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했을 거예요. 다른 남자와는. 서 전무님이라 가능했습니다.”
정답을 골라낸 이경이 재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네. 차이경 여우야.”
한숨과 함께 재하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경을 보는 재하의 눈빛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기쁨과 안도감, 설렘, 들뜸.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습니까? 여우 쪽보다는 곰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왜?”
재하가 손을 뻗어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곰 정도는 되어야 호랑이 같은 서 전무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경, 곰이 아니라도 네가 이겼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멈추고, 재하가 이경과 입술을 맞물렸다.
부드럽게 빨아들이다 혀를 얽었다. 머리를 쓰다듬듯 이경의 혀를 쓰다듬으며 재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혀와 손을 분주하게 놀리던 재하는 샤워 가운을 벗고 맨몸으로 이경과 부딪혔다.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온몸에 닿고, 이경은 다시 한번 온몸을 지배한 쾌락에 신음했다.
“두 번째지만 아플 수가 있어.”
아래에서 헐떡이는 이경을 내려다보며 재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좀 크잖아. 너도 알겠지만.”
중얼거리듯 말하고 재하가 이경에게 몸을 들이밀었다.
“아.”
그때와 비슷한 아픔에 이경이 움찔하며 재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 풀어. 괜찮아.”
달래듯 말하고 재하가 이경과 입술을 겹쳤다.
천천히 재하의 몸이 움직였다. 아픔이 가시고 그 자리에 모든 걸 내어 주어도 좋을 쾌감이 자리했다.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그 밤 내내 이경은 재하의 품에서 흐느끼고 몸을 떨었다.
그렇게 며칠간의 전쟁은 이경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털모자를 쓴 예준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모습을 성현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빠, 나 잘 타지?”
자전거를 세운 예준이 성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유설은 아이가 자신을 닮지 않아 더 정이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성현은 생각이 달랐다. 예준이 웃을 때면 누구보다도 유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언제 이렇게 늘었어?”
“매일 탔어. 이모가 안 된다고 해도 매일 탔어.”
예준이 자전거에서 내려 성현에게 달려와 푹 안기며 말했다.
성현은 예준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옆자리에 앉혔다. 자전거 헬멧을 벗겨 주고 땀에 젖은 머리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이제 그만 타고 점심 먹으러 가자.”
성현이 예준에게 물통을 건네주며 말했다.
“응, 아빠.”
예준이 물통에 연결된 빨대를 쪽 빨고 대답했다.
피자가 먹고 싶다는 예준을 데리고 성현은 피자 가게로 향했다. 예준이 좋아하는 피자와 파스타를 시켜 주고, 맛있게 먹는 걸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 먹었다!”
포크를 내려놓은 예준의 얼굴에는 소스가 범벅이었다.
성현은 그런 예준의 얼굴을 티슈로 닦아 주었다. 장난을 치느라 예준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예준아.”
가만히 있으라고 이름을 부르자, 예준이 뭐가 웃긴지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었다. 성현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음식점에서 나와 성현은 예준을 어린이 실내 놀이터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예준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놀았다.
신나게 놀았는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예준은 잠이 들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현은 유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앞인데 예준이가 잠들었어. 내가 데리고 올라갈게.”
—다른 남자랑 있을까 봐 친절하게 전화도 다 주고.
“비꼬지 말고. 지금 올라가.”
성현은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렸다. 예준을 안고 유설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유설이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슬립을 입고 나이트가운을 걸친 유설에게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예준이 깨울 수 없어서. 미안.”
성현은 유설에게 사과를 하고 예준을 안은 채 집으로 들어섰다. 열려 있는 방으로 들어가 예준을 침대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에서는 유설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거실 테이블에는 누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새로 준비를 한 건지 잔이 두 개였다.
“앉아. 와인 한잔하고 가.”
유설이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생각 없어.”
“당신, 차 변호사 좋아하지?”
“뭐?”
“당신 라이벌은 서재하 전무고?”
유설이 와인만큼이나 붉은 미소를 흘렸다.
굳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는 성현의 모습에 유설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입에서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유설이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결국 성현은 코트를 벗고 유설의 옆자리에 앉았다.
“목석같은 게 당신 매력이었는데, 차 변호사 앞에서는 그 매력이 반감되더라. 아주 절절하게 매달리던데?”
