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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50화 (50/83)

50화

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방어회를 먹던 재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중학생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은혜가 주환과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날의 일이.

외할아버지가 해외 출장을 간 날이었다. 학원 강사가 수업을 펑크 내 평소보다 일찍 집에 귀가한 날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석호가 은혜와 주환, 두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막 시작된 식사에 집안일을 봐주는 최 실장이 재하의 몫까지 식사를 챙겨 주었다.

“주환이 돈가스 먹고 싶다고 했지? 나가자. 아빠가 사 줄게.”

재하가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석호가 주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재하는 숟가락을 쥔 채로 아버지 석호를 보았다.

“돈가스? 진짜?”

주환이 들뜬 얼굴로 해맑게 웃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환이 좋겠네. 아빠가 돈가스 사 준다고 하시고.”

은혜가 흐뭇한 얼굴로 주환과 석호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였지만 재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혜와 주환은 제 가족이 아니었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석호는 재하를 힐끔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석호의 경멸 어린 시선이 한순간 스쳐 지나가서 재하는 알았다.

나는 안 데려가겠구나.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온 나는 세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한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치즈 돈가스 먹어도 돼?”

즐거운 주환의 목소리가 다이닝 룸에 울리고, 재하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잘 먹어야 아빠만큼 크지.”

석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주환의 어깨를 잡고 다이닝 룸을 나갔다. 호호호 웃으며 석호의 뒤를 따라 나가는 은혜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석호도 은혜도 재하에게 함께 가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재하가 그 자리에 없었던 듯 세 사람은 그렇게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다이닝 룸이 정적에 휩싸였다. 혼자 남겨진 재하는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돈가스보다 맛있는 거 여기 많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미련스럽게 밥을 다 먹었다.

덕분에 재하는 체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재하는 돈가스를 먹지 못했다. 돈가스만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려서.

그때 생각을 하던 재하가 방어회 한 점을 다시 집었다.

“방어회 먹고 체하면 나만 손해지.”

방어회를 먹으며 재하가 중얼거렸다.

내일은 이경에게 방어회를 사 줘야겠다. 그럼 좋은 기억만 남을 테니.

***

“하경이가 가고 싶답니다.”

이경이 옆에서 걷고 있는 재하를 힐끔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주말 어때?”

이경의 말에 재하가 기쁜 얼굴로 눈을 맞추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영화가 보고 싶다며 떼를 쓰듯 말하는 재하에게 이경은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다정하게 영화를 볼 사이는 아니지만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는데 재하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다.

“하경이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물어볼게.”

재하는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이경이 조수석에 타고 재하가 문을 닫으며 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며 운전석으로 가는 재하의 표정이 행복해 보여 이경은 픽 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좋아할까.

“기대하고 있어. 아저씨가 제대로 준비할 테니까.”

재하가 전화를 끊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멀리는 못 갑니다. 하경이 차 오래 타면 피곤해해요.”

“가평까지는 괜찮지?”

재하가 이경을 보며 물었다.

“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가평 별장에 캠핑카가 있어. 캠핑 기분 내기 좋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이경은 재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운데 미운 남자. 전에는 고마움과 미움이 딱 절반씩 자리했는데 어느새 미움보다는 고마움이 훨씬 더 커졌다.

“내가 좀 덜 미운가?”

재하가 이경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네.”

이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재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에 이경의 입가가 올라갔다.

“좀 좋아진 것 같아?”

“…….”

좋아진 것 같냐고 묻는 말에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이경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서재하가 고맙기만 한 건지, 아니면 좋기도 한 건지.

“서재하 저 새끼 좀 괜찮은 새끼네. 이 정도도 아니야?”

재하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이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 정도는 됩니다.”

“정말?”

재하가 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네.”

좋아하는 재하를 보며 이경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좋아하는 재하가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뽀뽀해도 돼?”

재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

“안 되겠지? 공공장소니까.”

이경이 인상을 찌푸리자 재해가 얼른 꼬리를 내리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꾸중을 들은 아이 같아 이경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좀 귀엽네, 서재하.

“차이경.”

“네.”

“회 먹어?”

