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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52화 (52/83)

52화

“그래서 지금은 좋아할랑 말랑 정도는 되나?”

재하의 그 말에 이경은 그냥 웃기만 했다.

재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경의 볼을 가볍게 툭 치며 빙긋 웃었다.

별장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저녁은 별장 안에서 먹었다.

관리인이 해 준 밥을 먹고, 재하가 군고구마를 구워 주겠다며 캠핑카 앞에 불을 피웠다.

“맛있다.”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를 마시며 하경이 중얼거렸다.

“군고구마도 먹어.”

재하가 나무 막대기로 불에 던져 놓았던 고구마를 꺼내며 말했다. 고구마에 감싼 쿠킹 포일을 열자 잘 익은 고구마가 연기를 뿜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고구마 껍질을 벗겨 재하가 하경에게 내밀었다.

“잘 먹겠습니다.”

하경이 고구마를 호호 불며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재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 불에서 고구마 하나를 더 꺼냈다.

“서 전무님도 얼른 드십시오.”

“차이경도 먹여야지. 내 변호사인데.”

재하는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이경에게 대답했다.

“언니, 아저씨랑 같이 나눠 먹으면 되지.”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하경이 말했다.

“역시 똑똑해.”

하경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재하가 반으로 가른 고구마를 후후 불어 이경의 입으로 가져갔다.

“제가 먹겠습니다.”

“뜨거워.”

고구마로 손을 뻗는 이경을 제지하며 재하가 이경의 입에 고구마를 넣어 주었다. 꿀이 가득한 호박 고구마가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언니, 나 졸려.”

몇 번 더 재하가 먹여 주는 고구마를 말없이 받아먹는데, 하경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졸려?”

하경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외출하고 오면 몇 시간씩 낮잠을 자야 할 정도로 몸이 약한 하경인데 오늘은 낮잠도 자지 않았다. 피곤할 법도 했다.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자.”

재하가 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저씨, 저 캠핑카에서 자면 안 돼요? 캠핑카에서 자고 싶어요.”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하경이 물었다.

“방에서 자는 것보다 불편할 텐데.”

“안 불편해요.”

“그럼 그렇게 해.”

“네.”

하경이 헤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하경이 캠핑카로 들어갔다.

“차이경도 들어가서 자. 피곤할 텐데.”

“서 전무님은 안 주무십니까?”

“9시면 초저녁이지.”

재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좀 더 놀아 드리겠습니다.”

“뭐 어떻게 놀아 줄 건데? 으슥한 곳으로 가?”

“야외에서는 좀 그렇습니다. 추워요.”

이경이 담담한 얼굴로 거절했다.

그 말에 재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차이경은 뭐가 이렇게 개방적이야? 변태야?”

“농담이었습니다. 진담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러니 내가 미친놈이 되지. 들었다 놨다 아주 가지고 놀아.”

이경의 말에 재하가 미소와 함께 불을 나무 막대기로 뒤적였다.

“놀아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은 주황빛으로 일렁이는 불을 보며 말했다. 불 앞에 있으니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재하의 시선이 느껴져 그를 쳐다보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재하의 모습에 이경은 불처럼 마음이 일렁였다.

이경을 가만히 보던 재하가 이경의 양쪽 뺨을 한 손으로 쥐고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건드리고, 안으로 들어간 재하의 혀가 녹일 듯 입안과 혀를 더듬었다.

“으음.”

옅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이경이 재하의 목에 손을 감았다. 불을 앞에 두고 한동안 두 사람은 호흡을 나누었다.

“들어가서 자.”

한참 만에 떨어진 재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잘 자.”

재하가 이경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서 전무님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경은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경이 있는 캠핑카로 향하는 걸음이 약간은 흔들렸다.

캠핑카 안으로 들어간 이경은 잠이 든 하경의 옆에 누웠다. 잠에서 깼는지 하경이 이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언니.”

“응?”

“나 재하 아저씨 좋아.”

“…….”

“나는 찬성이야. 언니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아.”

웅얼웅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하경이 말했다.

이경은 아무 말 없이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등을 토닥였다.

서재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좋은 남자였다. 성질은 좀 더럽지만 품이 넓은 사람 같았다. 하경의 말대로 옆에 있으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새근거리는 하경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이상하게 그 순간 이경은 재하가 보고 싶어졌다. 별장으로 들어갔을 것 같지만 이경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캠핑카를 빠져나갔다.

재하는 아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을 보고 앉아 있는 재하에게 이경이 천천히 다가갔다.

“왜 나와?”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재하가 이경을 돌아보았다.

“잠이 안 옵니다.”

“아직 10시도 안 됐으니 자기는 좀 이른 시간이지.”

재하가 피식 웃으며 앉으라는 듯 의자를 가리켰다.

이경은 의자에 앉아 불 너머 잔잔한 강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강은 고요한 빛을 냈다. 어디선가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거의 처음으로 맞는 평화로운 시간에 이경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부모님 돌아가시고 이런 시간은 처음인 것 같아요.”

