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차이경이 나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노랫소리 같던 재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복도를 걷던 이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재하의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같아 어딘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이경은 재하를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픽 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굴 안쓰러워하는 건지.
생각을 떨쳐 버리며 사무실로 향하던 이경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연이 재하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서재하와 급이 맞는 상대. 서로 잘 맞는다고 재하에게 말한 건 본인이었으면서 정작 이경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이경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데 재하의 집무실로 향하던 세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결국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이경, 농땡이 부리지 말고 일해.
그때 재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퍼뜩 눈을 뜬 이경이 카메라로 시선을 주었다.
“감시하고 계십니까?”
—응.
“혼자 계세요?”
재하의 집무실로 향하던 세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경이 물었다.
—그럼 혼자지, 누가 더 있어?
“성세연 씨는…….”
이경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알았어? 걔 여기 온 줄? 나 감시해?
“화장실 다녀오다 봤습니다.”
감시는 무슨. 내가 자기인 줄 아나. 이경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성세연이 와서 신경 쓰여?
“어제 정말 성세연 씨와 아무 일 없으셨어요?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뭔지 여쭈어도 됩니까?”
은근슬쩍 이경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변호사로 묻는 거야? 차이경으로 묻는 거야?
“차이경 변호사로서 묻는 겁니다.”
—차이경, 나한테 넌 보기가 열 개가 있는 문제 같아. 근데 그 보기가 다 엿 같아. 어떤 것도 답이 아닌 것 같아.
“…….”
—답이 있기는 한 건지.
한숨처럼 이어진 뒷말에 이경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에 오류가 있지 않은 이상.”
—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문제가 잘못 출제되었을 가능성이 크죠.”
재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씁쓸함이 감도는 웃음소리에 이경은 마음이 불편했다.
—어려운 차이경, 일해.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재하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경의 불편한 마음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주말 오후, 겨울답지 않게 볕이 좋았다. 이경은 이불 빨래를 하고, 냉장고를 정리했다. 하경이 알짱거리며 돕겠다는 걸 거절하고 혼자 집안일을 다 했다.
하경이 효진의 집에 놀러 가고, 혼자 남은 이경은 무료한 얼굴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댔다.
처음 보는 드라마가 생각보다 재미있어 틀어 놓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전무님.”
재하의 전화였다.
—차이경, 바빠?
“아니요.”
바쁘지 않다 대답하며 이경은 벌써부터 무엇을 입고 나갈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됐네. 차이경 변호사가 필요해서.
“사고 치셨습니까?”
뭘 입고 나갈지 고민하던 이경은 바짝 긴장했다. 그냥 놀자는 게 아니라 변호사가 필요한 일이 생긴 건가.
—공증 필요해서 부르는 거야. 데리러 갈 테니까 5시까지 집 앞에 나와 있어.
“네.”
공증이 필요한 일이 뭘까 궁금했지만 이경은 묻지 않았다. 별 시답지 않은 일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이경은 외출 준비를 했다. 답지 않게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을 대 보고, 평소보다 공들여 화장도 했다.
늘 묶고 다니던 머리는 풀어 늘어트리고, 하경이 생일 선물로 사 준 그리 비싸지 않은 향수도 뿌렸다.
재하가 오기로 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나와 이경은 재하를 기다렸다. 집 앞에서 서성이며 재하를 기다리는데 5시가 조금 넘어 재하의 차가 앞에 섰다.
이경이 조수석 문을 열고 재하에게 꾸벅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서 전무님.”
“인사성 한번 지겹게 바르네.”
재하가 피식 웃으며 이경을 보았다. 의아함이 재하의 얼굴에 잠시 맺혔다가 바로 사라졌다.
이경은 얼른 조수석에 앉았다. 꾸미고 나온 것이 민망해졌다. 오버한 것 같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이경.”
“네? 네.”
재하가 부르는 소리에 움찔 놀라며 이경이 그를 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재하가 이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벨트 매.”
“아, 네.”
재하의 말에 이경은 안전벨트를 맸다. 왠지 모르게 실망한 이경은 창을 내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다 실망감이 드는 이유를 깨닫고 흠칫 놀랐다. 예쁘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재하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보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경은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재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가방을 뒤져 머리끈을 찾았다.
“저녁 먹으러.”
“공증은 정확히 어떤 걸…….”
머리를 묶으며 묻는데, 재하가 갑자기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이경의 머리로 손을 뻗어 머리끈을 풀었다.
“푸는 게 더 예뻐.”
머리끈을 돌려주며 재하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네에.”
그 말에 이경의 입가가 씰룩였다. 이경은 머리끈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웬일로 말을 잘 들어?”
