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훌쩍이던 이경이 성현의 품에서 떨어졌다.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이경은 성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나도 미안. 멋대로 안아서.”
성현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하경의 병문안을 온 성현을 배웅하던 길이었다. 하경의 얘기를 하다 이경은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우는 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성현이 가만히 이경을 안아 주었다. 위로가 필요했던 이경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닙니다.”
“안쓰러워서. 예준이 같아서 그랬어.”
성현이 조심스럽게 흐트러진 이경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네.”
“차 변호사, 안 아팠으면 좋겠다.”
성현은 속이 상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이젠 괜찮습니다.”
성현의 위로에 이경은 따뜻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 볼게.”
“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이경이 꾸벅 성현에게 인사를 했다.
성현은 이경의 어깨를 다정하게 만져 주고는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 걸어갔다.
이경은 성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현이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나고 나서야 이경도 몸을 돌려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실로 돌아온 이경은 성현이 사 온 주스를 마시고 있는 하경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하경이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은 가셨어?”
“응.”
이경이 티슈를 뽑아 하경의 손등을 닦아 주며 대답했다.
“되게 높은 사람이지?”
“응. 언니 상사.”
“나 실수한 거 없지?”
하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인사도 예쁘게 하고, 실수한 거 하나도 없지.”
이경이 하경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이다. 언니 상사면 예쁘게 보여야 하잖아.”
안심한 얼굴로 말하는 하경이 귀여워 이경은 작게 웃었다. 하경은 이경과 비슷한 얼굴로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내일 효진이가 온대. 그러니까 언니는 내일 그냥 출근해.”
“언니가 더 있어도 돼.”
“아니야. 나 이제 괜찮아. 내일은 출근해, 언니.”
“그래, 알았어.”
이경은 하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경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이틀 연속으로 휴가를 내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서재하가 성질을 낼지도 모르는데.
재하가 떠오르자 이경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호텔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입술에 닿았던 재하의 감촉. 부드러운 듯 거친 듯 입안을 헤집던 서재하.
“언니, 나 졸려.”
“어, 좀 자.”
재하와의 일을 곱씹던 이경은 하경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경이 들고 있는 주스 병을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누운 하경의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하경은 금방 잠들었다.
이경은 내내 하경의 옆에 붙어 있었다. 하경이 집에 들어가서 좀 쉬라고 해도 절대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깊은 밤이 찾아왔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하경을 이경은 안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경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지갑을 챙겨 병실을 나섰다. 내일 출근하려면 집에서 옷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병실 밖으로 나온 이경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재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재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서 전무님?”
이경이 재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술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제야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경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차이경이네.”
“여긴 어떻게…….”
이경이 말끝을 흐렸다.
“가난한 차이경. 돈 좋아하는 차이경.”
재하의 혀가 꼬여 있었다. 얼굴도 붉은 게 제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술 마시고 병원 찾아오는 게 딱 양아치 서재하 같아 이경은 놀랍지도 않았다.
“취하셨습니다.”
“응, 취했어.”
재하가 이경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걸음을 움직였다.
이경은 순순히 재하를 따라 병원을 나갔다. 재하가 이경을 데려간 곳은 병원 건물 밖 벤치였다.
이경을 벤치에 앉히고, 재하가 이경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서 전무님.”
이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릎을 베고 누운 재하는 이경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설마 잠이 든 건가 싶어 이경이 재하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재하가 바로 이경의 손을 쥐어 제 가슴에 올려놓았다.
“일어나세요.”
“싫어.”
말 안 듣는 네 살 아이처럼 재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쥐어박고 싶은 걸 참고 이경은 벤치에 등을 기댔다. 밀쳐 낼 기운도 없어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별이 보였다. 희미한 별빛에 괜히 서러워진다. 바람은 차가운데, 재하가 베고 누운 무릎만 따스하다.
“차이경.”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재하의 눈도 검은 밤 같다. 눈빛이 별빛만큼이나 희미해 이경은 왠지 서재하를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네, 전무님.”
“네가 가난해서 좋아.”
“…….”
“돈으로 널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아.”
재하가 손을 뻗어 이경의 뺨을 만졌다. 차가운 재하의 손가락이 이경의 뺨에 닿았다. 그림을 그리듯 재하의 손가락이 이경의 뺨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
이경은 입을 다물었다. 뺨에 닿는 재하의 손가락이 간지러워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재하의 손이 툭 떨어졌다. 화가 난 건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벤치에서 일어난 재하가 이경의 앞에 섰다. 재하는 이경이 앉아 있는 벤치 등받이를 양쪽 손으로 짚어 이경을 품에 가두었다.