“부모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 알아. 하경이만 살아남은 것도 알고.”

재하가 위로하듯 이경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안 묻겠습니다.”

이경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맞아. 뒷조사했어.”

“그래도 이건 모르셨을 겁니다.”

재하의 말에 이경이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뭘?”

“부모님 사고, 단순한 사고 아니었어요. 자살이었지.”

이경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고의 진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하에게 말해 주었다.

“차이경 고단한 인생, 내가 가엾어해도 되나?”

“다른 사람들의 동정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하경이랑 살아야 했으니까요. 근데 어느 날은 서 전무님이 알고 계신 제 가난이 부끄러웠습니다.”

“왜?”

“모르겠습니다.”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다 아는 재하에게 새삼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가난하다는 게 부끄러웠다.

“나한테는 부끄러워할 거 없어. 그게 뭐든 다 좋아. 차이경이 가진 거라면.”

재하가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어 강 쪽으로 던졌다. 돌멩이가 수면 위로 통통통 튀다 가라앉았다.

이경의 마음도 돌멩이가 흔들어 놓은 수면처럼 흔들렸다. 그 마음을 외면하듯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저도 가르쳐 주십시오.”

“물수제비?”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 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빠가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 장사하느라 바쁘셔서 한 번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알았어. 가르쳐 줄게.”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들고 이경을 데리고 강 가까이 다가갔다.

“돌 만져 봐.”

재하가 이경의 손에 돌멩이를 쥐여 주었다. 납작한 돌멩이가 이경의 손으로 들어왔다.

“물수제비를 잘 뜨려면 이렇게 납작한 돌멩이가 좋아.”

“네.”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이 각도로 던지는 거야.”

재하가 뒤에서 이경을 안듯이 감싸고 이경의 손을 쥔 채 강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통통통, 돌멩이가 수면 위를 튀어 다니다가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혼자 해 봐.”

재하가 이경을 풀어 주고 다른 돌멩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경이 재하가 가르쳐 준 대로 자세를 취해 보는데 재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이경, 몸치지?”

“아닙니다.”

이경이 정색하며 말했다.

“몸치가 아니면 이 동작이 설명이 안 되는데.”

재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고 보십시오. 최소 세 번은 튈 겁니다.”

“내기할까?”

“좋습니다.”

이경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강으로 몸을 돌렸다. 돌멩이를 던지려는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었다.

“어디, 차이경 솜씨 좀 보자.”

재하의 놀리는 말투에 이경은 숨을 내쉬었다. 꼭 성공해서 서재하 코 납작하게 해 줘야지. 이경은 긴장한 얼굴로 돌멩이를 던졌다.

통! 꾸르륵!

한 번 튀어 올랐던 돌멩이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재하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이경은 기분이 상했다.

“웃지…….”

몸을 돌려 따지려는데 재하가 몸을 숙여 이경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닿은 재하의 숨결에 이경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재하가 바로 이경의 팔을 잡아당겨 가까이 끌어왔다.

“졌잖아, 이경아. 해 줘야지.”

속삭이듯 말하고 재하는 이경의 입술을 탐했다. 집어삼킬 듯 헤집어 놓는 재하의 움직임에 이경의 몸이 흔들렸다.

재하는 이경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모든 것을 흡수하듯 이경을 탐했다.

“하아.”

한참 만에 재하에게서 풀려난 이경이 숨을 몰아쉬었다. 재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입을 맞춰 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내기의 기본은 소원 들어주기야. 이런 거 안 해 봤어? 원래 남자랑 여자랑 내기를 하면 소원 들어주기가 기본이야.”

“이런 거 많이 해 보셨나 봅니다.”

묘하게 기분이 상해 이경이 따지듯 물었다.

“넌 안 해 봤어?”

“네.”

“그럼 나랑 처음 한 거네? 공부만 했구나?”

재하가 티 나게 좋아해서 이경은 자존심이 상했다.

“유치한 짓은 원래 안 합니다.”

“유치한 짓이 원래 재미있는 법인데. 공부만 해서 몰랐구나?”

재하가 계속 이경을 놀려 댔다.

이경은 재하를 한 번 흘겨보고는 돌멩이를 주워 다시 강으로 던져 보았다. 이번에도 물수제비를 뜨지 못하고 돌멩이가 강으로 가라앉았다.

“강물 수심 낮아지겠네. 차이경이 돌로 다 덮어서. 그럼 여름에 하경이 수상 스키도 못 타.”

“놀리지…….”

재하를 돌아본 이경의 입술이 다시 재하에게 잡아먹혔다. 깊은 키스를 나누고 재하가 이경을 놓아주었다.

“내기 끝난 거 아닙니까?”

“아닌데.”

“계속 같은 소원 빌지 마십시오.”

“그럼 내 진짜 소원 들어줄 거야?”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으며 물었다.

“진짜 소원이 뭔데요?”

“차이경이 나 좋아해 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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