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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9화 (39/83)

39화

이경과 달리 재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차 변호사 동생은 튼튼해지면 뭐 하고 싶어?”

“복학하고 싶어요.”

“무슨 과야?”

“미대요.”

“그림 잘 그리겠네. 차 변호사도 잘 그리나?”

재하가 이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언니는 그림 엄청 못 그려요.”

하경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것 같이 생겼어.”

“서 전무님은 그림 잘 그리십니까?”

이경이 발끈했다.

얼굴만 놓고 보면 서재하가 진짜 그림 못 그리게 생겼다.

“초상화 같은 것도 잘 그려?”

재하는 이경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하경에게 물었다.

“그려 드려요?”

“자신만만한 얼굴 보기 좋아.”

재하가 입술을 부드럽게 올렸다.

“잠시만요.”

하경이 먹던 푸딩을 내려 두고 핸드폰을 찾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재하가 포즈를 취해 주었다.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재하가 어젯밤의 그 남자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게 진짜 서재하인지 이경은 가늠할 수 없었다.

“예쁘게 찍었어?”

“전무님 잘생겼어요.”

하경이 히히 웃었다.

“들었지, 차이경?”

하경의 말에 재하가 힐끔 이경을 보았다.

재하와 눈이 마주친 이경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침대 위에서 몸으로 짓누르던 남자가 소년처럼 웃고 있는 걸 보니, 어젯밤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 언니는 눈 낮아요.”

“그렇더라.”

재하가 하경의 말에 바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하경은 쿡쿡 웃으며 이경의 학생 시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재하와 하경은 죽이 아주 잘 맞아 보였다.

“아저씨, 그림 예쁘게 그려 드릴게요.”

하경이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를 보며 말했다.

한참을 두 사람끼리 떠들더니 어느새 호칭이 전무님에서 아저씨로 바뀌었다.

“액자에 걸어 놓을 거니까 미화해서 그려.”

“네.”

하경이 키득거리며 재하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재하는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병실을 나섰다. 이경이 그를 따라나섰다.

“고맙지? 병문안 와 줘서.”

이경과 걷는 속도를 맞추며 재하가 말했다.

두 가지 감정이 들게 하는 서재하. 고마움도 반, 미움도 반이라 이경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잠시 생각하다 이경이 대답했다. 미운 건 미운 거고, 하경이한테 잘해 준 건 고마우니까.

“얼마나? 얼마나 고마워?”

재하가 들뜬 얼굴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칭찬받기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이경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의 그 남자는 진짜 꿈인가 보다.

“병문안 와 주신 것도 고맙고, 푸딩도 감사하고, 하경이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이경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상은 없어? 그렇게 많이 고마운데 상은 좀 줘야지.”

“……하경이 자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서재하가 말하는 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이경은 입 안이 썼다.

“오긴 어딜 와.”

“…….”

“야! 너는!”

엘리베이터 앞에 걸음을 멈춘 재하는 버럭 성질을 냈다.

화가 난 얼굴로 숨을 후 내쉬더니 거친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재하가 바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경이 따라 타려고 하자 재하가 제지했다.

“차이경은 잠이나 자.”

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재하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이경은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재하의 눈빛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여서.

***

가방을 쥔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경은 쉽사리 걸음을 내디디지 못했다.

‘차 변호사, 방법 같이 찾자. 내가 도와줄게. 동생 일 같이 고민해.’

성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호텔에서 성현을 보내고 처음으로 그와 마주하는 날이다. 전화를 해 볼까, 로펌으로 찾아가 볼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성현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옆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안지혜 변호사가 내렸다.

“차 변호사 오랜만이네?”

지혜가 반가운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안 변호사님.”

“팀장님?”

“네.”

자연스럽게 지혜를 따라 걸으며 이경이 대답했다.

“요즘 엄청 저기압.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게 오죽하면 대표님도 눈치 보더라.”

지혜가 소곤거렸다.

“팀장님이요?”

“응,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귀띔해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경은 작게 웃었다.

지혜가 방으로 들어가고, 이경은 성현의 방으로 향했다.

비서가 이경에게 인사를 건네고, 말릴 틈도 없이 성현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이경은 숨을 들이마시고 비서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갔다.

서류를 살피는 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팀장님.”

문이 닫히고 이경이 성현을 불렀다.

그를 불렀지만 성현은 이경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이경은 가방을 든 채로 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0여 분을 그렇게 서 있는데 드디어 성현이 고개를 들어 이경을 보았다.

“왜 본인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트려?”

고저 없는 성현의 목소리가 이경의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죄송합니다.”

