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왜 또!”
한계였다. 이경은 몸을 일으켜 앉아 재하를 노려보았다.
오늘도 재하 앞에 벌거벗겨져 있다. 양아치 서재하는 넥타이까지 제대로 하고 있었고.
“왜 자꾸 이러십니까?”
벌써 며칠째, 재하는 퇴근 후 바로 이경을 호텔로 데려왔다. 룸서비스로 밥을 먹이고 지난번처럼 이경을 쾌락으로 물들였다.
그러면서 끝까지 제 욕정은 풀지 않았다. 계속 이경만 신음하게 했다.
“내가 뭘?”
“조롱하지 마십시오.”
“조롱?”
이경의 말에 재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롱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재하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롱이 아니면 뭡니까? 계속 희롱하시잖아요.”
“너 즐겁게 해 주는 거잖아.”
“그러니까 왜 저를요! 서 전무님 즐겁자고 절 사셨으면 용도에 맞게 쓰십시오.”
이경이 항의하듯 말했다.
“말본새 봐라. 내가 널 돈 주고 샀어?”
“그럼 아닙니까?”
“내가 진짜 가지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면서.”
재하는 인상을 쓰며 이경의 목덜미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거칠게 입을 맞추며 이경을 다시 침대로 쓰러트렸다.
이경은 재하의 입맞춤을 받아 내며 그의 몸을 더듬어 넥타이핀을 빼냈다. 넥타이를 풀어 버리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손버릇.”
입술을 뗀 재하가 이경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꼭 서 전무님 벗길 겁니다.”
“그래, 어디 해 봐.”
피식 웃으며 재하가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재하의 표정에 오기가 난 이경은 재빨리 재하의 셔츠를 벗겨 냈다. 탄탄한 재하의 몸이 드러나고 이경은 그의 벨트에 손을 댔다.
한순간 재하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경은 보란 듯이 재하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겨 냈다.
몸에 브리프만 남겨지자 이경은 잠시 망설였다.
“왜? 못 하겠어?”
픽, 재하가 이경을 비웃었다.
자존심이 상한 이경은 재하의 브리프에 손을 댔다. 브리프를 내리자 그의 것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게 이경이 할 수 있는 최대였다. 이경은 재하에게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붉어진 이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벗어 줄게. 그게 차이경 소원이라면.”
재하가 브리프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브리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경이 다시 재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제야 밸런스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서재하도 차이경도 벗었으니 덜 수치스러웠다.
“네 소원대로 벗어 줬어.”
“이제 하십시오.”
“뭘?”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 되묻는 게 얄미워 이경이 그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눈싸움을 했다.
후끈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무거운 분위기를 끝낸 건 이경이었다. 오늘만큼은 서재하에게 농락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경이 재하의 목덜미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재하가 입맞춤에 응하며 이경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진한 호흡이 오고 가고, 이경이 재하의 가슴을 더듬었다.
이경의 입맞춤을 받아 주던 재하가 이경을 떼어 냈다. 정염이 깊게 박힌 눈동자로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요부처럼 굴기로 한 거야?”
“계속 절 모욕하시니까요.”
“모욕은. 차이경 즐거우라고 봉사한 사람한테.”
“봉사가 아니라 농락이죠.”
이경이 재하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다시 입을 맞추려고 다가가자 재하가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차이경.”
꽤나 즐거운 얼굴로 말하는 재하가 얄미웠다. 이경은 재하와 입술을 맞물며 그를 천천히 침대로 밀었다.
순순히 침대에 누워 준 재하에게 여전히 입을 맞추며 이경은 그의 몸을 더듬었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은 없었다. 이경은 어설픈 손길로 재하의 가슴을 더듬기만 했다.
“차이경, 시시해.”
재하가 커다란 손으로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재하를 보았다. 시시하다는 말에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사이 재하가 이경의 가슴을 쥐었다. 가슴의 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손길에 이경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는 돼야지.”
재하는 웃으며 이경의 허리 아래로 손을 내렸다.
자극을 가해 오는 재하의 손길에 이경의 허리가 비틀렸다. 이경은 다급하게 재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아, 흣.”
서재하, 나쁜 놈. 오늘도 나를 농락하고 조롱할 생각인가 보다. 이경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재하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이긴 것 같지? 응?”
재하가 나른한 목소리를 흘렸다.
재하의 팔을 잡은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이경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차이경은 그냥 받아들여. 너는 나 못 이겨.”
재하가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싫습니다.”
이경이 고개를 들어 재하를 보았다. 네가 하면 나도 할 거야. 이경의 손이 재하의 허리 쪽으로 내려갔다.
