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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47화 (47/83)

47화

이경의 입안에 씁쓸함이 고였다. 서재하 계약서 참 좋아하네. 그냥 노는 여자랑도 계약서를 쓰고, 약혼하는 여자하고도 계약서를 쓰고.

언제는 내가 좋다면서, 사랑해 달라면서.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기 약혼 계약서 공증이나 하게 하고.

또라이인지 양아치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나쁜 놈인지. 계약서를 쥔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꼼꼼하게 살펴봐, 차이경. 나한테 불리한 건 없는지.”

계약서를 살피는 이경을 힐끔 보며 재하가 말했다.

계약서에 시선을 두고 있어 이경은 재하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재하는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이없어서, 진짜. 이봐요, 서재하 씨. 서재하 씨가 만들어서 보낸 계약서잖아. 불리하면 내가 불리했지.”

“변호사 통해서 만든 게 아니라서.”

재하가 세연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계약서 깔끔합니다. 지금 공증 진행할까요?”

이경이 테이블에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속마음은 무표정한 얼굴에 숨기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뭘 해?”

재하가 사나운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이경이 재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공증이요. 그러라고 저 데려오신 거 아닙니까?”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게 무슨 계약인지 몰라?”

재하가 화가 난 얼굴로 성질을 부렸다.

이경은 화를 내는 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이런 짓을 시킨 건 자기면서 왜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차 변호사한테 왜 성질은 부리고 그래?”

세연이 재하를 정말 미친놈 보듯 보았다.

재하는 세연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고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정말 성세연이랑 약혼해?”

“제가 관여할 일 아닙니다.”

이경이 재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차이경.”

“…….”

“넌 기어이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걸 보겠다 이거지?”

재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세연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재하를 보는 세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세연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재하가 내민 계약서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내팽개치듯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물을 마셨다.

“야! 서재하!”

세연은 컵을 쾅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귓구멍 안 막혔어.”

“어~ 그런 거였어? 변호사가 아니라 여자네.”

세연이 계약서를 말아 쥐고 이경을 가리켰다. 어이없어, 중얼거린 세연이 계약서를 재하를 향해 집어 던졌다.

종이가 재하의 얼굴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질 더러운 거 봐라.”

재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세연을 보았다.

“유치해도 정도껏 유치해, 서재하. 나 이용해서 저 여자 질투심 유발이라도 하려고 그랬니? 와, 날 이용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세연이 씩씩거렸다.

“난 필요하면 누구든 이용해.”

재하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서재하가 지랄 맞은 새끼라는 건 내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지랄견일 줄은 몰랐지.”

“이제 알았겠네. 이 정도로 지랄 맞은 새끼인 거.”

“너도 다 알고 즐겼니?”

재하를 노려보던 세연이 이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나운 표정이 금방이라도 이경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 것만 같았다.

“…….”

이경은 아무 대답 없이 세연을 보았다.

서재하가 이런 또라이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세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짜증 나서 진짜. 감히 니들이 날 가지고 놀아?”

“널 가지고 논 건 나고. 차이경은 죄 없어. 내가 얘 좋아서 빌빌거리는 중이거든.”

재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세연에게 말했다.

“천하의 서재하가 여자가 좋아서 빌빌거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세연이 재하를 보았다.

“차이경 앞에서는 빌빌거리게 되네.”

“나 지금 엄청 자존심 상하거든? 우리 약혼했을 때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다정했으면 나 이경호 안 만났어.”

“꽃뱀한테 물려 놓고 왜 내 탓을 해?”

“서재하 씨!”

“거짓말도 적당히 합시다, 성세연 씨. 나랑 약혼하기 전부터 만났잖아.”

재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냥 알던 사이였어, 그때는.”

“그런 거로 해 줄게.”

“내가 당하고는 못 살아. 지난번 일까지 배로 쳐서 갚을게, 차 변호사. 저 지랄 맞은 새끼랑 어디 한번 잘 해 봐.”

세연이 차가운 얼굴로 이경에게 말하고는 가방과 코트를 챙겨 룸을 나갔다.

문이 쾅 닫히고, 이경이 재하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질투심 유발 작전.”

재하가 이실직고 대답했다.

엉뚱하고 유치한 재하의 대답에 이경이 힘없이 웃었다. 서재하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일까. 그는 내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도 만만치 않게 어려운 문제다.

“안 넘어오잖아, 차이경이.”

심술이 난 아이 같은 얼굴로 재하가 입을 열었다.

“유치합니다.”

