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삐뚤어진 하경의 방한 모자를 이경이 바로 잡아 주었다. 얼굴을 꽁꽁 싸맨 목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목도리도 다시 매 주었다.
모자에 마스크에 목도리까지 한 하경은 눈만 내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경은 하경이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되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하경아. 컨디션 관리 잘 하라고 박 실장님이 그러셨잖아.”
“응.”
하경이 조금은 귀찮은 표정으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경과 하경의 앞으로 재하의 차가 멈추었다.
“춥다, 얼른 타.”
창문을 연 재하가 이경과 하경을 보며 말했다.
하경이 뒷좌석에 타고, 이경이 조수석에 탔다. 안전벨트를 맨 이경이 뒤에서 들려오는 하경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다 뭐예요, 아저씨?”
뒷좌석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했다. 도시락과 보온병, 과자들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침 안 먹었으면 먹으라고. 김밥도 있고, 유부 초밥도 있고, 샌드위치도 있어. 골라서 먹어. 큰 보온병에 든 건 어묵탕이고, 작은 보온병에는 유자차 들어 있어.”
재하가 하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와~ 이거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그럴 리가. 우리 집 요리사 솜씨 좋아.”
재하가 운전을 시작하며 말했다.
“아, 맞다. 아저씨 재벌이지.”
하경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차 변은 커피 마셔.”
재하가 자동차 컵 홀더에 꽂혀 있는 커피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경은 재하가 사 온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서 전무님은 아침 식사하셨습니까?”
“우리 영감님, 아침 안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이라 같이 먹고 왔어.”
“네에.”
이경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재하와 비어 있는 컵 홀더를 번갈아 보았다. 커피는 이경의 것밖에 없었다.
“서 전무님은 커피 없으십니까?”
“운전해야 해서.”
이경의 물음에 재하가 대답했다.
혼자만 마셔도 되나, 이경이 힐끗 재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하경이 불쑥 말을 꺼냈다.
“언니가 아저씨한테 언니 커피 먹여 주면 되잖아.”
“어?”
하경의 말에 이경은 당황해 목소리가 흔들렸다.
재하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가 똑똑하네. 천재야, 천재.”
때마침 신호가 걸렸다. 재하는 먹여 달라는 듯 이경 쪽으로 몸을 숙였다.
뒷좌석에서 키득거리는 하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지, 이경이 망설이는데 재하가 재촉했다.
“신호 바뀌겠다.”
“그래, 언니. 빨리, 빨리.”
하경도 이경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그러니 얼결에 이경은 재하에게 커피를 먹여 주었다. 뜨겁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하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컵에서 입술을 뗐다.
“아, 뜨거워.”
중얼거리는 재하를 보며 이경이 작게 웃었다.
“아저씨 데었어요? 언니, 빨리 아저씨 ‘호’ 해 줘.”
“하경아.”
하경의 장난에 이경이 엄한 말투로 하경을 불렀다.
“차이경, 야박하다. ‘호’도 안 해 주고.”
“우리 언니가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죠.”
“인정머리 없어.”
“그러게 말이에요.”
재하와 하경은 주거니 받거니 아주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이경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하경에게 재하와의 관계를 들킬까 무서웠지만 즐거워하는 하경의 모습에 이경은 걱정이 덜어졌다.
그 계약을 아는 건 세상에 딱 세 사람밖에 없으니, 그 세 사람이 입을 다물면 하경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재하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성현이 하경을 만날 일은 없으니 영원히 묻힐 거라고 이경은 생각했다.
차 안은 재하와 하경이 떠드는 소리로 내내 시끄러웠다. 이경은 한 번씩 두 사람에게 놀림을 받았고, 이경을 놀릴 때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어느새 재하의 별장에 도착했다.
강을 끼고 있는 별장은 개인 선착장이 있어 여름에는 수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그 강 앞에 재하가 말한 캠핑카가 있었다.
“우와.”
하경은 너무 넓어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정원을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언니랑 놀고 있어. 점심 준비할게.”
재하가 트렁크에서 장 본 것들을 꺼내며 말했다.
“캠핑카에 가 봐도 돼요?”
“가 봐. 열려 있을 거야.”
재하가 하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오는 관리인에게 짐을 넘겼다.
하경은 강 앞에 있는 캠핑카로 향했다. 이경은 관리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재하를 보았다.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 하경이랑 놀아.”
눈이 마주치자 재하가 하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경이 캠핑카 문을 여는 하경에게 다가갔다. 하경은 잔뜩 들뜬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언니, 완전 좋아.”
캠핑카 내부는 하경의 말대로 정말 좋았다. 우리 집보다 좋다는 하경의 말에 동의하며 이경이 캠핑카 내부를 살폈다.
캠핑카도 구경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을 산책하고 나자, 캠핑카 앞에는 바비큐 그릴이 준비되어 있었다.
