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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6화 (36/83)

36화

“팀장님.”

이경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서재하가 원망스러웠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성현은 몰랐으면 했다. 성현과는 끝난 인연이 될 테지만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성현이 몰랐으면 싶었다.

이경의 시선이 성현에게서 재하에게로 옮겨 갔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재하를 보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재하가 밉고 싫다. 이경은 입술을 깨물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재하는 이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소파로 돌아왔다. 1인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재하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성현에게 고갯짓을 했다.

성현이 단정한 얼굴로 소파로 걸어왔다. 이경은 가까이 다가오는 성현의 발소리에 도망치고 싶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뭡니까?”

무슨 일인지 꿈에도 모르는 성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을 말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 쟤랑 자려고.”

나른하게 들려오는 재하의 목소리가 이경의 심장에 못을 박았다.

이경은 입술을 깨문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를 쳐다보았다. 눈을 맞춘 재하의 한쪽 입가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네가 그렇게 쳐다봐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표정에 이경은 옅은 숨을 토했다.

“성희롱은 삼가 주십시오.”

성현은 또 재하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성현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계약서로 향했다.

“그 계약서의 갑은 나고, 을은 차이경.”

재하가 성현을 향해 말했다.

성현은 재하의 말에 콧잔등을 찌푸리고 계약서를 살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성현의 얼굴이 갈수록 일그러졌다.

계약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성현은 아직도 서 있는 이경을 올려다보았다.

“차이경 변호사.”

복잡한 감정이 실린 얼굴로 성현이 이경을 불렀다.

“…….”

이경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성현과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성현의 감정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초라하고 부끄러워 이경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에게 언성을 높였다.

“무슨 짓은. 차이경이 나랑 진하게 연애 한번 하고 싶대.”

재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현에게 말했다.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성이 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와, 차 변호사.”

이경은 말없이 고개를 들고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화가 난 성현의 얼굴에 이경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경이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자 성현은 그대로 이경의 팔목을 잡고 문으로 끌고 갔다. 성현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차이경.”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가 이경을 불렀다.

나지막하게 퍼지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그의 목소리에 이경은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성현과 함께 이 방을 나가면 재하가 준 기회가 날아간다. 이경은 황급히 성현의 팔을 붙잡았다.

방을 나가려던 성현이 이경을 돌아보았다.

“팀장님.”

“차 변호사 왜 이러는지 아는데, 이건 아니야.”

성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를 억누른 목소리였지만 분노가 읽혔다.

“잘 생각해, 차이경. 기회는 한 번뿐이야.”

뒤에서 들려오는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이 돌아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재하가 차가운 얼굴로 이경을 보고 있었다.

“차 변호사. 방법 같이 찾자. 내가 도와줄게. 동생 일 같이 고민해.”

이경의 손목을 잡은 성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경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경은 성현과 재하를 번갈아 보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윤성현이 뭘 줄 수 있는데? 윤성현이 줄 수 있는 거면 나도 줄 수 있어. 근데, 내가 줄 수 있는 거 윤성현은 못 줘.”

재하가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그 말에 이경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재하의 말이 맞다. 성현은 하경의 일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마음을 위로해 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바보처럼 놓칠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린 이경이 성현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빼냈다.

“차 변호사.”

성현이 다시 이경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경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손을 숨겼다.

상처받은 성현의 눈동자가 이경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이경은 고개를 숙여 성현에게 인사를 했다. 제 선택은 서재하입니다. 말 대신 그렇게 인사로 대신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당신이 아니라 서재하라는 걸.

성현은 헛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룸을 빠져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가 이경의 가슴을 짓이겼다.

뚜벅뚜벅 재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서 벗어난 재하는 이경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섰다.

“역시 똑똑해.”

“꼭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습니까?”

이경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재하를 보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재하가 너무 미워 이경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바닥으로 떨어트려. 왜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어.

“애타 죽겠어? 윤성현 저런 얼굴로 나가서 마음이 찢어지기라도 해?”

재하가 비틀린 얼굴로 한껏 비아냥거렸다.

이경이 비참한 만큼 재하도 비참했다. 처음 보는 이경의 얼굴에 재하는 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없는 고장 난 차에 탄 것만 같다.

“네! 마음 아파 죽겠습니다.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이경이 파르르 떨며 언성을 높였다.

“윤성현 때문에 대드네, 차이경이.”

“여태까지 봐 왔던 것 중 지금이 가장 최악이십니다.”

