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하, 하경아. 하경아, 그게…….”
이경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경이 알아 버렸다. 평생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이경은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언니가 이러면 엄마 아빠 말이 맞잖아. 내가 언니한테 짐 되는 거 맞잖아!”
하경이 울며 이경을 향해 소리쳤다.
“하경아?”
하경의 말에 이경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 사실 다 알고 있었어. 그거 사고 아닌 거, 다 알고 있었다고. 엄마랑 아빠가 그랬어. 앞길 창창한 언니 힘들게 하지 말고 다 같이 가자고. 난 언니한테 짐밖에 안 될 거라고.”
울며 말하는 하경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경은 머리가 하얘졌다. 하경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일을 단순한 사고로 알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다 알고 있었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내색도 안 하고 혼자 견딘 거야? 이경은 하경이 안쓰러워 마음이 찢어졌다.
“나 죽기 싫었어, 언니. 살려 달라고 소리쳤는데 엄마랑 아빠가 내 말은 안 들었어. 언니한테 짐 안 되게 노력할 거라고 했는데 아빠가 차를…….”
하경이 발작하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경아, 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 마.”
이경이 하경의 팔을 붙잡으며 달래듯 말했다.
하경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파리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경은 하경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이러면 안 돼, 하경아. 진정해, 제발.
“결국은 엄마 아빠 말이 다 맞아. 난 언니한테 짐밖에 안 돼. 엄마 아빠랑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는 하경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경아!”
이경이 하경을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경을 안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결국은 이렇게 하경이가…….
이경은 그대로 멍하니 하경만 바라보았다. 머리가 멍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상황판단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차이경, 병원 가게 정신 차려.”
한 발짝 뒤에서 이경과 하경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었던 재하가 달려왔다. 이경의 품에 있는 하경을 안아 들고 차가 주차된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일어난 이경은 하경을 안고 뛰는 재하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꿈인 듯 몽롱하기만 했다.
***
며칠째 하경은 혼수상태였다. 이경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경의 곁을 지켰다.
하경이 마지막으로 쏟아 낸 말들이 이경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말들이 너무 아프고 슬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이경이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우리 하경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경은 하경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뚝뚝 흘러 하경의 손바닥을 적셨다.
이경도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경이 쏟아 낸 말들이 마지막 말일까 봐, 그런 아픈 말이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하경아, 언니 두고 가면 안 돼. 언니 두고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이경은 울면서 하경에게 매달렸다.
“차 변호사님.”
그때, 누군가 이경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이경이 고개를 들었다. 박 실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이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 실장님.”
“차 변호사님, 집에 가서 눈 좀 붙여요.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경이 깰 동안 여기 있을래요.”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차 변호사님도 쓰러져요. 보호자가 건강해야죠.”
박 실장이 이경을 일으켰다.
이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온 이경은 집으로 가려다 목적지를 바꾸었다.
택시를 잡아탄 이경은 잠시 후,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납골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이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아빠.”
부모님을 모신 납골함 앞에 선 이경이 힘없이 부모님을 불렀다.
유리 벽 너머 가족사진이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에 이경이 무너져 내렸다.
“제발 하경이 살려 줘. 하경이 데려가지 마. 하경이 짐 아니야. 나한테 하경이 짐 아니야. 엄마, 아빠. 제발, 응? 제발.”
이경은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하경이를 짐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가 하경이를 데려갈 것만 같다.
“하경이 나한테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야. 하경이도 떠나면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안 남아. 엄마, 아빠 제발. 하경이 없으면 나도 죽어. 나도 살 이유 없어. 제발, 하경이 좀 살려 줘.”
이경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납골함을 올려다보았다.
이경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하경에게 그런 상처를 준 것도,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하경을 빼앗아 가려는 것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이경은 한동안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 냈다. 더는 흐를 눈물이 없을 때쯤, 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납골당을 나왔다.