“알아.”

재하가 빨개진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주워 북북 찢었다. 때마침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앞에 놓인 식전 빵과 샐러드를 보며 이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세연 씨 화 많이 났던데. 서재하 또라이 짓으로 괜히 불똥이 튈까 걱정이었다.

“성세연은 매일 말만 그래. 걱정할 거 없고, 설사 뭔 일 있어도 내가 알아서 해. 넌 신경 쓰지 마.”

“사고를 치셔 놓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면 제가 퍽이나 신경을 안 쓰겠습니다.”

이경이 차분한 말투로 재하를 비난했다. 오랜만에 이경은 재하의 누나로 태어나고 싶어졌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네가 신경 쓸 게 한두 개야? 이딴 건 신경 쓰지 말고 먹기나 해.”

재하가 식전 빵을 집어 이경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저도 먹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맛있게 빵을 먹는 재하를 보던 이경도 이내 그를 따라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 헛웃음 나게 하는 남자였다.

***

배불리 먹여 놓고 재하는 이경을 호텔로 데려왔다. 사고 친 얄미운 놈은 오늘도 전쟁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차이경이 오늘도 안 넘어왔으니까, 나는 차이경을 괴롭힐 생각이야.”

괴롭히겠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도 하는 재하를 보며 이경은 저 인간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나 싶었다.

“네에.”

“씻고 와. 나한테 괴롭힘당해야지.”

얄밉게 입가를 올린 재하를 물끄러미 보다 이경이 욕실로 향했다.

서재하 또라이, 서재하 양아치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이경은 수치스러운 시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이경은 짓누르는 재하의 아래서 신음했다. 재하가 입은 샤워 가운을 쥐고 신음을 흘렸다.

재하의 입술은 이경의 목덜미에 있었고, 손은 이경의 허리 아래에 있었다.

“으읏.”

재하의 손길에 절정으로 치달은 이경은 몸을 떨었다. 거친 호흡이 흔들리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숨을 헐떡이던 이경은 재하에게 길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손길, 그의 입술이면 몸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재하가 주는 쾌감이 너무나 커 이제는 수치스럽다는 생각조차 잘 들지 않았다. 그가 계속 만져 주었으면 좋겠고, 입을 맞춰 주었으면 좋겠다.

“어디 빨아 줄까? 이경아, 어디 빨아 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재하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이경은 눈을 뜨지 않고 재하의 샤워 가운만 힘주어 잡았다.

재하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리고, 이내 가슴을 깨무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아.”

신음을 터트리며 이경이 눈을 떴다.

재하가 혀로 희롱하는 신체의 감각이 날이 섰다. 흐읏, 흐느끼듯 터진 신음에 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고개를 든 재하가 이경과 눈을 맞추며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이경은 대답 없이 재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짓궂은 손길이 가슴을 건드렸다.

“아니면 여기인가?”

재하가 이경의 허리 아래를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 올렸다.

“아아.”

이경의 허리가 뒤틀렸다.

“여기? 응?”

재하가 이경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만.”

이경은 애원하듯 재하에게 매달렸다.

“응, 알았어. 해 줄게.”

이경을 괴롭히는 중이기에 재하는 하지 말라는 건 다 했다.

이경은 울음 섞인 신음을 터트리다 쾌락의 끝으로 떨어졌다.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은 세상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이경은 깊은 밤, 눈을 떴다. 잠에서 깨자마자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

재하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재하와 마주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재하가 아닌 다른 남자였어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떠오른 의문에 이경은 받아들였을 거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하경이 소중해도 차마 못 했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서재하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무슨 생각해?”

나지막이 울리는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이 입을 열었다.

“오늘도 서 전무님이 이기셨구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재하는 오늘도 제 욕구는 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관계를 제일 후회하고 있는 게 서재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차이경을 이겨. 너한테 빌빌거리긴 하지만.”

이경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좋아서 빌빌거린다면서 아득바득 이기는 건 뭘까 싶다. 그런 점이 서재하답기는 하다.

“웃으니까 예쁘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 전무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면 난 받아들였을까.”

웃으니까 예쁘다는 남자와 좀 더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서 유치한 짓도 서슴지 않는 이 남자가 오늘은 꽤나 귀여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경은 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 문제의 답은?”

“못 했을 것 같습니다.”

“…….”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했을 거예요. 다른 남자와는. 서 전무님이라 가능했습니다.”

여러 가지 보기 중 유일한 정답. 그 정답이 이제야 이경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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