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여우과인가 봐요. 표정도 없고 해서 곰인 줄 알았는데.”
세연이 툴툴거렸다.
“실은 그이도 차 변호사를 좋아해요.”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유설이 입을 열었다.
“네? 윤 변호사님이요?”
세연이 놀란 얼굴로 유설을 보았다.
“나는 다시 합치고 싶었는데 그이 마음속에 벌써 차 변호사가 있다네. 우리 비슷한 상황이네요.”
유설이 작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여우도 보통 여우가 아닌가 봐요. 저런 애들 사실 작정하고 덤비잖아요.”
세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남이 들어 좋을 이야기가 아니기에 주변을 경계하며 이야기했다.
“근데 세연 씨는 나랑은 좀 다를 수도 있어요.”
“달라요? 뭐가요?”
“차 변호사, 얻을 게 있어서 서 전무님 옆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뭐 당연히 뭐라도 주워 먹으려고 저 성질 더러운 서재하 옆에 붙어 있겠죠.”
“이런 말 여자로서 좀 그렇긴 한데 두 사람 평범한 연인 관계 아닌 것 같아요. 몸을 주고, 대가를 받는?”
유설이 이경과 재하를 차례로 가리키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현이 잠든 예준을 데리고 집으로 왔던 날 밤 이후로 유설은 이경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그래서 사람을 써서 이경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동생이 아픈 것도 알아냈고, 곧 미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뒤에 서재하가 있다는 것도.
‘차 변호사 상황, 이해도 되고 안쓰럽기도 하고.’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것도 감수할 만큼.’
‘서 전무 장난 끝날 때까지.’
성현이 이경에게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고 나자 결론이 나왔다. 아픈 동생 수술을 받게 하려고 차이경이 서재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렇게 애절했구나, 윤성현. 나한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안타까워하는 그 표정. 이래서 불쌍하고 예쁜 여자가 위험하다는 건가.
유설은 이경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그 불결한 여자를 좋아하는 성현 역시 더러웠다. 두 더러운 것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망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을 주고 대가를 받았다고요?”
세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차이경 변호사 돈이 필요한가 보더라고요. 저기 저 여자애가 차이경 변호사 동생인 것 같은데 그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동생이 미대 다니나 봐요. 돈 많이 들죠, 미대면.”
유설은 이경과 재하와 함께 있는 하경을 가리켰다. 동생이 아프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래야 세연이 머뭇거리지 않고 사고를 쳐 줄 테니.
“차이경 생각보다 뻔뻔하네? 여기를 지 동생까지 달고 나타나? 그런 더러운 짓 하는 주제에. 서재하도 아주 웃겨. 그딴 관계면서 좋아한다고 포장은 왜 해?”
세연은 예상대로 펄펄 뛰어 주었다.
“동생이랑 사이가 아주 좋더라고요. 동생이 알면 속상하겠어요. 자기 때문에 언니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속상만 하겠어요? 쪽팔리겠지?”
이경과 하경을 번갈아 보는 세연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유설은 세연의 표정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서 전무님한테 인사를 안 해서 인사드려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겠냐는 표정으로 유설이 세연을 보았다. 세연은 유설의 표정에 고개를 흔들었다.
“저 자식 꼴도 보기 싫어요.”
세연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유설은 얼굴에 미소를 걸고 이경과 재하를 향해 다가갔다. 유설의 구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서 전무님. 차 변호사.”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간 유설이 그들을 불렀다.
이경과 재하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경의 얼굴에 당황이 고스란히 떠올라 유설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설은 공손한 얼굴로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 이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은 차 변호사 동생이에요? 많이 닮아서.”
유설이 이경에게서 하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언니 동생 맞아요.”
동경의 눈빛으로 하경이 유설을 보았다. 느껴지는 호감에 유설의 미소가 더욱 화사해졌다.
“어쩐지 많이 닮았다 했어요.”
“차하경이에요. 한국대 서양화과 다녀요.”
하경이 얼른 자기소개를 했다.
“내 후배네.”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유설의 말에 하경이 눈을 반짝였다.
“반가워라. 차 변호사 동생 미술 전공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만나 볼걸. 왜 말 안 했어요?”
유설이 살가운 얼굴로 이경을 보며 말했다.