이경이 악에 받친 얼굴로 재하에게 말했다.

재하는 이경의 표정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제 감정을 숨기고, 나른한 동작으로 소파에 기대섰다.

“난 원래 개새끼고.”

난 원래 개새끼니까 이딴 짓을 멈추지 않을 거야.

“알긴 아십니까?”

“네가 이러면 내가 흥분밖에 더해?”

재하가 느슨한 넥타이를 풀어 냈다. 넥타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경은 가만히 서서 재하를 쏘아보았다. 치미는 감정에 턱이 파르르 떨렸다.

“차이경.”

소파에 기대어 서 있던 재하가 자세를 바르게 했다. 똑바로 서서 이경을 보는 눈빛이 위험했다.

“…….”

이경은 주먹을 꽉 쥐고 재하를 보았다. 재하의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벗어.”

툭 던져진 재하의 명령.

이경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모멸감, 치욕감, 수치스러움이 이경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늘 덤덤하던 얼굴에 고스란히 감정이 드러났다.

재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내비친 이경을 빤히 보았다. 숨이 막혀 왔다. 차라리 내 뺨을 치고 나가, 차이경. 그래도 네가 원하는 거 줄 테니까.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요함 속에서도 서로를 보는 시선만은 소란스러웠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극단으로 치달았다.

“벗어, 차이경.”

침묵하던 재하의 입이 다시 열렸다.

똑같은 말.

한층 더해진 치욕.

이경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경은 입술을 깨문 채 구두부터 벗었다.

이내 코트가 툭 바닥에 떨어지고, 이경의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차례차례 떨어졌다.

속옷 차림이 된 이경은 재하 앞에 벌거벗겨진 채로 서 있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주먹을 쥔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자국을 만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재하는 이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성과 본능이 줄다리기를 했다.

이경은 재하의 눈빛에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재하의 시선이 몸 곳곳에 닿는 게 느껴졌다.

“차이경.”

재하가 이경을 불렀다.

이경이 고개를 들자, 재하가 가까이 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경은 잠시 재하를 노려보았다. 재하는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이경을 옭아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이경이 맨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천천히 재하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의연하려고 애를 썼다.

재하의 앞에 멈춰 선 뒤 고개를 들어 재하를 보았다. 삐딱하게 한쪽 입가를 올린 재하가 입을 열었다.

“벗겨.”

이경이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재하의 셔츠로 손을 올렸다. 셔츠 단추가 이경의 손에서 하나씩 풀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이경을 내려다보는 재하의 시선에 욕망이 걸렸다. 그의 귀는 그가 품은 욕망만큼이나 붉었다. 우세한 본능이 잠깐을 참지 못하고 이경에게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재하의 입술을 피했다. 재하는 집요하게 이경의 입술을 쫓았다.

피했지만 결국은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경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재하가 그녀의 팔을 잡아 품으로 당겼다. 거칠게 이경의 입술을 탐하며,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이성이 휘발된 순간이었다.

이경의 몸이 셔츠 사이로 드러난 재하의 가슴과 부풀 대로 부푼 하체에 닿았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재하의 몸에 이경은 그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었다.

사나운 기세로 이경의 입술을 빨아들이던 재하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경은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도 재하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항의하듯 바라보는 이경의 눈빛에 재하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못 하겠어?”

“…….”

“관두고 싶으면 지금 말해. 계약 조건 바꿔 줄게.”

재하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

무슨 말이냐는 듯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을은 최선을 다해 갑을 사랑한다. 날 사랑하도록 노력을 해 보는 건 어때, 차이경?”

조금 전과는 달리 간절한 빛을 담은 재하의 눈이 이경을 보았다. 날 좋아해 봐. 내가 너한테 이런 짓 하지 않도록.

“…….”

이경은 말없이 재하를 쳐다보았다.

내 동생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제안했으면서, 날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사랑해 보라니. 그것처럼 우스운 말도 없었다.

합리화하지 말고 그냥 개새끼로 남아, 이 나쁜 자식아. 이경이 재하를 쏘아보았다.

“차이경, 응?”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조르듯 재하가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못 합니다.”

이경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서재하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이런 남자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절대.

“그래. 그럼 잠이나 자자.”

재하의 입에서 체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순간 눈동자에 상처가 고였지만 이내 사나운 기운만 남았다.

재하가 이경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이경의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몸으로 이경을 침실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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