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호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재하는 넥타이부터 풀어 헤쳐 바닥에 던져 버렸다.
뒤따라오던 이경이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잘 접었다.
코트와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는 재하의 뒷모습을 보며 이경은 몸을 바로 세웠다. 긴장감이 전심을 휘감았다.
이경은 고개를 드는 묘한 흥분감에 가방을 꽉 쥐었다. 고개를 든 그 감정이 이경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하.”
숨을 내쉰 재하가 소파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았다.
이경은 재하가 앉은 맞은편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와 재킷을 벗어 잘 올려 두었다.
“먼저 씻겠습니다.”
고개를 든 감정을 떨쳐 내려는 듯 이경이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말에 재하도 이경만큼이나 수치스러워졌다. 이경의 머릿속에 새겨진 그 밤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차이경, 헛소리하지 말고 여기 앉아.”
재하가 턱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경은 잠시 망설이다 재하의 옆에 앉았다. 빤히 쳐다보는 재하의 시선이 느껴져 무릎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 아파. 너 때문에 아픈 거니까 좀 빌려줘.”
재하가 이경의 무릎을 손으로 한 번 꽉 잡고는 그대로 누웠다.
무릎을 베고 누운 재하가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여 이경은 순간적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이경이 입을 열었다.
“몰라.”
퉁명스러운 재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가 아프긴. 네가 하는 말이 다 아픈데.
“…….”
아픈 게 아니라 심술부리는 건가. 안쓰러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이경은 눈을 감은 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말 아픈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재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있나 싶었는데 다행히 미지근했다. 이마에서 손을 떼려던 순간, 재하가 이경의 손목을 잡았다.
눈을 뜬 재하가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체했어. 손 좀 따 봐.”
재하가 이경의 손목을 놓고 일어나 앉았다.
“체하셨습니까?”
“차이경 눈치 보면서 먹다가. 속이 안 좋아.”
“약 드릴게요.”
“이게 더 효과가 좋다며.”
재하가 이경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안 믿으시잖아요.”
“믿을 테니까 따.”
“네.”
이경은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냈다. 실과 바늘을 손에 들고 힐끔 재하를 보았다. 효과가 없다고 성질을 내면 어쩌지.
“약을 드시는 게…….”
“따라고. 따고 먹을게.”
재하가 이경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경은 재하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길고 예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잡아 보니 남자의 손이라는 게 확 느껴졌다.
그날 밤, 이 커다란 손으로 몸 곳곳을 만지던 재하가 떠올라 이경은 몸이 뜨거워졌다.
옅은 숨소리와 함께 이경이 재하의 엄지에 실을 감았다. 재하의 시선이 느껴져 실을 감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더 세게.”
눈이 마주치자 재하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네?”
“그 정도로 되겠어? 차이경이 그랬잖아. 더 세게 감아야 한다고.”
이경은 말없이 재하의 엄지에 감은 실을 풀어냈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차이경 솜씨 좀 보자.”
재하의 엄지손가락 끝에 피가 쏠리며 붉어졌다. 이경은 붉어진 재하의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따끔하실 겁니다.”
“응.”
재하는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하고 이경을 빤히 보았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늘로 그의 손가락을 찔렀다. 금방 검붉은 피가 볼록 올라왔다.
“차이경은 잘하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 시선을 들어 재하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재하의 피만큼 붉게 얽혀들었다.
피를 닦아 주어야 했지만 이경은 그의 손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재하의 시선에 숨이 막혀 그대로 굳어졌다.
재하의 시선이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그대로 이경을 덮쳐 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지고, 이경은 재하의 힘에 떠밀려 소파에 눕게 되었다.
이경에게 올라탄 재하는 거칠게 입술을 탐했다.
어쩔 수 없는 욕망이다. 손을 따 주는 이경이 나를 바라봐 주는 것 같아서. 저를 짓밟은 개자식이 아닌 서재하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미치게 좋아서.
빨고 핥던 움직임을 지나 재하의 혀가 이경의 혀를 옭아맸다.
혀만큼이나 분주한 것이 그의 손이었다. 이경의 허리를 쓰다듬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때마다 재하의 붉은 피가 이경의 옷에 흔적을 남겼다.
“음.”
이경이 연약한 신음을 흘렸다.