이경은 유설의 말에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가 작가님 전시회 너무 가고 싶어서 언니 막 졸랐어요.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인 줄 아는데 작가님 작품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요.”
하경이 이경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 되긴요. 잘 왔어요. 그럼 천천히 둘러 봐요. 아, 그리고 궁금한 거나 상담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유설이 명함을 꺼내 하경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경은 기쁜 얼굴로 명함을 받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이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굳어진 이경의 얼굴을 보며 유설이 입술을 올렸다. 이제 이경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는 세연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변한 얼굴 감상만 하면 되는 거고.
***
“하경아, 명함 언니한테 줘.”
유설이 떠나고 이경이 하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냥 가지고 있으면 안 돼? 연락 안 할 거야.”
하경은 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언니가 가지고 있을게.”
하지만 이경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하경은 시무룩한 얼굴로 이경에게 명함을 주었다. 명함을 가방에 챙겨 넣은 이경은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졌다.
“나갈까?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하경이 뭐 먹고 싶어?”
이경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재하가 제안을 했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기분이 나아졌는지 하경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안지혜 변호사가 이경에게 다가왔다. 지혜는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경에게 입을 열었다.
“차 변호사, 대표님한테 인사 안 드렸지? 인사드리고 오자.”
“네, 변호사님.”
이경은 지혜에게 대답하고 재하를 보았다. 하경을 두고 가기 불안했다. 재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경은 안심한 얼굴로 지혜를 따라 김오범 대표에게로 향했다.
이경이 떠나고 하경과 재하는 그림을 좀 더 감상했다. 그때 누군가 재하에게 알은척을 했다.
“서재하, 여기서 본다.”
재하와 하경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지훈이라는 남자로, 재하가 싫어하는 여러 사람 중 하나였다.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오지훈도 초대받았네?”
“오랜만에 봐도 여전하네, 서재하.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
지훈은 말하면서 하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이 끈적였다.
재하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었다. 여자만 보면 침 질질 흘리는 발정 난 개새끼가 바로 오지훈이었다.
“근데 누구?”
“안녕하세요.”
하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응, 안녕.”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 주는 지훈의 모습에 재하가 혀를 찼다. 새끼가 어디라고.
“처제, 저쪽 가서 그림 좀 보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네? 네.”
갑자기 처제라고 부르는 재하 때문에 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눈치껏 자리에서 빠져 주었다.
“처제? 세연 씨 동생? 세연 씨 여동생 없잖아?”
“나 약혼 깨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성세연이야.”
“그럼 누구?”
호기심을 내비치는 지훈의 모습에 재하는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알 거 없고. 우리 처제한테도 관심 꺼.”
“서재하 처제면 뭐.”
지훈도 시끄러운 일은 싫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떠났다.
“더러운 새끼.”
재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훈의 뒷모습을 보며 욕을 퍼부었다. 그때, 인사를 끝낸 이경이 재하에게 다가왔다.
“하경이는요?”
재하만 혼자 있자 이경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웬 바퀴벌레 같은 새끼가 들러붙어서 피신시켰어.”
재하가 하경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경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경아.”
재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경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하경과 함께 있는 것은 세연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하경에게 다가가는 이경의 걸음이 급했다.
“쟤는 왜 저기 있어.”
재하는 이경보다 앞서 하경에게 다가갔다. 재하가 다가가자 세연이 코웃음을 치고는 사라졌다.
세연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 재하가 바로 하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경아.”
재하가 부르자 하경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이경이 하경의 팔을 잡았다. 이경은 눈물이 고인 하경의 얼굴에 심장이 철렁했다. 세연에게 무슨 얘기를 듣기라도 한 걸까?
“하경아, 왜 그래?”
“언니.”
하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이경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하경아.”
이경이 하경을 따라갔다.
재하도 하경을 따라가며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 세연을 쳐다보았다. 애한테 뭔 얘기를 한 거야.
하경은 빠른 걸음으로 전시회장을 빠져나왔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경아!”
달려온 이경이 하경을 붙잡았다. 아파 보이는 하경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허리를 세운 하경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이경을 보았다.
“정말이야?”
“뭐, 뭐가?”
이경이 떨리는 표정으로 하경을 보았다.
“정말 재하 아저씨한테 몸 팔았어? 나 때문에? 나 수술받는 대가로 재하 아저씨한테 언니 팔았어?”
하경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경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