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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8화 (38/83)

38화

“차이경.”

팔을 잡은 재하가 이경을 불렀다.

“놓으세요.”

이경은 재하를 밀쳐 낼 힘도 없었다.

“…….”

재하는 팔을 붙잡은 채 말없이 이경만 보았다.

“놓으시라고요.”

이경은 재하의 손을 뿌리쳤다. 연약한 힘이었지만 재하는 순순히 이경을 놓아주었다.

이경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욕실로 도망친 이경은 욕조에 걸터앉았다. 다리고 팔이고 발발 떨렸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재하의 품에 안겨 있던 순간에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경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계절에 맞지 않은 차가운 물을 틀고, 이경은 그 아래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온몸이 울긋불긋 재하의 흔적으로 물들어 있다. 그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이경은 온몸을 박박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은 더 붉어졌다.

샤워를 마친 이경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이경의 눈에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재하가 보였다.

“그렇게 더러워?”

술잔을 손에 쥔 재하가 자세만큼이나 삐딱한 얼굴로 물었다.

“…….”

“너무 더러워서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그러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어, 차이경?”

“서 전무님 흔적이 잘 지워지지는 않네요.”

이경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러라고 남긴 거니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똑바로 선 이경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재하에게 인사했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이경은 흔들림 없이 돌아서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응접실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신발을 신었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아직 사인을 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이경은 몸을 돌려 거실 테이블로 향했다. 계약서에 제 몫의 사인을 하고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이경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잠들어 있는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경아, 언니가 너 꼭 건강하게 만들 거야. 언니는 다 참을 수 있어.”

마지막으로 본 성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경은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진 술잔이 바닥을 뒹굴었다.

“젠장.”

낮게 욕을 내뱉은 재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짐승같은 본능이 사라지고 나자 재하는 저 자신이 미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차이경을 꺾어 버렸다. 고작 이딴 식으로.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차이경을 안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자기혐오를 넘어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린 이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 마주쳐 주고, 웃어 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위에서 헐떡이는 남자의 존재를 부정하듯 눈을 감아 버리는 건 참 비참했다. 모든 게 엉망이다.

이 와중에도 다시 몸이 단단해진다. 이경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또다시 짐승이 된다. 그런 스스로가 미친놈 같아 재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재하는 성큼성큼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다. 이경이 씻은 흔적이 남은 욕실. 어쩐지 물이 차갑다.

“젠장.”

차가운 물로 씻고 나간 이경이 애달파 재하는 딱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재하는 씁쓸한 표정으로 샤워기 물을 틀었다.

이경을 적신 물만큼이나 차가운 물이 재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샤워를 마친 재하는 가운을 입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 물처럼 마시고 소파로 향했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이경의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 두 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차이경만큼이나 단정한 필체로 이름과 사인이 작성되어 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재하는 또다시 스스로가 개새끼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모니터 속 이경의 빈 사무실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재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이경이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재하는 바로 계약서 한 부를 들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차이경.”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재하를 보자마자 이경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여자가 노골적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니 재하는 심술이 났다. 어젯밤처럼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아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다.

캐비닛 앞에 서 있는 이경에게 성큼 다가간 재하는 말없이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경은 고개를 돌려 재하의 입술을 피했다.

이경은 피했지만 재하는 집요하게 쫓아 결국 입술을 겹쳤다.

“회삽니다.”

이경이 입을 맞춘 재하를 밀어냈다.

재하가 몸을 숙여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을은 갑의 요구에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무조건 응한다.”

계약서 조항을 귀에 읊어 주자 이경의 눈이 움찔거렸다.

재하는 다시 이경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번에는 이경도 팔을 늘어트린 채 재하를 밀어내지 않았다.

말캉한 이경의 입술이 재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부드럽게 빨아들이다 거칠게 짓눌렀다. 그때마다 들려오는 이경의 옅은 신음 소리에 재하는 미칠 것 같았다.

입술을 가르고 입안으로 들어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 거칠게 움직였다.

재하의 힘에 떠밀린 이경이 캐비닛에 부딪혔다. 캐비닛과 몸이 동시에 흔들렸다.

재하가 입술을 떼고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이경의 숨에 재하는 옷을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무리 개자식이라도 어느 정도 예의는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이경이 숨을 몰아쉬고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비난하는 듯한 눈빛에 재하의 심장이 쿡 쑤셨다.

