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경은 재하의 힘에 떠밀려 뒷걸음질 쳤다. 재하의 시선은 줄곧 이경에게 닿아 있었다. 이경은 재하를 노려보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다시 재하가 입을 맞춰 왔다. 버겁게 부딪혀 오는 입술에 뒷걸음치던 이경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침실을 몇 걸음 앞두고 재하가 거칠게 이경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빨아들이던 재하가 이경의 아래턱을 잡아 내려 입을 벌리게 했다. 벌어진 이경의 입술 사이로 재하의 혀가 들어왔다.
이경이 움찔 몸을 떨었다. 입안을 헤집는 느낌이 너무 낯설어 다리가 자꾸만 허물어졌다. 이경의 다리가 허물어질 때마다 재하가 이경의 허리를 바투 끌어당겼다.
혀를 엮고 흔들어 대는 재하의 움직임에 이경은 머리가 아뜩해졌다. 그가 쏟아 내는 욕망이 힘겹게 느껴졌다.
“하아.”
재하가 잠시 입술을 떼자, 이경은 숨을 토했다.
세차게 뛰는 심장과 거친 숨소리가 타인의 것인 듯 이경은 스스로가 낯설었다. 재하가 건네준 생경한 감각이 문득 두려워진 이경은 재하를 밀쳐 냈다.
이경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정염이 깊게 밴 재하의 얼굴이 이경을 응시했다. 이경의 립스틱 자국으로 재하의 입가가 엉망이었다.
재하가 다시 이경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이경은 재하가 감당이 되지 않아 그를 피해 침실 쪽으로 도망쳤다.
재하가 성큼성큼 이경을 쫓아왔다. 이경은 이내 그에게 붙잡혔다.
“우리 할 거 많잖아.”
이경의 팔을 잡아 돌려세운 재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재하는 본능만 남은 짐승이었다. 이경에게 몸이 닿은 순간 이성은 모두 날아가고 본능만이 존재했다. 차이경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졌다.
“…….”
키스보다 더 깊은 행위를 할 것이다. 이경의 심장이 소리를 내며 세차게 뛰었다.
지금보다 더 낯설고 생경한 감각이 몸을 지배하겠지. 서재하의 손길에 신음하고 쾌락을 느낄 자신이 벌써부터 이경은 수치스러웠다.
“도망가면 안 되지.”
재하는 천천히 흐트러진 이경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재하의 손끝이 이경의 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가벼운 접촉에도 이경은 신경이 곤두섰다. 예민해진 신체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숨을 참았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재하의 아래에서 신음하든 비명을 지르든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이경은 재하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서 전무님.”
“응.”
재하가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 시간이 지나면 전 절대 서 전무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이경은 재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재하는 잠시 말없이 이경을 쳐다보았다. 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난 너한테 개자식 아닌가. 뭘 해도 나쁜 놈에서 벗어나지 못할 텐데. 재하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경은 재하를 쏘아보다 제 발로 침대로 올라갔다.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관없어.”
나지막한 재하의 목소리가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경의 귀에 들려왔다.
어느새 다가온 재하가 침대 위로 무릎을 올렸다. 재하의 무게에 침대가 움푹 들어갔다.
느껴진 재하의 기운에 이경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계속 개새끼 하지 뭐. 윤성현 옆에서 살랑거리는 거 볼 바에야.”
상관없다는 듯 재하가 읊조렸다. 그리고 이내 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이경의 몸 위로 엎어졌다.
맨살끼리 맞닿은 느낌에 이경은 몸을 움츠렸다.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재하는 다시 이경과 입술을 겹쳤다. 재하의 진한 입맞춤에 이경의 감은 눈이 움찔거렸다. 이경의 입술에서 머물던 재하의 입술이 턱과 목으로 차례로 내려갔다.
“읏.”
목을 빠는 재하의 움직임에 이경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감각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아.”
이경의 목을 지분거리며 재하의 손이 가슴을 쓰다듬었다. 입술의 움직임은 한없이 거칠었지만 가슴을 쓰다듬는 손길은 녹아 버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속옷을 밀어낸 재하의 손이 이경의 맨살에 닿았다. 이경의 몸이 다시 움찔거렸다. 시트를 쥔 이경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젠장.”
목에서 입술을 뗀 재하는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 이경이 눈을 천천히 떴다. 내려다보고 있는 재하의 시선과 부딪혔다.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정신이 나가 있던 이경은 재하의 상태가 어떠한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에서야 재하를 보니, 정염이 지배한 그의 눈은 무언가에 취한 듯 풀려 있었다. 숨소리 역시 거칠어 차이경을 집어삼킬 욕망만 남은 사람 같았다.
“차이경.”
이름을 부르는 재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경은 눈을 맞춰 오는 재하가 힘겹게 느껴져 스르르 눈을 감았다. 차라리 서재하의 눈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경이 눈을 감자마자 다시 재하가 입을 맞춰 왔다. 이경의 입안을 가르고 들어온 재하의 혀가 맹수처럼 움직였다.