이경이 머리끈을 집어넣는 걸 보며 재하가 피식 웃었다.
“공증할 문서 미리 살펴도 됩니까?”
이경은 재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변호사의 얼굴로 물었다.
“아니, 안 돼. 밥 먹고.”
“네.”
공증은 불러내기 위한 재하의 핑계라고 생각하며 이경은 미소와 함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한테서 왜 사탕 냄새가 나지? 예준이한테 사 줬던 솜사탕 냄새 같은 게 나는데.”
운전을 하며 재하가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경이가 사 준 향수 냄샙니다. 왜 안 뿌리냐고 하도 그래서…….”
지레 찔린 이경이 변명하듯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이경은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재하에게 잘 보이려고 향수를 뿌리고 나온 것도 민망했고, 비싼 향수가 아닌 로드 숍에서 파는 향수를 뿌리고 나온 것도 창피했다.
“이런 달콤한 냄새도 의외로 잘 어울리네.”
재하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이게 뭐라고 귀여운 건지. 나도 참 미친놈이지 싶다.”
재하가 힐끔 이경을 보았다.
“원래도 약간은 그러셨습니다.”
“그래, 계속 그렇게 기어올라. 차이경은 그게 매력이야.”
“네.”
이경은 깔끔하게 대답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것도 모른 채.
재하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이경을 데려갔다. 지배인이 빼 준 의자에 앉으려는데 재하가 자기 옆자리 의자를 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
“네?”
“올 사람 있어.”
재하의 대답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재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올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하던 이경은 설마 하는 생각에 재하를 쳐다보았다.
“왜? 뽀뽀하자고?”
지배인이 따라 준 물을 마시며 재하가 말했다.
이경은 지배인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재하를 살짝 노려보았다.
“누가 오는 겁니까?”
“누굴 것 같아?”
재하가 컵을 내려놓고 이경을 보았다.
“윤 변호사님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윤성현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야? 젠장, 더럽게 절절하네.”
심술 맞은 표정으로 재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남아 있는 물을 마저 비웠다.
지배인이 다시 물을 따라 주는데 세연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세연의 등장에 이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성현만큼이나 이 자리에 함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참 이러고 싶을까, 서재하는.”
세연이 재하의 맞은편에 앉으며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오늘도 예쁘시고.”
재하가 세연을 보며 입가를 올렸다.
웃으며 세연에게 예쁘다고 하는 재하 때문에 이경은 기분이 상했다. 재하의 말대로 세연이 오늘도 예뻐 더 속이 상했다.
“하, 예쁘다는 소리를 다 하고. 재하 씨 뭐 잘못 먹었어?”
“손발이 안 맞아.”
재하는 삐딱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없이 불량한 태도로 앉아 재하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차이경은 내가 먹는 거로 먹어.”
“네.”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않는 재하에게 대답을 해 주고 이경이 힐끔 세연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세연이 제 머리 근처에서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다. 서재하 또라이라는 소리였다.
세연의 행동에 이경이 쿡 웃었다. 메뉴판을 보던 재하의 시선이 이경에게 닿았다.
“둘이 그렇게 웃음 주고받을 사이 아닌데.”
재하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난 뒤끝 별로 없거든.”
세연이 메뉴판을 지배인에게 건네며 주문을 했다.
“그래?”
“뭐, 그리고 잘 지내면 좋잖아? 어차피 재하 씨랑 결혼하면 차 변호사 나도 자주 볼 텐데. 내 일도 맡기고. 영리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네 일을 차 변이 왜 해? 차이경은 내 변호사야.”
“좋은 것 좀 나눠 쓰지?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자신감 하나는 그 콧대만큼 높네.”
재하가 빈정거리듯 말하고 주문을 했다. 메뉴판을 챙겨 지배인이 나가고 룸이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경은 어차피 결혼할 사이라는 세연의 말을 곱씹었다. 그 말에 재하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가 보다.
“밥 먹기 전에 공증부터 받자.”
세연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계약서? 이경이 의아한 얼굴로 세연과 재하를 번갈아 보았다. 재하가 말한 공증이라는 게 이건가 보다. 세연과 무슨 계약을 한 걸까.
“성격 급하시기는.”
재하가 세연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 이경에게 건네주었다. 이경은 재하가 내민 계약서를 가만히 받아 들었다.
“서로 사인만 하면 되는데 뭘.”
“배고파. 밥 먹고 해.”
“아직 음식 나오지도 않았어.”
세연과 재하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이경은 계약서를 살폈다. 재하와 세연의 약혼 합의 계약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