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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5화 (35/83)

35화

“얼마나 자 주면 되냐고? 하.”

“…….”

헛웃음을 짓는 재하를 이경이 빤히 보았다. 재하의 귀가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이런 네가 조금이라도 수치스럽니? 이경은 속으로 재하를 비웃었다. 그게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다.

“연애하자고. 연애! 연애가 뭔 줄 몰라?”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얼굴로 재하가 언성을 높였다.

“압니다. 연애가 뭔지.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의 합의하에 만나는 게 연애죠. 이런 게 아니라.”

“뭐?”

이경의 말에 재하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연애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결국 원하는 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담담한 얼굴로 이경이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재하는 비참해졌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네가 원하는 걸 줄 테니 만나 달라고 떼를 쓰는 자신이 한심하고 화가 났다.

좋아하는 여자가 날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고,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저 여자가 미치게 가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재하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원한다니까 정해 줄게. 1년.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쓰레기가 되는 수밖에. 흔들리는 이경의 눈동자를 보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

아무리 이경의 신념이 하경이라 해도 수치스러움이 달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경은 주먹을 꽉 쥐고 재하를 쳐다보았다.

“변호사니까 네가 계약서 작성해 와. 오늘까지.”

“알겠습니다.”

이경은 그대로 재하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경은 한동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경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것도, 재하가 하경에게 기회를 주는 대가로 자신을 요구한 것도 모두 꿈 같았다.

꿈같은 몽롱함 속에서 성현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성현이 생각나자 이경은 큰 잘못을 저지른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재하의 제안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놓쳐야 할 사람이 떠올랐다.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재하에게 가서 못 하겠다고 말해야겠다.

그때, 가방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경의 전화였다.

“응, 하경아.”

전화를 받은 이경이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배가 불렀네, 차이경. 이경은 하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그런 말랑한 감정 따위로 포기하기에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죄책감은 성현에게서 하경에게로 옮겨 왔다.

—언니 걱정할까 봐. 나 괜찮다고.

“하경아, 언니가 너 꼭 건강하게 만들 거야.”

—응, 난 잘 버티면 되는 거지?

“어, 잘 버텨. 언니가 너 안 아프게 만들어 줄게.”

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경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

젠장.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은 재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모니터 속 이경의 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괜히, 차이경 불러 보고 싶게 만드는 여자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키보드 위에서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이경과 성현이 병원 앞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말 그대로 재하는 눈이 돌았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 황 비서를 괴롭혔다.

차이경 약점은 아픈 동생인 것 같으니 동생 목숨 줄을 쥐어야 할 것 같았다. 방법을 찾아 오라고 황 비서를 닦달하니 몇 시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차이경 동생을 살리는 데는 돈이 굉장히 많이 들었다. 억 단위의 돈을 써야 하지만 재하는 들어가는 돈 단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차이경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이런 거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경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 목소리에 재하는 속이 울렁거렸다. 혐오스럽다는 듯 보던 이경의 표정에 목이 바짝 말랐다.

재하는 모니터 속 이경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경의 사무실 앞에서 서성였다. 들어가고 싶은 걸 꾹 참고 벽에 몸을 기댔다.

아무 조건 없이 네 동생 미국에서 수술받게 해 주겠다고 했으면 네가 날 그런 눈으로 안 봤을까.

재하는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이경이 있는 사무실 문을 바라보다 집무실로 돌아왔다.

오후쯤, 이경이 계약서를 들고 재하를 찾아왔다. 특유의 덤덤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하는 애가 탔다. 힐끔 이경의 눈치를 보고 계약서를 살폈다. 적나라한 언어들로 적혀 있는 계약서에 입술이 비틀렸다.

“노골적이게도 썼네.”

“계약서는 분명한 게 좋습니다.”

“‘너는 개쓰레기다’로 읽히네?”

“추가하실 조항 있습니까?”

이경은 씁쓸한 재하의 표정을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동생 미국 가면 케어해 줄 인력, 그에 따른 비용도 갑이 대는 거로.”

반쯤 포기한 얼굴로 재하가 책상 위에 계약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계약 기간 동안 을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 이것도 넣어.”

“네.”

이경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파기는 갑만 가능하다.”

“네.”

“을이 계약을 어길 시 갑이 지불한 비용의 열 배를 갚는다.”

“네.”

“을은 갑의 말에 절대복종한다.”

