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딴 계약-49화 (49/83)

49화

“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

이경을 안은 재하가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나라서 가능했다는 말.”

“네?”

“또 해 보라고.”

재하가 이경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기대감으로 재하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경이 조금은 한심한 눈빛으로 보자 재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심한 얼굴로 보지 말고, 또 해 보라고. 듣고 싶어서 그래.”

“서 전무님이라 가능했습니다.”

이경은 재하를 보며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이 말이 너를 좋아한다는 말도 아닌데 또 듣고 싶어 하는 재하가 살짝 짠해졌다.

“다른 남자였으면 불가능했다는 거지?”

“네.”

“황 비서가 제안했으면 따귀 때렸을 거지?”

재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따귀를 때리지는 않았겠지만 거절은 했을 테니, 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어. 따귀를 올려붙이라고.”

진지하게 따귀를 때리라고 하는 재하를 이경이 다시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황 비서님은 그런 제안 안 할 텐데.

“모르는 웬 미친놈이 제안했으면 급소를 차 버렸겠다는 말이지?”

역시 급소를 차지는 않았겠지만 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잘했다는 듯 이경의 머리도 쓰다듬었다.

“윤성현이었으면…… 아니다. 말하지 마.”

성현의 이야기를 꺼낸 재하는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재하의 입에서 나온 성현의 이름에 이경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재하가 성현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서 전무님이라 가능했다는 말이 서 전무님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편한 마음에 이경은 저도 모르게 재하의 들뜬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씨…… 알아! 나도 잘 안다고!”

욕을 삼킨 재하가 벌컥 화를 냈다.

저 성질머리 어디 안 가지. 이경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런 제안을 주신 게 서 전무님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하, 사람을 가지고 노네, 차이경.”

재하가 한숨을 내쉬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이경과 눈을 맞추었다.

“난 늘 차이경한테 놀아나고. 근데 기분은 그렇게 안 나빠.”

재하가 이경의 턱을 살짝 잡고 아래로 내려 입을 벌어지게 했다. 그러고는 바로 이경에게 입을 맞추었다.

재하의 말캉한 입술이 닿고, 깊은 호흡이 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신 이경을 재하가 헤집기 시작했다.

재하의 손이 이경의 허리를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재하와 몸이 밀착된 이경은 저도 모르게 재하의 등으로 손이 올라갔다.

“날 계속 가지고 놀아, 차이경. 놀아나고 싶어, 너한테.”

잠시 입술을 뗀 재하가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바로 다시 입술을 겹쳤다.

입맞춤이 짙어지고, 재하의 몸에 떠밀려 이경의 등이 캐비닛이 닿았다. 재하의 등을 쓰다듬던 이경의 손이 그의 머리와 목덜미로 올라가고, 서로의 몸은 더욱 가깝게 밀착되었다.

재하가 입술을 떼고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재하에게 풀려난 이경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일찍 퇴근할까?”

재하가 이경의 입가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며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이경은 잠시 말없이 재하를 올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래, 알았어. 일해, 차이경.”

이경을 품에서 풀어 주고, 재하가 흐트러진 이경의 옷을 정돈해 주었다. 커다란 손으로 뺨을 한번 쥐어 보고는 재하가 사무실을 나갔다.

재하가 나가고 이경은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고 있는데,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퇴근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네.”

카메라로 시선을 주었던 이경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왠지 재하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라 머쓱하고 민망했다.

—난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재하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경은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결국 그날, 이경과 재하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퇴근했다.

***

재하의 허리를 타고 앉았던 이경이 그의 품으로 축 늘어졌다. 그런 이경을 끌어안고 재하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경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한동안 그 상태로 이경을 안고 있던 재하가 몸을 돌려 자세를 바꾸었다. 이경을 똑바로 눕히고 제 몸을 빼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고 재하가 허리를 숙여 뺨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제 몸을 정리하고, 흔적이 가득 남은 이경의 몸을 티슈로 닦아 주기 시작했다.

“제가…….”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던 이경이 얼른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재하의 팔목을 잡았다.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이경의 모습에 재하가 입가를 올리고 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가만히 있어.”

“제가 하겠습니다.”

이경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말 꽤 안 들어.”