재하의 품에 갇힌 이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맞춘 재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없이 이경을 가만히 쳐다보다 한숨 같은 말을 토해 냈다.
“오늘 나랑 있자, 차이경. 나랑 놀자고.”
“취하셨습니다.”
이경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놀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결국 서재하가 원하는 건 변호사 차이경이 아니라 여자 차이경인가 보다.
서재하에게 여자로 쓰다 버려지는 것보다 변호사로 쓰이고 싶은데. 오래도록 변호사로 남고 싶은데.
“줄게. 네가 원하는 거.”
“…….”
“돈이든, 네 동생 심장이든 다 줄게.”
이어진 재하의 말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동생 심장’이라는 말이 이경의 마음을 흔들어 댔다.
하경을 위해서라면 이경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재하가 정말로 하경에게 건강한 심장을 줄 수 있다면 그와 백 번이고 놀아 줄 수 있다.
“……그러니까 나랑 놀아.”
재하가 건넨 말이 이경에게 기회처럼 들렸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
벌써 한 시간째다. 이경은 재하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재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시가 훌쩍 지났건만 어제 술을 마신 탓인지 재하는 아직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이경은 문 열리는 소리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얼굴의 재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경을 쓱 보고는 코트를 벗어 걸어 놓았다.
“뭐야, 차이경.”
말투가 차가웠다.
이경은 재하의 차가운 말투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건가.
하경의 심장도 줄 수 있다는 말에 쪼르르 달려온 스스로가 한심했다. 술 취해서 헛소리 지껄인 것일 텐데.
“진짜 나랑 놀려고? 진하게 연애라도 할까?”
이경 쪽으로 몸을 돌린 재하가 물었다.
“……정말 주실 수 있습니까? 제 동생 심장이요.”
재하가 하경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하경에게 건강한 심장을 정말로 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취해서 헛소리하는 놈 말 믿고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재하가 책상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말했다.
이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헛소리였다고? 또라이 서재하를 믿은 내가 멍청했지. 이경은 일그러진 얼굴을 펴고 꾸벅 재하에게 인사했다.
“차이경.”
재하가 나가려는 이경을 불러 세웠다.
“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이경이 다시 재하를 돌아보았다.
재하는 이경을 말없이 가만히 보고는 책상으로 가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것을 소파 테이블에 던져 놓고 이경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경은 소파로 다가가 재하가 던진 서류를 살폈다. 이경의 얼굴에 감정이 스쳤다.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경은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산처럼 이경의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생존율 굉장히 높아. 신소재 패치인지 뭔지는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모르겠고, 미국 그 병원에서 네 동생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줄게. 비용도 다 내가 대. 너는 나랑 놀아 주기만 하면 돼. 진하게 연애 한번 해 보자고, 나랑.”
재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소유욕을 드러냈다.
별일 아닌 양 그렇게. 눈앞의 이경이 느끼는 모멸감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이런 거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런 거’라니.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윤성현 같은 놈 말고 자신과 놀아 달란 말. 그게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차이경은 결국 자신을 그딴 새끼로밖에 보지 않는 거였다. 이경의 말에 재하의 가슴에 생채기가 났다.
“이런 게 뭔데 대체?”
재하가 팔짱을 끼고 삐딱한 시선으로 이경을 보았다.
“…….”
이경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에 재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냥 차이경이 좋은 것뿐인데. 네 시간을 사서라도 내 옆에 있기를 바란 것뿐인데. 왜 나를 개새끼로 만드는 건지.
그래. 차이경이 원한다면 기꺼이 개새끼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나쁜 놈이 되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심술 난 어린아이가 재하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왔다.
“차이경 가지려면 어쩔 수 없지. 난 돈이 많고, 차이경은 돈이 없고. 윤성현은 이런 거 못 주니까 결국은 차이경이 날 선택하겠지.”
말을 내뱉은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재하의 속을 모르는 이경은 그의 얼굴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고작 몸뿐일 겁니다.”
재하가 넘겨준 서류 속 내용은 이미 이경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심장병 환우들 카페에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정보였다.
하지만 병원비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비쌌다. 미국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차라리 심장 이식을 기다리는 게 더 현실적일 정도로 미국에서 수술받는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재하가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해 왔다. 대가는 차이경.
하경을 건강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경은 얼마든지 서재하와 놀아 줄 수 있었다.
이경에게 신념은 하경이었고, 삶의 목적 역시 하경이었다. 그러니 저 남자와 진하게 놀아 주는 것쯤이야.
“마음은 윤성현이고?”
고작 몸, 작게 중얼거린 재하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차이경.
“얼마나 자 드리면 됩니까?”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