무덤덤한 얼굴을 흔들고 싶어 강도를 높여 본다. 차이경, 언제까지 그 얼굴 유지할 건데. 재하는 한쪽 입술을 삐딱하게 올렸다.

“네.”

“을은 최선을 다해 갑을 사랑한다.”

툭 뱉어 낸 말에 드디어 이경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모든 조항은 다 지켜도 그것만은 지키지 못한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에 도리어 재하의 마음에 균열이 갔다.

차이경이 서재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속이 뒤틀렸다.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계약서에 넣을 수 없는 조항입니다.”

“알아서 해.”

재하는 짜증스레 말을 뱉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경을 등지고 섰다. 통창 앞에서 차들이 분주하게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보충해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등 뒤에서 이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경의 발걸음 소리, 문 닫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젠장.”

욕을 내뱉은 재하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걸렸다.

차이경에게 사랑을 구걸 중이다.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데, 애원하면 할수록 쓰레기가 되어 간다. 재하는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30분 만에 이경은 재하가 말한 조항들을 넣은 수정된 계약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지막 조항은 물론 들어가지 않았다.

“읽어 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재하는 이경의 말을 들으며 계약서를 쓱쓱 훑어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들어 평소와 똑같은 이경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역겨워?”

재하가 입을 열었다.

이경은 말없이 재하를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말해. 입 다물고 있지 말고.”

“양가감정입니다. 고마운데 밉습니다.”

“솔직하네.”

재하는 고맙다는 말에는 희망을, 밉다는 말에는 절망을 품었다. 절망이 조금 더 우세해 기분이 가라앉았다.

“…….”

이경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런 이경도 미치게 예뻤다. 사인 해 버리고 당장 안고 싶을 정도로. 어차피 자신의 진심에는 관심도 없는 여자였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많이 미워?”

그럼에도 재하는 한 줄기 희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슬쩍 물으니, 또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이경이 다시 시선을 들어 재하를 보며 대답했다.

원망 한 자락 섞이지 않은 표정에 재하는 쓰게 웃었다.

“미운 이유가 윤성현 때문이야?”

“…….”

이경은 또 말없이 재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맞다는 얘긴가.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윤성현 때문에 날 사랑할 수 없다면 끊어 줘야지. 앞으로 윤성현은 절대 꿈도 못 꾸게. 나 버리고 윤성현에게 못 가도록. 네가 만든 쓰레기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번 봐, 차이경.

“사인은 저녁에. 호텔에서.”

재하가 이경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호텔이라는 말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엽네, 차이경. 재하는 나가 보라는 듯 이경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경은 꾸벅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이 떠나고 재하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아마 앞으로 차이경은 날 더 미워하겠지. 재하는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업무를 보고 있던 이경은 사무실 문이 열려 움찔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퇴근 시간이다. 서재하와 호텔에 갈 시간이 되었다.

이경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경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챙겨서 나와.”

한참 만에 재하가 입을 열었다.

“네.”

이경은 서랍에 넣어 둔 계약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이미 재하가 딱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재하는 이경을 한 번 보고는 말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이경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재하의 차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호텔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냈다. 덩달아 이경의 심장도 소리를 내며 뛰었다.

재하가 스위트룸 앞에 멈춰 섰다. 이경은 긴장감에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속이 울렁거려 도망치고 싶어졌다.

문이 열리는 전자음이 들렸다. 이경은 재하의 넓은 등을 보며 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고, 재하가 이경을 돌아보았다. 재하와 눈이 마주치자 이경은 숨을 삼켰다.

“들어가.”

나지막하게 재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경은 천천히 재하를 스치고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은 응접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재하가 이경의 손목을 잡고 소파로 끌고 갔다. 이경을 소파에 앉히고, 재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이경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인하라는 듯 펜과 함께 계약서를 건네주자, 재하가 입을 열었다.

“올 사람 있어.”

말을 하며 재하는 코트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다.

“올 사람이요?”

재하의 말에 이경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올 사람이라니. 대체 누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경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호사 끼고 계약서 쓰고 싶어서.”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경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걷는 재하의 등을 보며 이경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곧 문이 열렸다. 이경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성현이었다.

“차 변호사.”

안으로 들어온 성현은 이경에게 눈인사를 했다. 같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얼굴로 성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티, 팀장님.”

성현의 등장에 이경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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