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차이경이 나 좋아해 주는 거.”
진지한 재하의 눈빛이 이경에게 닿았다. 달빛이 푸르게 빛나 재하의 얼굴에도 시린 푸른빛이 감돌았다.
“…….”
이경은 말없이 재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서재하가 왜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좋아하는지.
“나 좀 좋아해 주는 거.”
“서 전무님은 제가 왜 좋으십니까?”
한숨처럼 이어진 재하의 말에 이경이 물었다.
뛰어난 미인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잘난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해 주는 걸까.
“너는 내 편 같아서.”
“제가요?”
“그럼 아니야?”
이경의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재하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서 전무님 사람 하기로 했으니 서 전무님 편 맞습니다.”
“처음이었어. 나 이해해 준 사람. 넌 사과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사과 안 하게 도와줬잖아.”
이어진 이경의 대답에 재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좋아지셨습니까?”
“응.”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하네요.”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뭔가 다른 게 있을 줄 알았더니.
“다른 걸 바랐어?”
“좀 더 극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을 서 전무님 같은 분이 좋아할 때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거든요.”
“차이경이 뭐가 평범해.”
재하가 픽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발 앞의 돌을 툭 찼다.
“평범하죠.”
“말했잖아. 나한테는 네가 제일 어렵다고. 제일 어렵고, 제일 특별하고. 그리고 단순한 거 아니야. 난 위로받았어, 차이경한테. 어린 시절 일까지.”
“…….”
“그래서 네가 좋은 거고, 사랑하는 거고, 사랑받고 싶은 거고. 그런 짓까지 해 가면서 가지고 싶었던 거고.”
다시 고개를 든 재하가 이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재하의 얼굴에 새겨진 표정이 복잡했다. 미안함, 절박함, 자기혐오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서 전무님.”
“미안해, 이경아. 그런 짓까지 하면서 너 가진 거. 내가 섬세하지도 못하고, 성질머리도 더럽고, 너한테 그런 짓까지 해서 네가 날 싫어할 이유 충분한데……. 그래도 이경아, 난 너한테 사랑받고 싶어.”
절절하게 흘러나온 재하의 진심이었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재하의 진심에 이경의 마음이 서재하로 천천히 물들었다.
“전 좀 둔한 편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서 전무님이 마냥 밉지는 않다는 겁니다.”
“응.”
“지금 든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력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경이 재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력?”
“서 전무님을 좋아하기 위한 노력이요.”
이어진 이경의 말에 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재하의 눈을 보며 이경이 그의 팔을 잡았다.
“노력을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고 싶어졌어요.”
마음을 두드리는 솔직한 생각이었다. 서재하라는 남자를 좋아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처음부터 잘못 시작된 관계지만 어긋난 부분을 바로 잡고 나면 재하가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재하가 이경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 그대로 이경을 품에 안았다. 이경을 끌어안은 채로 재하가 말했다.
“천천히 해도 돼. 기다릴게.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기다려. 난 기다릴 수 있어.”
“정말 몇십 년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재하의 말에 이경이 웃으며 물었다.
“못 기다릴 이유가 없지. 몇백 년도 아니고 고작 몇십 년이면.”
“몇백 년은 못 기다리시겠습니까?”
“죽어야 해서 몇백 년은 못 기다려. 사람 대부분은 백 년을 못 살아.”
실없는 재하의 말에 이경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서 전무님 죽기 전에는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좀 모자라게 좋아해도 돼. 꽉 채워서 좋아할 필요 없어. 이미 내가 넘치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재하가 이경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푸른 달빛이 시리게 빛나는 밤이었다.
***
“얼마만큼 좋아졌어?”
이경을 집 앞에 데려다준 재하가 물었다.
지겹지도 않나. 이경이 재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요즘 재하는 눈만 마주치면 얼마만큼 좋아졌는지 물었다. 성질만 더러운 게 아니라 성격도 급하다.
“3%요.”
“왜 아까랑 똑같아?”
삐쳤는지 재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2.9%요.”
“왜 줄어?”
“성질내셔서요.”
“아니야. 성질낸 거 아니야.”
재하가 도리질을 하며 이경의 눈치를 보았다.
“내셨습니다.”
“아니라고. 빨리 다시 3%로 올려 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경이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공동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지 말고, 차이경. 지금 일주일 동안 겨우 3%가 됐는데 깎는 게 어디 있어?”
