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재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 있냐는 표정으로 보는 재하에게 이경은 입을 뻐끔거리다 말을 꺼냈다.
“사고 치지 마십시오.”
“사고를 쳐야 차이경이 달려올 텐데. 일찍 들어가. 다른 길로 새지 말고.”
재하는 작게 웃고는 사라졌다.
서 전무님이나 다른 길로 새지 마십시오, 그 말은 가슴속에 묻어 두고 이경은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들어가는 거라 이경은 하경에게 미안해졌다. 계속 새벽에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하경의 얼굴을 며칠째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하경이 저녁을 잘 먹고 있는지 챙기지도 못했다. 하경에게 미안했고,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경아, 언니 왔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이경은 반겨 주는 하경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재하 아저씨 말이 맞네.”
하경은 헤헤 웃으며 이경의 팔짱을 끼었다.
“응?”
하경의 입에서 재하가 나오자 이경이 의아한 얼굴로 동생을 보았다.
“재하 아저씨가 오늘은 언니 빨리 보내 준다고 했거든. 그동안 많이 부려 먹어서 오늘은 쉬게 해 준댔어.”
“서 전무님이랑 연락했어?”
이경이 심각한 얼굴로 하경을 보았다.
“나 재하 아저씨랑 친해. 빨리 와 봐, 언니. 재하 아저씨가 오늘은 평양 온반 보내 줬어. 북한 음식이래.”
하경이 이경을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평양 온반이 놓여 있었다.
“방금 왔어. 빨리 먹자, 언니.”
하경의 성화에 이경은 식탁에 앉았지만 얼떨떨했다. 식사를 시작하는 하경을 보다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이 계속 음식 보냈어?”
오늘은 평양 온반을 보내 주었다는 말이 걸렸다.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응, 언니 야근하는 동안 나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저녁 계속 보내 줬어. 어제는 차돌 비빔밥 보내 줬고, 엊그제는 스테이크. 다 맛있어, 다.”
하경은 신이 난 얼굴로 종알거렸다.
하경의 얘기에 이경은 심란했다. 나도 못 챙겼던 하경의 저녁을 서 전무님이 계속 챙겨 주고 있었다.
“헤헤, 언니랑 같이 먹으니까 너무 좋다.”
“천천히 먹어, 하경아.”
“와, 이것도 맛있어. 언니, 평양 온반 먹어 봤어?”
“아니.”
눈을 반짝이는 하경을 보며 이경이 미소를 지었다.
서재하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마냥 좋아할 수도, 마냥 싫어할 수도 없는 사람.
재하에게 이경이 어렵듯, 이경에게도 재하가 어려웠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재하가 세연과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
재하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노란 술이 잔에서 찰랑거렸다. 재하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에게 그것을 밀었다.
“바빠 죽겠는데. 술은 너 혼자 마시면 안 되냐?”
“술을 혼자 무슨 재미로 마셔, 새끼야.”
재하의 말에 준오가 웃으며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너 때문에 중요한 일을 못 했잖아.”
재하가 술잔을 쥐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가 무슨 일을 한다고. WR 말아 먹는 게 네 목표잖아.”
“우리 영감님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소리 한다.”
재하가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너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까칠해? 진짜 일 열심히 하는 거야?”
“그런 게 있다.”
준오의 말에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까칠한 이유 잘 알지. 욕구 불만. 그거 말고 뭐가 또 있겠어. 재하는 술을 마셨다.
이경과 하는 전쟁이 즐겁기는 하지만 과도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선을 긋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경이 미워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같이 벌을 받고 있었다.
재하는 그날 밤을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이경을 가진 것이 내내 후회스러워 다시는 이경에게 제 욕망을 풀어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경을 볼 때면 그 다짐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슬슬 이 전쟁도 끝을 내야지, 이러다 또 그 개새끼가 튀어나올 것 같다.
“뭘 실실 쪼개냐?”
이경을 생각하며 웃는 재하를 준오가 구박했다.
“왜? 잘생겼냐?”
“미친놈.”
준오는 픽 웃으며 술을 마셨다.
“반하지 마라. 피곤하다.”
“돌은 새끼.”
“보고 싶네.”
재하가 이경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하준오 한 대 치고 차이경 부를까. 재하가 준오를 빤히 보았다.
“누가?”
“사랑받고 싶어.”
재하가 술잔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소름 끼치잖아, 새끼야.”
재하의 말에 준오가 넌더리를 쳤다. 그렇게 흉측한 얘기는 처음 들어 봤다는 얼굴로 준오가 재하를 보았다.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묻지 마. 미친놈아.”
“질투심을 좀 자극해 볼까.”