재하가 천천히 이경에게서 떨어졌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잠시 이경을 바라보던 재하가 다시 달려들었다.
“씻고…… 싶습니다.”
달려들려는 재하의 어깨를 손으로 막으며 이경이 말했다.
냄새가 날까 걱정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경은 씻고 싶었다. 그 밤, 재하의 입술이 온몸에 닿았던 것을 생각하면 꼭 씻어야 할 것 같았다.
“하.”
이경의 말에 재하는 정신이 들었다. 또 개새끼처럼 굴었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재하의 행동을 씻으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이경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재하가 다시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이러고 조금만 있어. 데려다줄게.”
재하가 이마에 팔을 얹고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이경은 아무 말 없이 재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엄지에 피가 얼룩진 것이 보였다.
그의 손을 잡고 티슈로 얼룩진 피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재하가 이경의 손을 꽉 잡았다.
“차이경.”
“네.”
“내가 얼마나 싫어?”
재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물었다.
“…….”
대답하고 싶지 않아 이경은 입을 다물었다.
“끔찍하게 싫은가?”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니. 하지 마. 상처받아.”
재하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이경을 보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집에 가게.”
“아무것도 안 하고요?”
이경이 일어선 재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호텔로 데려온 이유가 있잖아요. 이경이 재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너랑 여기서 뭘 해야 하는데.”
재하가 약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하고는 그대로 룸을 빠져나갔다.
알 수 없는 서재하. 이경은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챙겨 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재하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다가온 이경의 블라우스 옷깃을 매만졌다.
“피 묻었다.”
“서 전무님 핍니다.”
“알아.”
옷깃을 매만지던 재하의 손이 이경의 목으로 올라갔다. 손가락으로 목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이경은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여기도.”
“네에.”
이경은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하는 한동안 이경의 목을 느린 손길로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만 감각이 선명했다.
“잘 안 지워지네.”
“괜찮습니다.”
이경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재하의 손이 목에서 떨어졌다.
“가.”
재하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이경이 말없이 따랐다.
***
이경의 집 앞에 재하가 차를 세웠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경이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따라 내린 재하가 이경의 옆에 섰다.
“들어가십시오.”
굳이 차에서 내린 재하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경이 다시 인사를 건넸다.
재하는 이경을 쓱 한 번 보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빌라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 집은 왜. 이경이 종종걸음으로 재하를 따라갔다.
“이 집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살 만합니다.”
이경이 공동 현관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이경을 따라 걸음을 멈춘 재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익숙하다니, 슬프네.”
“이만 가십시오.”
동정받는 기분이라 이경은 씁쓸했다. 가난이 창피한 적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피해할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가난은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아픈 동생과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남들이 주는 동정도 달게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가난이 좀 부끄러워졌다. 가난해서 이 남자의 품에 안겼다. 서재하의 동정이 이경은 뼈아팠다.
“같이 올라가. 귀신이 차이경 잡아가면 어떡해.”
재하가 몸을 돌려 빌라 건물 안으로 쓱 들어갔다.
“세상에 귀신은 없습니다.”
이경은 재하를 따라가며 말했다.
“있어. 귀신이 왜 없어?”
계단을 올라가며 재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귀신 보신 적 있습니까?”
이경이 재하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다.
“없어.”
“근데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그게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습니까?”
어두운 계단에 재하와 이경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이 계단이 늘 무서웠다. 센서 등도 나가서 어둡기만 한 계단.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늘 빠른 걸음으로 걸어 올라갔었다.
하지만 오늘은 재하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차이경은 보이는 것만 믿어?”
“보통은요.”
“낭만이 없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계단을 오르던 재하가 피식 웃었다.
어느새 이경의 집 앞이었다. 이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하는 빤히 이경만 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요한 재하의 시선에 이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호텔이 아니라 집이었어?
“집은 안 됩니다.”
“뭐가 안 돼?”
뭐가 안 되냐고 묻던 재하는 이경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구기며 버럭 성질을 냈다.
“차이경은 나만 보면 그 생각밖에 안 나? 하고 싶어 미치겠어?”
“…….”
버럭 성질을 내는 재하를 이경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아니었나 보다.
“씨, 차이경은 들어가서 잠이나 자.”
“살펴 가십시오.”
성질을 내는 재하에게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고 이경은 집으로 들어갔다. 입가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