재하가 빠르게 이경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 조로 말했다. 사라진 0.1%가 몹시 아까운 듯 재하는 간절한 얼굴이었다.
“알았습니다. 3.1%만큼 좋습니다.”
그 간절한 얼굴이 제법 귀여워 이경은 후하게 올려 주었다.
“정말?”
재하는 기쁜 얼굴로 이경을 끌어안았다.
이경은 그의 품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이었지만 전혀 춥지가 않았다.
이경을 꽉 끌어안고 몸을 오뚝이처럼 좌우로 흔들던 재하가 똑바로 섰다. 그리고 이경을 풀어 주며 입을 열었다.
“한 달 휴가 줄게.”
“네?”
“하경이 따라서 미국 가. 더 주고 싶은데 그 이상은 내가 좀 힘들 것 같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경은 기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박 실장은 3개월이 걸릴 거라고 했다. 수술에서 회복까지 3개월은 미국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휴가를 길게 낼 수 없는 상황이라 수술하는 날에 맞춰 일주일 정도만 미국에 머물 생각이었다.
“뭐가 감사해? 차이경 보고 싶어서 길게 못 보낸다는 얘긴데.”
“한 달이나 주셨잖아요. 그거면 전 충분합니다.”
“……그럼 두 달 가 있을래?”
재하가 힐끔 이경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한 달이면 됩니다.”
재하의 표정에 이경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 하경이 수술하고 회복하는 것까지는 볼 수 있을 테니.
“그래, 알았어.”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가 보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공동 현관으로 들어가던 이경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던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왜?”
“10%입니다. 10%만큼 좋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가 환하게 웃었다.
“하경이 파워가 세긴 세구나? 3개월 가 있을래? 그럼 한 50%?”
“들어가십시오.”
이경이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집 앞까지 데려다줄까? 귀신이 잡아갈 수도 있으니까.”
재하가 성큼 이경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안 괜찮아.”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가겠다는 고집스러운 얼굴에 이경이 작게 웃으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재하가 이경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여기 관리하는 사람은 없나? 이거 센서를 갈든지 해야지. 어두워서 어디 다니겠어?”
여전히 센서 등이 나가서 어두운 계단에 재하가 불만을 드러냈다.
“반장 아주머니가 어제 센서 등 값 받아 가셨습니다.”
“참 빠르기도 하다.”
“이제 곧 밝아질 겁니다.”
이경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경이 수술하고 나면 집 옮길래?”
재하의 물음에 이경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해 줄 생각인 걸까. 이경은 재하의 동정에 자존심이 상했다.
“선 넘은 거야?”
“네, 넘으셨습니다.”
이경은 대답을 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너랑 하경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으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알았어.”
재하가 순순히 대답했다.
성질도 안 부리고 대답하는 재하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이경이 현관문 앞에 섰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응.”
대답을 한 재하가 슬쩍 이경의 손을 잡았다. 아쉬운 듯 이경의 손을 한 번 힘주어 잡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이경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하경이 우편물을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언니, 언니.”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지금 저녁이 중요한 게 아니구.”
“그럼 뭐가 중요해?”
저녁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하경의 말에 웃으며 이경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김유설 작가님 어떻게 알아?”
하경이 우편물을 이경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
김유설이라는 말에 이경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성현의 전 부인이 왜 하경의 입에서…….
“이거, 김유설 작가님 전시회 초대장 언니 앞으로 왔어.”
하경이 이경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경의 앞으로 온 유설의 전시회 초대장이었다. 이경은 긴장한 얼굴로 초대장 봉투를 열어 보았다.
초대장과 함께 유설이 직접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 꼭 와서 자리를 빛내 달라는 메모에 이경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 김유설 작가님이랑 아는 사이였어?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이경이 들고 있는 초대장을 빼앗듯 가져간 하경이 들뜬 얼굴로 초대장을 살폈다.
“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인데.”
“그랬어?”
하경이 종종 입에 올린 작가 중에 유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는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떻게 알았어? 응? 언니 로펌 의뢰인이었어?”
“우리 팀장…… 로펌 대표님 조카래.”
성현의 전 부인이라는 말을 하려다 이경은 말을 돌렸다. 팀장 전 부인보다는 로펌 대표 조카로 소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언니, 갈 거야? 갈 거지? 나 데리고 가면 안 돼?”
“안 돼.”
데리고 가 달라는 하경의 말에 이경은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