“잘 먹습니다.”

“다행이네. 방어회 먹으러 가자.”

재하는 다시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함께 방어회를 먹고 재하는 호텔로 가지 않고 이경을 바로 집에 데려다주었다. 재하가 하경이 주라며 사 준 초밥을 들고 문 앞에 선 이경이 입을 열었다.

“들어가셔서 차라도…….”

“그래.”

재하는 냉큼 대답했다.

사양 한 번 안 하는 게 서재하답다고 생각하며 이경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경이 이경을 반겼다.

“어? 아저씨?”

하경은 뒤따라 들어오는 재하를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내 초상화 얼마나 그렸나 점검하러 왔어.”

“다 그렸어요. 미국 가기 전에 액자에 넣어서 드리려고 했는데.”

재하의 말에 키득 웃으며 하경이 답했다.

“뭘 액자씩이나. 오늘 줘. 가져가게.”

“네.”

하경이 헤헤 웃으며 방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이경은 식탁에 재하가 사 준 초밥을 꺼내 놓았다. 그러고는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방에서 나온 하경이 그림을 들고 재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어때요? 미화해서 그렸어요.”

“미화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렸네.”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하경과 재하가 웃고 떠드는 소리에 이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처럼 집 안에 온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종종 거실에서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었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이경은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가서 초밥 먹어. 식어.”

“초밥은 원래 식은 음식이잖아요.”

재하의 말에 하경이 까르르 웃었다.

이경은 하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녹차 티백을 따뜻한 물에 우렸다. 하경의 것까지 우리고 이경은 잔을 들고 재하에게 다가갔다.

“가서 어서 먹어. 저녁 너무 늦었다.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고.”

이경이 하경을 식탁으로 보내고 재하에게 녹차를 내밀었다.

“아저씨, 잘 먹을게요!”

식탁 의자에 앉은 하경이 몸을 틀어 재하에게 인사를 했다.

“초상화 값이니까 맛있게 먹어.”

“네!”

재하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하고 하경이 식사를 시작했다.

“힘이 넘치는 걸 보니 수술 잘 되겠다.”

재하가 이경이 준 녹차를 마시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서 전무님.”

하경에게 수술할 기회를 준 재하가 고마워져 이경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재하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애를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경이한테 가 봐. 애 혼자 밥 먹게 하지 말고.”

머쓱한 얼굴로 응, 대답을 하고는 재하가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손님이 우선이죠!”

식탁에서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은 가야겠다, 그럼.”

재하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남은 녹차를 후후 불어 꿀꺽꿀꺽 마시고, 재하가 이경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하경이 그려 준 초상화를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아저씨, 가시게요?”

초밥을 먹다 말고 하경이 현관으로 달려왔다.

신발을 신던 재하가 하경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밥 먹지, 왜 왔어?”

“가시는데 인사는 해야죠.”

“손님 대접 아주 제대로야. 언니 닮아서 예의가 바른가?”

“하경아, 가서 먹어. 언니 서 전무님 배웅하고 올게.”

이경이 하경을 보며 말했다.

“배웅은 무슨. 나오지 마.”

재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하경이 손을 흔들며 재하를 배웅했다.

이경은 재하를 따라 나왔다. 그러자 재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말 참 안 듣지.”

“가시는 거 보겠습니다. 귀신이 서 전무님 잡아가면 어쩝니까?”

“귀신이 나 잡아가면 차이경은 좋은 거 아닌가.”

“슬플 겁니다. 귀신이 서 전무님 잡아가면.”

“예쁜 짓 적당히 해라, 차이경.”

재하가 이경의 양쪽 뺨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도 뽀뽀하면 안 되겠지? 집 앞이니까.”

“살짝만 하십시오.”

덩달아 이경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하가 입가를 올리며 이경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가볍게 빨고 떨어진 재하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얼른 들어가. 하경이 밥 다 먹겠다.”

재하가 문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잘 자, 이경아.”

꾸벅 인사를 하자 재하가 소년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이상한 반응을 보일 정도로 예쁜 미소였다.

재하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재하가 귀신에게 잡혀가지 않기를 바라며 이경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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