재하의 치골을 쓰다듬고 빳빳해진 그의 몸을 손으로 쥐었다.
“씨…… 하아. 차이경.”
욕을 삼키며 신음을 흘린 재하가 이경의 손을 떼어 냈다.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참아 내며 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온 재하가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이경은 재하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 다시 나타난 재하의 몸은 안정이 되어 있었다.
“비겁하십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경이 다가오는 재하를 보며 말했다.
“차이경, 제법이야.”
재하가 이경의 턱을 한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재하는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들었다.
“또 묶으시게요?”
“네 손버릇이 점점 나빠지잖아.”
“비겁하고 졸렬하고 치사합니다.”
이경은 재하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며 말했다. 손을 안 쓰면 서재하를 어떻게 이겨.
“난 원래 개새끼고.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표정으로 재하가 이경을 보며 넥타이로 손목을 묶었다.
“잘 알죠.”
“그러니까 얌전하게 즐겨, 차이경. 성실하게 봉사해 줄 테니까.”
재하가 이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자세로 이경의 허리를 팔로 감더니, 배에 입을 맞추었다.
흠칫한 이경이 벗어나려고 하자, 재하는 단단하게 이경의 허리를 옭아맸다.
재하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 후로 이경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하가 하는 짓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음을 터트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날도 이경은 결국 축 늘어져 재하의 품에 잠이 들었다. 승자는 누가 봐도 서재하였다.
***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며 이경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제도 재하와 전쟁을 치르느라 피곤했다.
서재하는 보통 독한 게 아니었다. 그 몸을 하고서도 절대 욕구를 풀지 않았다.
재하를 곱씹던 이경은 어느새 성현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재하와 계약을 한 이후로 이경은 성현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재하와는 다른 의미로 성현은 이경을 수치스럽게 했다.
한숨을 다시 내쉬고 이경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서가 이경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손님 와 계세요.”
“네, 기다릴게요.”
이경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곧 문이 열리고, 성현의 방에서 유설이 나왔다. 의외의 인물에 이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 변호사, 오랜만이에요.”
이경을 알아본 유설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재빨리 표정을 고치고 이경 역시 인사를 했다. 이경은 유설의 립스틱이 번진 걸 알아보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들어가 봐요.”
유설은 고개를 까딱이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유설이 떠나고 이경이 성현의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고 있는 성현은 어딘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경의 시선이 성현의 입술과 볼에 묻은 립스틱 자국에 닿았다. 성현의 와이셔츠에도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방금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설의 립스틱이 왜 번졌는지 이경은 알 것 같았다.
“차 변호사.”
성현은 립스틱이 얼굴에 묻은 걸 모르는지 자세를 바로 하고 이경을 맞았다.
“주간 보고 올리러 왔습니다.”
“응.”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성현의 책상 앞에 서서 주간 보고를 올렸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선이 종종 립스틱 자국에 머물렀다.
“수고했어.”
이경의 보고가 끝나자 성현은 피곤한 듯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 보겠습니다.”
이경은 얼굴에 립스틱 자국이 묻은 걸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 꾸벅 인사를 했다.
“차 변호사.”
“네.”
나가려는 이경을 성현이 불러 세웠다. 이경이 돌아보자 성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내려가서 차 한잔하고 가. 할 말 있어.”
“네.”
이경이 대답을 하고 가만히 성현을 보았다. 아무래도 얼굴 상태를 얘기해 줘야 할 것 같다.
“바빠? 아니면 싫은 거야?”
이경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성현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경이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이경의 행동에 성현이 의아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헛기침을 한 그는 황급히 티슈를 뽑아 얼굴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 냈다.
“예준 엄마가…… 왔었어. 예준이 일로.”
성현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네.”
“짓궂은 구석이 있어. 나한테 심술이 났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말라는 듯 성현이 덧붙이고는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이경은 얌전히 성현의 뒤를 따라갔다. 변명할 필요 없는데. 난 더한 것도 보였는데. 이경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로펌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이경을 데리고 간 성현이 커피를 내밀었다. 이경은 시선을 내려뜨려 양손에 쥐고 있는 따뜻한 머그컵에 고정했다.
“많이 고민했어. 차 변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경의 맞은편에 앉은 성현이 입을 열었다.
이경은 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전히 성현을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차 변호사 상황, 이해도 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
“죄송합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말에 이경이 고개를 들어 성현을 보았다. 성현의 얼굴에 걸려 있는 잔잔한 미소가 커피만큼이나 따뜻하다고 이경은 생각했다.
“오래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어.”
“…….”
“나는 차 변호사가 여자로서 좋아.”
성현이 진지한 눈으로 이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