그대로 다시 하경에게로 돌아가 내내 자리를 지켰다. 박 실장이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하경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재하가 찾아왔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재하를 쓱 한 번 쳐다보고 이경은 하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재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경아.”
재하의 입에서 다정하게 흘러나온 이름이 이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뜩 날이 선 이경은 다정하게 불린 이름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밥은 먹은 거야?”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먹고 싶지 않습니다.”
“벌써 3일째야. 3일째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경은 어깨에 있는 재하의 손을 밀쳐 내며 차갑게 말했다.
“차이경.”
“가십시오. 서 전무님 상대할 기분 아닙니다.”
“밥 먹으러 가자.”
재하가 이경의 팔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경은 재하를 뿌리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상관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네가 이 꼴인데 어떻게 상관을 안 해! 하경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재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경이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십시오.”
이경의 눈이 차가운 빛을 냈다.
재하는 한동안 말없이 이경의 차가운 눈빛을 받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재하의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가세요. 서 전무님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이대로 굶어 죽을 거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계속 여기 있을 거냐고?”
재하의 말에도 이경은 하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재하 쪽은 쳐다보지 않고 하경의 손만 꽉 잡고 있었다.
“차이경.”
재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귓가를 건드리는 재하의 목소리에 하경을 잡고 있는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불쑥 원망이 솟았다.
서재하의 제안만 아니었어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딴 계약만 하지 않았어도.
하경을 이렇게 만든 게 꼭 재하 같아서 이경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일어나.”
재하가 이경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경이 재하의 팔을 뿌리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원망스러운 사람이 성가시게 굴어 왈칵 짜증이 났다.
“저 좀 그냥 두십시오. 하경이가 왜 이렇게 됐는데요? 서 전무님이 하신 제안 때문이잖아요.”
“…….”
이경을 보는 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갈피를 잡지 못한 눈동자가 흔들리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제는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 못 한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하경이 잘못되면 전부 서 전무님 탓입니다. 하경이가 제 곁을 떠나면 평생 원망하고, 미워할 겁니다.”
이경은 쏟아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으로 몰린 이경은 누구든 원망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재하 때문이라고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경은 전부 자신의 잘못인 걸 알고 있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내 탓 해. 내 탓 얼마든지 해. 그러려면 뭐라도 먹어야지!”
“싫습니다. 하경이 깨어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차이경.”
“제발 제 일에 신경 끄세요!”
“굶어 죽을 거야, 그럼?”
재하가 버럭 화를 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가시 돋친 이경의 말에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이경의 팔을 잡고 병실에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십시오.”
이경이 재하의 팔을 다시 뿌리쳤지만 단단하게 붙잡은 손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재하가 이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 할 일 안 끝났잖아. 계약 조건 잊었어? 갑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을은 요구에 응한다.”
재하의 말에 이경이 화가 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경이가 있는 데서 계약 조건을 입 밖으로 꺼낸 재하가 미워 미칠 것 같았다.
“계약을 잊으면 안 되지, 차이경.”
한숨 같은 목소리가 재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딴 계약 파기할 겁니다.”
“계약 파기는 갑만 가능하다. 을이 계약을 어길 시 갑이 지불한 비용의 열 배를 갚는다.”
재하가 계약 조항을 이경에게 읊어 주었다.
이경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계약에 발목 잡혀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다.
비참하고, 또 비참해 이경은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따라와, 차이경.”
재하가 이경의 손을 잡고 하경의 병실을 빠져나갔다.
재하는 이경을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재하의 손에 이끌려 호텔 룸으로 들어선 이경은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와중에도 내 몸을 원한다면 드려야지. 갑인데.
이경은 문이 닫히자마자 재하를 똑바로 보며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재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차이경.”
인상을 쓴 채로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이경은 재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셔츠 단추를 전부 풀고 셔츠를 어깨 뒤로 넘겼다. 캐미솔 차림의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하십시오. 마음대로 원 없이 하십시오.”
비아냥거리는 이경의 말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