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경은 하경을 유설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설은 성현과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것 같았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유설이 하경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하면…….
“아, 일로 알게 된 사람이니까 안 되겠구나. 언니, 미안해. 내가 눈치가 없었다.”
하경이 머쓱한 얼굴로 이경에게 사과했다.
“그게 아니라, 하경아.”
“너무 좋아하는 작가님이 언니한테 초대장을 보내서 내가 좀 들떴나 봐. 언니 곤란한 거 생각 못 했어. 내가 언니한테 짐 되면 안 되는데. 미안해.”
하경이 헤헤 웃으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하경아, 언니가 그런 말 싫다고 했지?”
하경은 종종 언니한테 짐 되기 싫다는 말을 했다. 하경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면 이경은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이 하경을 데리고 가려 했던 이유도 하경이 이경의 삶에 짐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면 이경은 동생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언니. 내가 또 깜빡했어.”
하경은 히죽 웃었다.
괜찮은 척을 하는 하경의 모습에 이경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김유설 작가를 좋아한다면 전시회에 가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하경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경은 불안했다.
“하경아.”
“언니, 배고파. 우리 빨리 밥 먹자.”
하경은 이경에게 초대장을 돌려주고, 씩씩한 얼굴로 주방으로 향했다. 이경이 씁쓸한 얼굴로 하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밥을 먹고 하경은 졸리다며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이경은 혼자 소파에 앉아 유설이 보낸 초대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설이 초대장을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그때, 안지혜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경은 얼른 지혜의 전화를 받았다.
지혜는 일 관련 얘기를 한동안 하다 말미에 유설의 이야기를 꺼냈다.
—차 변호사도 전시회 갈 거야?
“네? 전시회요?”
지혜의 말에 초대장을 받은 게 자기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대장 못 받았어? 로펌 변호사들한테 다 돌렸다던데.
“받았어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팀장님 생각하면 가기 좀 그렇고, 대표님 생각하면 얼굴도장 찍어야 할 것 같고.
“전시회 첫날 사람들 많이 올까요?”
—많이 오겠지. 보통 집안 사람도 아니고. 작년 전시회에는 서 전무도 갔다던데?
“서 전무님이요?”
—요즘 서전또는 좀 잠잠해?
지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철드신 것 같아요.”
이경의 말에 지혜가 웃음을 터트렸다.
—차 변, 파견 근무 끝나고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나 커피 친구 없어서 심심해.
지혜는 한동안 로펌 변호사들의 근황을 전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지혜의 전화를 끊고 이경은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수술받고 나면 하경은 한동안 병원에 꼼짝없이 입원해 있어야 한다. 몇 달을 낯선 미국 병원에서 보낼 하경이 이경은 안쓰러웠다.
하경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전시만 잠깐 보여 주고 나올까.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 잠깐 보고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전시회 첫날이면 유설도 정신이 없어서 누가 왔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전시회에서 문제를 만들 것 같지는 않았다.
고민하던 이경은 이내 결심한 얼굴로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하경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하경이 눈을 떴다.
“언니.”
“언니 때문에 깼어?”
“아니. 졸린데 잠이 잘 안 와.”
“언니 때문에 속상해서?”
이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경이 푸스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언니 때문에 왜 속상해.”
“하경아, 우리 전시회 잠깐 보고 올까?”
“응?”
이경의 말에 하경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래는 못 있고, 아주 잠깐만 보고 오자.”
“정말? 정말 나 가도 돼?”
하경이 기쁜 얼굴로 물었다.
“응, 언니랑 다녀오자.”
이경이 웃으며 하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니, 고마워.”
하경은 이경의 목을 끌어안고 좋아했다.
좋아하는 하경의 모습에 이경은 웃음 지었다. 하경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안 갔으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을 것 같다.
이경은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
테이블에 기대 서류를 넘겨 보던 재하의 시선이 이경에게 향했다. 서류를 아래로 내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전시회 간다고?”
“네, 하경이가 가고 싶어 해서요.”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이경이 재하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럼 나도 가야겠네. 안 가려고 했는데.”
재하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 때문에 가시는 겁니까?”
“내가 가서 차이경 지키고 서 있어야지. 윤 변도 올지 모르잖아. 이제 겨우 20%만큼 좋아졌는데 차이경 뺏기면 어떡해?”
재하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무심한 투로 말했다.
재하의 입에서 나온 성현의 이름에 이경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서 전무 장난이 끝나고 나면 자기에게 오라고 했던 성현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어설프게 시작했다 피지도 못하고 끝나 버린 성현을 향한 감정이 잠시 이경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차이경.”