이경이 고개를 숙였다.

“일하라고 WR 보낸 거지 서 전무 장난감 되라고 보낸 거 아니야.”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렇게 해서 동생 고치면 차 변호사 동생은 마음이 편할까?”

“모르게 할 겁니다, 평생.”

하경이 안다면 괴로워할 것이다. 미안해하겠지. 죄스러워하겠지. 그러니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알 거야. 지금은 어려서 모른다지만 좀 더 나이 먹어서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눈치채겠지. 언니가 뭘 주고 그 기회를 얻었는지.”

“…….”

하경이 알게 되는 그 끔찍한 순간. 상상만으로도 괴로워 이경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차 변호사 스스로 되돌려. 더 늦기 전에.”

“죄송합니다.”

성현의 그 말에 이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 차 변호사 많이 아껴. 아껴서 이러는 거야.”

성현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다.

괴로운 표정 속에 실망한 빛이 역력해 이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좀 힘들고 어려워도 바른길로 가자.”

“…….”

“내 꼴 나지 말고, 차 변호사.”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경은 잠시 성현을 보다 입을 열었다.

성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경은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담담한 얼굴로 보고를 올리고, 그의 방을 나왔다. 실망한 성현의 눈빛을 이경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타박타박 이경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쓸쓸하게 울렸다.

***

“차이경, 퇴근.”

재하가 사무실 문을 열고 말했다.

책상에 앉아 일하던 이경은 고개를 들어 재하를 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6시가 넘어 있었다.

“저는 일 좀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이경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습니다.”

“월급 주는 보람이 있네.”

재하가 완전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여기 계실 겁니까?”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재하를 보며 이경이 물었다.

“응.”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너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

재하의 말에 이경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수치스러움이 몸으로 퍼져 갔다.

일을 하려고 했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경이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의자에 앉아 이경을 지켜보고 있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할 거 하시죠.”

“나 생각해서 일 빨리 끝낸 거야?”

재하가 입가를 올렸다.

“집중이 안 됩니다.”

이경은 걸어 놓은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겼다.

차라리 서재하가 원하는 걸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나야 좋지.”

재하는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사무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재하를 따라 사무실을 나갔다.

재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던 이경은 호텔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를 보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밥 먹으러.”

“밥이요?”

“밥 먹을 시간이잖아.”

뭘 묻냐는 얼굴로 재하가 힐끔 이경을 보았다.

“네.”

“그럼 어딜 가는 줄 알고 그렇게 쫄랑쫄랑 쫓아온 거야?”

재하가 잠시 인상을 쓰고는 물었다.

“호텔이요.”

“침대?”

“네.”

“짜증 나네, 차이경.”

말투는 화가 난 말투였는데,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허탈해 보였다.

이경은 재하의 눈치를 보았다. 나랑 다른 걸 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정곡을 찔러 화가 난 걸까.

“차이경, 난! ……됐다.”

무슨 말을 하려던 재하는 입을 다물고 속도를 높였다.

쓸쓸해 보이는 재하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이경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하는 이경을 버섯 전골집으로 데려갔다. 냄비에 꽃다발처럼 담겨 있는 버섯과 고기에 이경이 시선을 주었다.

이경과 재하는 조용히 식사를 했다. 밥을 먹으면서 재하는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잔뜩 굳어 있는 재하의 얼굴에 이경은 계속 눈치가 보였다.

“맛은?”

절반 정도 먹고 나서야 재하가 입을 열었다.

“맛있습니다.”

“많이 먹어.”

“많이 먹고 있습니다.”

“차이경 눈치 보기 힘드네.”

재하가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 눈치 보셨습니까?”

이경이야말로 재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이경이 물었다.

“보면 몰라?”

“…….”

몰랐다. 성질내는 건 줄 알았다.

“……영화 보자.”

“네?”

갑자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경은 의아한 얼굴로 재하를 응시했다,

“너랑 영화 보고 싶어. 남들처럼.”

재하는 목이 타는지 컵 가득 담겨 있는 물을 단숨에 비웠다.

이경은 물끄러미 재하를 보았다.

우리 관계를 포장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진하게 연애하자더니 정말 남들처럼 데이트라도 할 생각인 건가.

서재하와 자는 것보다 같이 영화를 보는 게 왠지 모르게 더 꺼려졌다. 이 관계를 합리화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잠자리 파트너 같은 거니까.

이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응.”

재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이경을 보았다.

“호텔로 가요.”

“…….”

재하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후, 내쉬었다. 잠시 화를 삭이는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밥 많이 먹어, 차이경. 호텔로 가자는 거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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