는 재하의 마음이.
“따뜻한 물로 씻고 와.”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잡고 욕실 쪽으로 돌렸다.
이경은 별다른 반항 없이 욕실 쪽으로 향했다. 재하의 말대로 따뜻한 물로 좀 씻고 싶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이경은 오래도록 물을 맞고 서 있었다.
마음 위로 끝없이 쌓아 올려진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을 무너트리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머리 위로 흐르는 따뜻한 물이 그 감정들을 씻겨 주었다.
재하의 품 같은 온도였다.
씻고 나와 보니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전복이 가득 들어간 전복죽에서는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앉아. 죽은 먹기 편할 거야.”
재하가 이경을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이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숟가락을 들었다. 하경이를 지키려면 정신 차려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경이는 착하니까 절대 언니를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경은 씩씩하게 전복죽을 먹었다.
절반 정도를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먹고 싶었지만 속이 부대껴 더는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 먹을 거야?”
“네.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습니다.”
“체하면 안 되지.”
재하가 일어나 미니바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뚜껑을 따고 이경에게 건네주었다.
이경은 말없이 재하가 준 생수를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하경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경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재하가 이경의 손을 잡고 침대로 데려갔다. 이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서 전무님.”
이경은 재하의 팔을 잡았다. 하경이한테 가야 한다.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재하는 이경을 돌아보았다. 잠시 침묵하다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든 재하는 그대로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그 위로 내려놓았다.
“가 봐야 합니다.”
이경이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재하가 그대로 이경을 끌어안고 누웠다.
“서 전무님.”
재하의 품에 안긴 이경이 빠져나오려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재하는 이경을 더 빠짝 품으로 끌어당기고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자. 며칠째 잠도 안 잤잖아.”
“하경이 혼자 있습니다. 제가 가야 합니다.”
이경이 고개를 휘저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하경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내가 가 볼 테니까 너는 한 시간만이라도 자. 제발 부탁이니까.”
등을 토닥이던 재하의 손이 머리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겨 주고, 쓰다듬었다.
커다란 재하의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이경은 노곤해졌다. 머리를 쓰다듬고, 귀를 만져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자꾸만 졸음을 유발했다.
“하경이한테 가야 합니다.”
이경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몸이 자꾸만 나른해졌다. 재하의 손길이 따스해 지친 마음이 위로되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이경은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재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
“미안해, 이경아. 내가 미안해.”
재하는 이경을 품에 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경은 어느새 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하경의 옆만 지켰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잠든 이경을 확인하고 재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침대에 제대로 눕혀 주고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재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든 이경의 머리와 뺨을 차례로 쓰다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깨어나면 하경의 병원으로 올 게 분명해서 지갑을 꺼내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외투도 안 입히고 데리고 나와 분명 지갑도 없을 것이다.
이경을 호텔에 두고 재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재하는 하경이 쓰러진 이후로 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이었다.
‘나 수술받는 대가로 재하 아저씨한테 언니 팔았어?’
하경이 쓰러지기 전에 했던 말이 귀에서 자꾸만 재생되었다. 이경의 말이 모두 맞다. 하경이 쓰러진 건 전부 제 탓이다.
“개새끼라 결국은 다른 사람을 무네.”
재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 조건 없이 수술받게 해 줄걸. 차이경 가지겠다고 기어이 그딴 짓을 해서 이경을 망가트렸다. 재하는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경의 병실로 들어온 재하는 이경이 내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하경을 바라보았다. 몸에 의료 기기들을 주렁주렁 매단 게 안쓰러워 목이 멨다.
“하경아, 일어나자. 언니가 걱정해.”
재하가 하경을 보며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이대로 하경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 죄책감이 목을 조여 왔다.
“아저씨가 잘못했어. 미안해.”
재하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가 너무 개새끼지? ……이경이가 너무 좋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나 봐. 이경이랑 너한테 상처 내고…….”
말을 할수록 감정이 차올라 재하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손에 얼굴을 묻고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재하는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삼켰다.
“아저씨가 미안해. 아저씨가 정말 잘못했어.”
재하는 전달되지 않는 사과를 그 밤 내내 계속 중얼거렸다.
다음 날 아침, 피곤한 얼굴로 출근을 한 재하는 따라 들어오는 황 비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또 과음하셨습니까? 숙취 해소제 가져올까요?”
“아니. 필요 없어.”
황 비서의 말에 재하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그럼 오늘 스케줄 보고 올리겠습니다.”
“됐고. 점심에 성세연이랑 약속 좀 잡아 줘.”
“청해 그룹 성세연 님 말씀입니까?”
황 비서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눈을 뜬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성세연.”
“파혼하셨는데 왜…….”
황 비서가 말꼬리를 흐렸다.
“황 비서는 궁금한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어. 성세연이랑 점심 약속 잡아. 조용한 곳으로.”
재하가 귀찮다는 듯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네, 알겠습니다.”
황 비서는 대답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재하는 황 비서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하경의 모습과 다 죽어 가는 이경의 모습이 눈에서 아른거려 가슴이 아렸다.
두 사람을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목을 조였다. 가슴이 답답해진 재하는 결국 넥타이를 풀어 던져 버렸다.
몇 시간 후, 황 비서가 난감한 얼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던 재하가 안으로 들어오는 황 비서를 쳐다보았다.
“성세연 님, 전무님 안 만나겠다고 하시는데요? 지금 너무 바쁜 상태고, 지방에 있어서 만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까고 있네.”
재하는 황 비서가 전해 준 말에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황 비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성세연 전화번호.”
약혼 관계였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 전화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었다. 만날 일이 있으면 황 비서를 시켜 약속을 잡았기에 재하는 세연의 전화번호도 몰랐다.
황 비서가 재하에게 세연의 전화번호를 불러 주었다. 재하는 황 비서가 불러 주는 번호를 감정을 실어 눌렀다.
나가 보라고 황 비서에게 손짓을 하고, 재하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신호음이 울리더니 세연이 전화를 받았다.
—재하 씨, 나 바빠. 여기 부산이야.
전화를 받은 세연이 대뜸 바쁘다는 말부터 했다.
재하와 달리 세연은 그래도 재하의 번호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기차 타고 서울로 와. 아니면 뭐, 비행기 보내 줘?”
재하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날 왜 만나겠다고? 우리가 만날 사이야?
세연은 약간 겁을 먹은 말투였다. 하경이 쓰러진 걸 본 건지, 얘기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자기 잘못을 제대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 내가 간다. 어디야?”
—그냥 전화로 해.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재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소리 안 지르게끔 해, 그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부산이라니까 시간 넉넉하게 줄게. 1시까지 WR 호텔로 와. 지난번 한식당.”
재하는 세연의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세연과의 통화를 마치고도 들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유리로 된 창으로 바짝 다가간 재하는 밖을 내다보았다.
겨울로 물든 세상이 한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꼭 이경 같아 재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도 참 엿 같겠다. 하필이면 나 같은 새끼 눈에 들어서.”
이경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자기혐오에 깊게 빠진 재하는 성현을 보며 웃던 이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경에게는 윤성현 같은 사람이 더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외할아버지인 권 회장이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순리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는 그 말이.
차이경에게는 윤성현이 순리였을지도. 재하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