재하는 이경에게 입을 맞추었다. 진하게 입을 맞추면서도 몸을 닦아 주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이경의 몸을 닦아 주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옆에 누웠다. 누운 후에도 계속 이경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다시 재하의 몸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음.”

그게 예의 없게 이경을 찔렀는지 이경이 옅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이경은 어이없다는 듯 재하를 보았지만 이경이 그럴수록 재하의 몸은 더 단단해졌다. 하지만 재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아직도 하경이 만나면 안 돼?”

“……하경이요?”

이경의 눈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캠핑 같은 거 하고 싶대. 미국 가기 전에 잘 다녀오라는 선물 같은 거 하고 싶어.”

하경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두 달 후로 잡힌 수술 날짜 때문에 한 달 후에는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경은 싫어하는 눈치지만 재하는 하경과 여전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하경에게서 이경이 좋아하는 것들을 캐내기도 하고, 이경을 차지하고 있을 때면 혼자 있을 하경에게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경의 얼굴에 잠시 망설이는 빛이 떠올랐지만 결국 허락을 해 주었다.

재하는 이경의 허락이 기뻐 숨이 막히도록 이경을 끌어안았다. 예쁜 게 예쁜 짓만 한다더니, 딱 차이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별거 아닌 이경의 말에도 재하는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갔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이경의 말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기분이 주식이라면 개잡주라고 욕을 백만 번 얻어먹을 것이었다.

“숨 막힙니다. 그리고 거슬립니다.”

이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재하를 밀어냈다.

“차이경이 데리고 산다는 조건으로 잘라도 좋아.”

“자르긴 뭘 자릅니까. 그냥 두십시오.”

어이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예뻐 재하는 입가가 한없이 올라갔다.

요즘 이경은 재하에게 웃음을 자주 보였다. 성현에게만 나눠 주던 웃음을 제게도 나눠 주니 재하는 이경이 웃을 때마다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긴, 차이경이 좋아하는 건데 자르면 안 되지.”

“제가 좋아하긴 뭘 좋아합니까.”

정색하며 말하는 얼굴이 빨갛다. 왜 예쁘고 난리야. 예의 없는 놈, 더 날뛰게.

“그래, 싫어하는 거로 해 줄게. 싫어하는 거 맛이나 한번 더 봐.”

재하가 이경의 위로 올라가며 귀에 속삭였다.

이경이 뭐라 말하려던 것을 재하가 바로 입술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 재하는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차이경이 제 물건은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이경에게 자신을 맛보이고, 늦은 밤이 되어 재하는 이경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이경을 잡아 다시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참았다.

결혼하자고 협박할까, 잠깐 미친 생각을 하며 재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한 재하는 목이 말라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가까워질수록 옆에 붙어 있는 다이닝 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물을 컵 가득 따라 다이닝 룸으로 향한 재하는 삐딱하게 서서 입가를 올렸다. 석호와 은혜, 그리고 주환이 다이닝 룸에서 회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단란한 세 가족의 한때였다.

“형.”

주환이 재하를 먼저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재하는 대답 없이 물을 마셨다. 석호와 은혜의 고개가 재하 쪽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차례로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 가족, 행복해 보입니다.”

“왔니?”

은혜가 쌀쌀맞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영감님은 나 이 꼴 보라고 부득부득 본채에서 살게 하나 보네.”

재하가 석호와 눈을 맞추며 빈정거렸다.

“형, 이리 와서 앉아. 같이 술 한잔해. 방어가 달아. 살살 녹아.”

주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하에게 이리 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늦었으니 이만 자자. 당신도 일어나.”

하지만 재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혜도 몸을 일으켰다. 주환은 난감한 얼굴로 재하와 석호를 번갈아 보았다.

재하는 석호의 행동에 입가를 올렸다. 어쩜 저렇게 안 변할까. 한결같은 석호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석호는 재하를 지나쳐 다이닝 룸을 나가는 동안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누가 보면 원수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차가웠다.

“주환아, 얼른 와.”

석호가 다이닝 룸을 나갔는데도 주환이 버티고 서 있자 은혜가 주환의 손을 잡았다. 은혜가 주환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재하는 조금 전 석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달다는 방어회 한 점을 손으로 집어 먹고, 남은 위스키를 병째로 마셨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은 재하는 텅 비어 있는 넓은 식탁을 우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