“…….”
성현이 가만히 유설을 보았다. 그러자 유설이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들었거든. 당신이 차 변호사한테 한 말.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어도 차 변호사가 좋다는 말.”
“예준 엄마.”
“뭐야, 그 표정? 바람피우다가 들킨 남자처럼.”
유설이 까르르 웃었다. 시원하게 웃고는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예준 엄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성현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성현의 말에 잠시 얼굴이 굳어졌던 유설이 아하하하,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차 변호사는 이미 서 전무한테 간 거 아닌가.”
“서 전무 장난에 차 변호사가 걸려든 것뿐이야.”
성현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에 웃고 있던 유설의 얼굴에 금이 갔다. 깨진 웃는 낯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성현에게로 향했다.
“장난인지 사랑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장난이길 바라는 거 아니고? 당신 자존심 없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상상 이상이네. 다른 남자랑 놀던 여자면 다 좋아? 자기, 그런 거에 흥분해?”
“……내가 예준 엄마한테 흥분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유설을 가만히 보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짓뭉개 버리는 유설에게 성현은 염증이 났다. 다른 사람 감정은 생각하지 못하고 질러 버리는 그 성격에 넌더리가 났다.
유설은 성현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던 유설이 몸을 기울여 성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성현이 유설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떼어 냈다.
“늘 예준 엄마가 먼저 시작했어. 지금처럼. 난 당신 민망하지 않게 받아 준 것뿐이고.”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입었다.
“내가 민망하건 말건 안 받아 주는 건 차 변호사 때문이야? 아니면 우리가 이혼해서? 더는 부부가 아니라서?”
“예준 엄마 덜 상처받는 쪽으로 생각해.”
성현이 소파에 앉아 있는 유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이경 때문이네. 당신이 차 변호사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유설은 현관으로 향하는 성현의 뒷모습을 보며 악에 받친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도 성현이 돌아보지 않자 유설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당신처럼 야망이 넘치네. 없는 것들은 자기한테 온 기회 잘 안 놓쳐. 당신도 그랬잖아. 당신 야망, 그 야망 채워 줄 기회 안 놓치고 잡았잖아.”
“…….”
쏟아지는 유설의 말에 성현이 굳은 얼굴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유설의 얼굴이 보였다. 유설은 늘 저런 식이었다. 남에게 상처 주기 위해 제 상처마저 헤집는 미련한 사람.
“차이경도 당신이랑 똑같아. 야망에 차이경 변호사 눈이 돌았는데 당신 같은 게 보이기나 하겠어? 당신이랑 서 전무랑 비교가 돼?”
“…….”
유설의 말을 들으며 성현이 뚜벅뚜벅 그녀에게 걸어갔다.
“차이경 눈 뒤집혀서 서 전무한테 달려들겠지. 당신이 청승 떨고 있는 지금도 서 전무 열심히 만져 주고 있을걸? 이래서 없는 것들이 천박하다는 거야.”
“김유설.”
유설의 앞에 선 성현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내 앞에서 그따위 표정 짓지 마.”
“차 변호사, 나랑 달라. 지금 서 전무 옆에 있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다 그럴 만한 사정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성현이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고 경고하듯 말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어.”
“넌 평생 모를 거야.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잡고 싶지 않은 손도 꾸역꾸역 잡아야 하는 그 심정을.”
“나랑 예준이 손 잡은 거 후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돼?”
유설이 소파에서 일어나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으로 유설이 성현을 쏘아보았다.
“너 알아서 생각해. 무슨 말을 해도 원하는 대로 꼬아 듣는 게 김유설 특기잖아.”
성현이 지친다는 얼굴로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유설은 멀어지는 성현의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와인을 모두 마셨다. 와인만큼이나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경이 고개를 들었다. 재하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 전무님.”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하가 다소 능글맞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무슨 일로?”
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은 왜 잠가.
“차이경.”
“네.”
다가오는 재하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경이 대답했다.
이경의 앞에 선 재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약간은 어설픈 동작으로 이경을 끌어안았다.
“왜 이러십니까?”
재하의 품에 안긴 이경이 눈을 느리게 끔벅였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럴까.
“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
이경을 안은 채로 재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