캠핑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도 놓여 있어 정말 캠핑을 온 기분이었다.
“앉아 있어. 구워 줄 테니까.”
재하가 이경과 하경을 보며 말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셨습니까?”
이경은 재하가 사 온 것들을 보며 물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꼬치, 소시지, 조개에 새우까지. 열 명은 먹어야 할 것 같은 양이었다.
“뭘 제일 좋아할지 몰라서.”
그릴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재하가 대답했다.
“너무 많습니다.”
“많이 먹으면 되지.”
재하가 웃으며 이경을 보았다. 재하의 웃음에 이경도 똑같은 웃음을 지어 주었다.
“분위기 좋은데?”
두 사람이 같은 표정으로 웃음을 나누고 있는 사이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하경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경과 재하를 놀려 댔다.
재하는 하경의 말에 기분이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하경의 목소리와 재하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경이 얼른 재하에게서 몸을 돌렸다. 민망한 기분에 헛기침을 하고 하경의 옆에 앉았다.
“언니, 재하 아저씨 안 도와줘도 돼? 아저씨 혼자 굽잖아. 언니가 가서 도와줘.”
하경이 이경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하경아.”
“빨리.”
하경이 어서 재하의 옆으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알았어.”
무슨 오해라도 한 건지 하경은 자꾸만 이경을 재하의 옆으로 보내려고 했다. 재하 혼자 일을 시키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그래 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으라니까.”
옆으로 다가가자 재하가 입을 열었다.
“하경이가 도와주라고 해서요.”
재하의 말에 대답하고 이경이 도울 걸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만 보면 차이경보다 하경이가 눈치가 좋아.”
재하가 익은 고기를 이경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경이 받아먹지 않고 눈만 끔벅이고 있자 재하가 입에 고기를 쏙 넣어 주었다. 얼결에 받아먹은 이경은 고기를 씹어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 익었습니다. 맛있어요.”
“그럼 가서 접시 가지고 와.”
“네.”
이경이 접시를 가져오자 재하가 익은 고기를 가득 담아 주었다. 재하는 가서 하경이랑 먹으라고 했지만 이경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애 혼자 밥 먹게 하지 말고. 얼른 가.”
재하는 이경의 등을 하경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떠밀었다. 하는 수 없이 이경이 다시 하경에게 돌아갔다.
재하는 열심히 굽고, 이경과 하경은 그가 구워 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재하가 뒤늦은 식사를 하는 동안 하경이 계속 종알거리며 떠들었다.
“아저씨, 보트 겨울에도 탈 수 있어요?”
“탈 수 있지. 태워 줄까?”
하경의 물음에 재하가 대답했다.
“감기 걸려, 하경아.”
“타고 싶은데.”
이경이 말리자 하경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10분만 타자.”
재하가 이경을 보며 조르듯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이경은 허락을 했다. 보트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아 사실 이경도 살짝 궁금하기는 했었다.
식사를 끝내고 재하는 이경과 하경을 보트에 태웠다. 운전은 재하가 직접 했다.
“와!”
하경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즐거워하는 하경의 모습에 이경은 미소를 지었다. 이경도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에 마음이 들떴다.
“수술 잘 받고 여름에 또 놀러 와. 놀러 오면 수상 스키 가르쳐 줄게.”
재하가 선착장에 보트를 세우며 말했다.
재하는 먼저 선착장으로 올라가 하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요? 수상 스키 타 보고 싶었는데.”
하경이 재하의 손을 잡고 선착장으로 올라왔다.
다음은 이경의 차례였다. 재하가 이경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경이 그 손을 잡았다. 재하는 이경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이경을 선착장으로 올려 주며 재하가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게 예쁘네, 차이경.”
“…….”
선착장으로 올라온 이경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재하의 손길이 은근했다. 그의 손길에 이경은 힐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하경의 뒷모습을 보았다.
“키스는 안 됩니다. 뽀뽀 정도는 몰라도.”
이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재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하게 터진 재하의 웃음에 하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왜요?”
하경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언니가 웃겨서.”
웃으며 말하는 재하를 스쳐 지나가며 이경은 헛기침을 했다. 뽀뽀도 안 된다고 할 걸 그랬나.
“우리 언니가요?”
앞서 걷던 하경이 재하와 이경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방금 엄청 웃긴 표정 지었어. 원숭이 같은 표정.”
“제가 언제요!”
재하의 말에 이경이 발끈했다.
“우리 언니 바나나 좋아해요. 그래서 원숭이 같은 표정을 잘 짓나 봐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경아.”
이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계속 두 사람에게 놀림받고 있다.
“상관있을 것 같은 데에에.”
하경이 말끝을 길게 끌며 씩씩하게 캠핑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하경의 뒷모습을 보며 이경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경이가 정말 즐거워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서 전무님.”
“그래서 지금은 좋아할랑 말랑 정도는 되나?”
재하가 은근슬쩍 떠보듯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