재하의 몸 아래에서 이경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손이 자꾸 움찔거리며 재하의 등으로 움직이려 했다. 본능을 억제하듯 이경은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깊은 키스를 끝낸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온몸에 닿기 시작했다. 가슴을 머금고 괴롭히는 재하의 입술에 이경은 흐느끼듯 신음했다.
“하아.”
이경의 몸이 뒤틀렸다. 이경은 온몸에 닿는 재하의 입술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경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재하가 성이 난 자신의 하체를 이경의 몸에 밀착시켰다. 뒤틀리는 이경의 허리와 다리를 하체로 눌러 침대에 고정시켰다.
이상한 느낌이 자꾸만 몸 전체를 좀먹는 것 같았다. 이경은 흐느끼다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재하의 풍성한 검은 머리가 보였다. 재하가 하는 짓도, 재하가 일으킨 감정과 온몸을 지배한 감각도 다 너무 낯설었다.
이경은 그 낯선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제발요.”
이경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재하가 이경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맹수 같은 재하의 눈동자가 이경을 응시했다.
“제발…….”
“…….”
“빨리 끝내 줘요.”
이런 거 말고. 이렇게 이상한 거 말고. 이경은 거친 숨을 헐떡였다.
자꾸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몸으로 번지는 당황스러운 감각들도 견뎌 내기 힘들었다.
“끔찍해?”
정염으로 풀린 눈동자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빨리 끝내 달라는 이경의 말에 재하는 속이 뒤틀렸다. 속을 뒤집은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자기혐오. 수치스러움으로 재하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
밑에서 흐느끼는 내가 너무 낯설어서, 그게 너무 견디기 힘들어. 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내 밑에 깔려 있는 게 끔찍해 죽겠어, 차이경?”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재하는 이경을 강하게 짓눌렀다. 이경의 몸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
이경이 재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경은 지금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버겁고 힘겨웠다. 피해서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하, 다 관두자. 다 때려치워. 그딴 계약 없던 거로 해.”
재하가 이경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끔찍하다는 듯 빨리 끝내 달라는 여자를 더 안고 싶지 않았다. 자기혐오를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차이경이 서재하를 끔찍해하는 만큼 스스로가 끔찍해질 것만 같다.
“무슨 소리세요? 이제 와서…….”
이경이 몸을 일으켜 재하를 보았다. 하경을 살릴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지려 한다. 이경은 간절한 얼굴로 재하의 팔을 잡았다.
“그만하자고.”
재하가 이경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말했다.
“서 전무님.”
“계약…….”
재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경이 입을 맞춰 왔다. 계약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네 동생 수술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이경의 입술에 가로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경은 입을 맞추며 다시 재하를 침대로 끌어들였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 서재하. 이경은 어설픈 동작으로 재하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차이경, 미쳤어?”
재하가 이경에게서 입술을 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전무님 조건, 필요합니다.”
이경이 재하와 눈을 맞추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 동생 살릴 수 있는 동아줄, 놓을 수 없었다. 설사 그게 썩어 빠져 붉은 수수밭으로 떨어진다 해도.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정말 후회 안 해? 이렇게 안 해도…… 네 동생 수술 해 줄게. 계약은 됐어.”
재하의 대답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생각하던 이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그런 건 싫어요. 원하는 거 가져가세요.”
이경이 다시 재하에게 입을 맞추었다. 서재하에게 부채 의식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고마운 마음만 가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서재하가 원하는 걸 주고, 난 원하는 걸 받고. 이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를 미워할 이유가 생겨야만,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한참 이경만을 바라보던 재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진짜 개 같이 굴 거야. 그러니까 맘껏 원망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재하는 곧바로 이경의 귀를 혀로 핥아 냈다.
“으읏.”
이경의 눈이 다시 감겼다. 낯선 서재하와 그가 주는 낯선 감각을 견뎌 내야 할 때였다.
재하의 입술과 손이 몸 곳곳에 닿았다. 그때마다 이경은 흐느끼듯 신음했고, 재하는 더욱 거칠게 굴었다.
“아아.”
얼마 후, 고통이 찾아왔다. 이경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깨물고 재하의 몸을 받아 냈다.
아파하는 이경에게 재하가 달래듯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깊은 키스에 몸이 느끼는 고통이 점점 옅어졌다.
“읏.”
고통이 쾌감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픔만 느껴지던 몸이 이제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자꾸만 터지는 신음이, 쾌락으로 물들어 가는 몸이, 벅차도록 아찔한 감각이, 이경은 수치스러워졌다.
허리에 닿은 재하의 손, 밀어치는 재하의 몸, 거칠게 흩어지는 재하의 숨소리.
재하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 이경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오래도록 재하의 아래서 흔들리던 이경은 몸을 태우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숨을 헐떡였다.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렸다. 한 차례 떨림이 지나고 몸 곳곳에 나른함이 퍼졌다.
이경에게서 몸을 떼어 낸 재하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자꾸만 까무러지는 몸을 애써 일으킨 이경 역시 침대에서 내려왔다. 재하가 내던져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주우며 이를 악물었다.
한 손에 속옷을 쥐고 허리를 세우는데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피해 욕실 쪽으로 향했다. 옆을 스쳐 지나가자 그에게 팔이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