술을 마시며 재하는 세연이 찾아왔을 때 보았던 이경의 표정을 생각했다. 분명 동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내 착각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딴 말 하지 마. 소름 끼쳐.”
“젠장, 더럽게 어렵네.”
재하는 술을 비우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더럽게 어려운 그 여자가 보고 싶었다.
***
늦은 밤, 이경은 수건을 개고 있었다. 하경은 일찌감치 잠이 들었고, 잠이 오지 않는 이경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했다.
덜 마른 수건을 드라이기로 말려 개다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손을 멈추었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재하였다.
“네, 서 전무님.”
이경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빠르게 전화를 받은 이유가 재하가 사고를 쳤을까 걱정이 된 건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숨어든 건지 이경은 알 수 없었다.
—차이경, 어디야?
“집입니다. 사고 치셨습니까?”
이경의 물음에 핸드폰을 타고 재하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지막이 퍼지는 재하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느끼며 이경이 말을 이었다.
“서 전무님은 어디십니까? 제가 가야 합니까?”
재하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의식도 못 하고 이경이 물었다.
—응, 이리로 와.
술에 취했는지 재하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어디십니까?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귀신의 집. 내려와.
“……저희 집 앞이요?”
—응.
전화가 뚝 끊어졌다.
이경은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하다가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고 코트를 입은 뒤에야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공동 현관 옆 나무에 재하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을 감고 있는 재하의 얼굴을 달빛이 비추었다.
말 안 듣는 또라이 서재하가 예쁘다고 생각하며 이경이 다가섰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지 재하가 눈을 떴다.
“차이경이다.”
재하는 이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년 같은 싱그러운 웃음에 이경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술 많이 드셨습니까?”
“응.”
재하가 몸을 바로 하고 이경의 앞에 섰다. 몸을 바로 하니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큰 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경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재하가 바로 이경의 팔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술 냄새가 확 풍겨 이경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술 냄새가 독하게 날 정도로 세연과 마신 건가.
“사고 치신 건 없습니까?”
이경은 재하의 눈을 보지 않고 물었다.
“있다면?”
“폭행입니까?”
“아니.”
“음주 운전은…… 아니시네요.”
주변을 둘러보며 재하의 차를 찾던 이경이 운전석에 운전기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나 그렇게 쓰레기 아니라니까.”
“죄송합니다.”
이경이 시선을 들어 재하를 보았다.
“남녀 문제.”
“…….”
재하를 보는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면 어떡할래?”
“성세연 씨와의 문제입니까? 의뢰인의 애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정말?”
재하가 엄지로 이경의 입술을 쓸며 물었다.
나른한 말투와 느른한 동작에 이경은 몸에 힘이 들어갔다.
“네.”
“내 변호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말씀입니까?”
“성세연이랑 다시 약혼하는 거.”
“…….”
“할까?”
“…….”
“하지 마?”
이경이 계속 말이 없자 재하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네 의견을 말해 봐.”
“……서로 잘 맞는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내뱉는 이경의 입이 썼다.
“그게 차이경 의견이야?”
재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네.”
“상처받는다고. 내가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재하는 한숨을 내쉬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삐딱하게 선 채로 재하는 한동안 가만히 이경을 바라보았다.
“두 분은 급이 맞는 상대니까요.”
이경이 재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역시 차이경은 속물이야. 급 따져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속물인데 귀엽네.”
재하가 웃음소리를 냈다.
깊은 밤을 헤치고 재하의 웃음소리가 맑게 퍼져 나갔다.
“이경아.”
나직하게 불린 이름에 이경이 고개를 들어 재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좀 좋아해 줘.”
“…….”
“나 좀 사랑해 줘, 이경아.”
한숨 소리 같은 음성이 이경의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하지만 이경은 마음을 건드리는 소리를 외면했다.
“좋아해 주고 사랑해 줄 사이, 아니잖아요.”
겨울밤만큼이나 냉정한 말이었다. 이경은 슬픈 미소가 떠오른 재하를 바라보았다. 겨울 달만큼이나 그의 미소가 시렸다.
“난 개새끼니까?”
“…….”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차이경이 나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재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목소리가 꼭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슬픈 노래 같아 이경은 마음이 아렸다.
“표정 보니 안 해 주겠네.”
재하가 픽 웃으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이경의 머리와 뺨을 한 번 쓰다듬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들어가.”
재하가 그대로 이경을 지나쳐 자동차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경은 멀어지는 재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재하가 몸을 실은 차가 멀어졌다.
재하는 떠났지만 이경은 쉽게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재하의 마지막 모습이 못이 되어 마음에 박혀 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