그때,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을 생각하던 이경이 재하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에 기대 있던 재하가 성큼 걸어와 허리를 숙이고 이경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딴 새끼 생각하지 마.”
입술을 뗀 재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20%가 아니라 16%입니다. 은근슬쩍 올리지 마십시오.”
이경이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반올림이야.”
재하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서류를 살폈다.
“저는 금방 나올 겁니다. 오래 안 있을 생각이에요.”
“그래, 그렇게 해. 나와서 같이 밥 먹으러 가면 되겠네.”
“가시면 오래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오범 대표한테 얼굴만 비추면 돼. 이거 관련된 서류 또 나오면 바로 가지고 와.”
재하가 들고 있는 서류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간다.”
재하가 손을 흔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확인해야 할 서류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서 전무님은 대체 이것들로 뭘 하려는 걸까. 이경은 서석호 부회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류를 살폈다.
***
“나 얌전히 있을 거야. 진짜야. 김유설 작가님도 멀리서만 볼 거야.”
이경의 옆에서 걸으며 하경이 다짐하듯 말했다.
“언니 옆에서 떨어지지 마.”
이경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경을 보았다.
간밤에 나쁜 꿈을 꾸었다. 하경이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그 거울이 갑자기 산산조각이 나는 꿈이었다.
꿈이 너무 찝찝해 깨고 나서도 한동안 이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응. 언니 옆에 꼭 붙어 있을게.”
하경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이경과 하경은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손님들이 가득했고, 전시회라기보다는 파티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하경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경은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하경을 따라 걸었다. 하경은 진지한 눈으로 그림을 감상했다. 이경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슨 기법이 사용되었는지 알려 주기도 했다.
“오, 천재네. 천재야.”
하경이 그림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하경이 옆을 돌아보며 재하를 반겼다.
이경이 눈인사를 건네자 재하가 슬쩍 윙크를 했다. 그의 행동에 이경은 작게 웃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쪽 그림은 어떻게 생각해? 화가님?”
재하가 하경을 데리고 다른 그림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재하는 이경을 스쳐 지나가며 슬쩍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계속되는 재하의 잔망스러움에 이경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성현의 시선이 이경과 재하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성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 눈을 맞추고 웃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참 다정해 보이네. 당신 물먹은 것 같은데?”
그때, 유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이 옆으로 선 유설을 돌아보았다. 푸른 계열의 정장을 입은 유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웠다.
“당신도 참 사는 게 엿 같지? 이혼한 전 부인 전시회에도 참석해야 하고.”
늘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언제나 가시를 세웠다. 그 날카로운 가시에 누군가가 찔려 피를 흘려야 만족하는 사람.
“축하해.”
“꽃이라도 사 오지.”
“꽃 싫어하잖아.”
“그래도. 보는 눈이 많잖아.”
유설이 성현의 가슴을 손으로 쓸다 넥타이를 바르게 정돈해 주었다.
“이혼한 전 부인한테 꽃 가져다 바치는 엿 같은 인생이라고 전시하기는 싫어서.”
“나는 우리 나쁘게 헤어진 거 아니라고 말하고 다녀. 로맨틱하지 않아? 이혼한 전 남편이 가져다주는 꽃.”
“그렇긴 하겠네.”
성현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엿 같은 인생, 정말 엿같이 느껴져 성현은 유설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유설은 멀어지는 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차이경 선택은 서재하란 거지? 버림받았네, 예준 아빠.”
픽 웃던 유설이 짜증을 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세연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세연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재하와 이경이 있었다.
“저쪽도 버림받았나?”
유설은 재미있다는 듯 쿡 웃고는 세연에게 다가갔다.
“세연 씨.”
“언니.”
씩씩거리던 세연이 유설을 보며 표정을 고쳤다.
사교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가끔 만나 식사를 하거나 생일을 챙기는 사이였다.
“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죠. 언니 전시회인데.”
세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참 잘 어울렸는데 내가 다 아쉽네.”
유설이 저만치 보이는 재하와 세연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서재하 저 자식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재수 없어.”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날 가지고 놀았어요.”
세연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세연 씨를 가지고 놀다니?”
유설이 우아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 세연은 얼마 전 재하와 있었던 일을 꺼냈다. 재하가 자기를 이용해 이경의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했었던 일을.
“차 변호사가 매력이 넘치는 모양이네.”
유설이 미소와 함께 재하와 나란히 서 있는 이경에게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