“무슨 예의? 개자식한테 예의가 어디 있어?”

“회사에서는 변호사 차이경으로 대해 주십시오.”

“침대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고?”

“…….”

“진짜 개자식처럼 굴 수 있다는 얘기야.”

“어제도 충분히 그러셨습니다.”

이경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했다.

재하는 한쪽 입가를 올렸다. 네가 이럴 때면 난 미치겠다니까.

“죽상인 것보다는 낫네.”

재하가 이경의 손에 계약서를 쥐여 주었다.

이경은 재하가 준 계약서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네 동생 케어할 사람 10시에 회사로 오기로 했어. 만나 봐. 수술할 병원에서 NP 간호사로 오래 있던 사람이야. 자세한 얘기는 그 사람한테 들어.”

재하는 등지고 서 있는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발 자신을 봐 주길 바라며.

“감사합니다.”

하지만 야속한 차이경은 돌아보지 않았다.

칭찬받고 싶은데. 미친놈 같은 생각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경의 칭찬을 받고 싶었다. 웃는 얼굴도 보고 싶고.

헛된 욕심이라는 걸 알기에 재하는 그대로 이경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우리 하경이 잘 부탁드립니다.”

이경은 재하가 소개한 박주영을 배웅했다.

“앞으로 하경 학생은 제가 잘 돌볼 테니 변호사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경은 푸근한 인상의 주영이 마음에 들었다. 40대 중반의 주영은 큰언니처럼, 이모처럼 이경과 하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일 하경 학생 퇴원하는 것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변호사님은 염려 마세요.”

“네, 부탁 좀 드려요.”

“병원에 예약 넣었고, 수술 날짜 확정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주영이 떠나고 이경이 다시 하경의 병실로 들어왔다.

“언니, 나 정말 미국 가서 수술받는 거야?”

하경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들뜬 동생의 얼굴에 이경은 마음의 상처건 몸의 상처건 씻은 듯이 나은 기분이었다.

“응. 그러니까 그때까지 몸 관리 잘하고.”

“알았어. 근데 언니 나도 그 전무님이라는 분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응?”

하경의 말에 이경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 하지 않나 싶어서. 병원비도 비싸고 박 실장님도 소개해 주고. 너무 고맙잖아.”

“너는 신경 쓸 거 없어. 말했잖아. 언니가 해결하라고 한 일 잘 해결해서 도움받는 거라고.”

이경이 하경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 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가 전달할게. 동생이 고마워한다고.”

“응, 알았어.”

하경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가 온 건가 싶어 이경이 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재하였다.

“서 전무님.”

움찔한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은 힐끗 하경의 눈치를 보았다. 서 전무라는 말에 하경은 그가 도움을 준 사람이란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차 변호사.”

평소와 달리 재하는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린 모습이었다. 늘 풀려 있던 넥타이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표정이나 태도 역시 깔끔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와 봐야 할 것 같아서. 이쪽이 동생?”

재하가 하경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차하경입니다. 언니 동생이에요.”

이경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하경이 재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언니 닮아서 예쁘네.”

재하가 웃으며 말하고 이경에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경은 머뭇거리며 재하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푸딩인지 뭔지. 황 비서가 어린애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고 해서. ……단 건 심장에 안 좋은가?”

재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좋아해요!”

하경이 얼른 입을 열었다.

“좋아해?”

하경의 말에 재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차 변호사 동생.”

“그리고 감사해요. 수술받게 해 주셔서.”

하경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경의 그 말에 재하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이경이 힐끔 재하의 얼굴을 살폈다.

“언니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 건강해져.”

“네.”

하경이 헤헤 웃었다.

이경은 재하가 사 온 푸딩을 꺼내 하경에게 주고는 재하 쪽으로 몸을 틀었다.

“휴게실로 가시죠.”

“나 차 변호사 동생 만나러 온 거야. 차 변호사가 아니라.”

재하는 이경의 제안을 거절하고 푸딩을 먹는 하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짜 맛있어요.”

“또 사 줄 테니까 많이 먹어.”

“네.”

대답을 한 하경이 이경에게 눈짓을 했다. 주스라도 드리라는 눈짓이라 이경이 냉장고를 열었다.

토마토 주스를 꺼내 재하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차 변호사.”

재하의 손끝이 이경의 손에 닿았다. 흠칫하며 이경은 황급히 손을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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