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언니!”
이경은 하경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던 정신을 차리자마자 입술을 문질렀다. 서재하의 입술이 아직도 붙어 있는 기분이다.
“팥죽 빨리 먹어.”
“너 많이 먹어. 언니 저녁 먹고 왔다니까.”
호텔에서 나온 이경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하경에게 먹일 팥죽을 사러 갔었다. 저번부터 하경이 팥죽을 먹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난번 재하가 사 준 팥죽을 사다 주고 싶었는데, 오늘 서재하가 한 또라이 짓 때문에 그냥 동네 죽집으로 향했다.
“언니도 팥죽 좋아하잖아.”
“알았어. 먹을게.”
이경은 결국 숟가락을 들고 팥죽을 떠먹었다. 역시 재하가 사 줬던 팥죽이 훨씬 맛있다.
나중에 하경을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경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언니, 나 내년에 복학할게.”
“괜찮겠어?”
하경의 말에 이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대학을 다니다 몸이 안 좋아져 하경은 1학기를 마치자마자 휴학을 했다. 쉬면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경은 하경이 걱정되었다.
“계속 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하고, 빨리 졸업해서 나도 돈 벌고 싶어.”
“돈 안 벌어도 돼. 언니가 있는데 네가 왜 돈을 벌어.”
“나도 돈 벌어서 언니 용돈 주고 싶어.”
하경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이경은 그런 동생이 귀여워 웃음 지었다.
“언니는 너한테 바라는 거 딱 한 가지야. 건강한 거. 아프지만 않으면 돼. 건강하기만 하면 돼.”
“미안해, 언니. 매일 걱정만 시키고. 언니한테 짐만 되고.”
“또 그 소리. 언니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빨리 팥죽이나 먹어.”
“응.”
하경이 방긋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경은 팥죽을 먹는 하경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 먹었어?”
숟가락을 내려놓은 하경의 뺨을 이경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동생의 얼굴에서 열감이 느껴져 콧잔등을 찌푸렸다.
“열나는 것 같다.”
하경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마가 따끈따끈했다. 이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경을 보았다.
“괜찮아. 뜨거운 거 먹어서 그래.”
하경은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식탁 위의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언니가 해. 씻고 어서 가서 누워.”
이경이 하경의 팔을 잡았다. 열이 오르는 것이 영 불안했다.
“언니 일하고 와서 힘들잖아.”
“힘들기는. ……숨 쉬는 건 괜찮고? 통증은 없어?”
“뜨거운 거 먹어서 그런다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하경이 고개를 휘저었다.
“알았어, 얼른 가서 씻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 가게 언니한테 말하고.”
“진짜 괜찮다니까.”
하경은 빙긋 웃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하경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이경은 식탁 위의 그릇을 치웠다. 고무장갑을 막 끼려는데 쿵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경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무장갑을 내던지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경아.”
화장실 문을 연 이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화장실 바닥에 하경이 쓰러져 있었다.
이경은 하경에게 달려갔다. 숨을 확인하고, 정신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가 핸드폰을 찾았다.
“동생이 쓰러졌어요.”
119에 전화를 건 이경의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손만큼이나 목소리도 흔들렸다.
평소의 이경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경의 일에서는 이경은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와 주세요.”
전화를 끊은 이경은 흐느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바들바들 떨며 하경에게 심폐 소생술을 했다. 구급대원들이 집으로 올 때까지 이경은 울며 심폐 소생술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 2시였다.
이경은 하경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하경의 하얀 손에 얼굴을 묻으며 이경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경아, 언니 두고 가면 안 돼.”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이경은 몇 번이나 중얼거리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경은 누군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경이 기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경을 보고 있었다.
“하경아, 괜찮아?”
“응.”
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창백한 하경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었다. 어제는 심장이 조각나는 줄 알았다.
하경이 잘못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이경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언니, 미안해.”
하경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이경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언니 너무 무서웠어, 하경아.”
이경이 눈물을 닦아 주는 하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경은 힘없이 웃으며 이경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하경의 힘에도 위로가 되었다.
“이제 괜찮아.”
“응.”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경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이경은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출근하지 못할 것 같다. 재하에게 연락하려다 어제 일이 생각나 망설여졌다.
고민하다 이경은 황 비서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집에 일이 생겨 출근을 못 할 것 같다고 서 전무님께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바로 성현에게 연락을 했다.
“팀장님, 저 오늘 동생이 많이 아파서 WR 산업에 출근 못 할 것 같습니다.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려요.”
—동생이 많이 아파?
성현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하경에 대해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꽤 심각했다.
“병원이에요.”
—병원? 괜찮은 거야, 차 변호사?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병원 어디야?
성현의 물음에 이경은 망설이다 어느 병원인지 알려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었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
“출근 안 한다고?”
황 비서에게서 이경의 말을 전해 들은 재하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제 그 일이 있고 이렇게 출근을 안 하면 나 돌아 버리라는 얘기인가. 재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책상을 툭툭 쳤다.
“집에 일이 생겼답니다. 전무님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재하는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황 비서가 나가고 핸드폰부터 집어 들었다. 차이경, 건방지게.
재하는 이경이 자신이 아닌 황 비서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에 속이 뒤틀렸다. 이대로 도망이라도 치겠다는 건가, 괘씸하게.
재하는 바로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오래도록 이어지다 이경이 전화를 받았다. “차이경.”
—네, 전무님.
딱딱한 이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기운 없어 보이는 목소리라 재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황 비서가 아니라 나한테 직접 연락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무슨 집안일이 그렇게 바쁘셔서 회사도 안 나와?”
—개인적인 일입니다.
더 묻지 말라는 듯 딱 자르는 게 얄미워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휴가 써 본 적 없어, 차이경? 명확한 사유가 있어야지.”
—윤 변호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네 상사는 아니다?”
—…….
침묵하는 이경에게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는데 ‘보호자분’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인가, 싶어 재하의 눈썹이 잠시 가운데로 모아졌다.
—내일은 출근할 겁니다. 내일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끊겠습니다.
이경은 조금은 빠른 어투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재하는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어제 일로 도망간 건 아닌 것 같고.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성현에게 전화해 물어볼까 하다가 자존심이 상해 그만두었다. 대신 황 비서를 괴롭히기로 했다.
“차 변호사 무슨 일인지 차 변호사 모르게 알아 와. 세 시간 줄게, 황 비서.”
황 비서를 안으로 불러들인 재하가 입을 열었다.
“차 변호사님 모르게요?”
황 비서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 모르게. 황 비서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물론입니다.”
재하의 말에 황 비서가 빠르게 대답했다.
황 비서는 재하의 말대로 그 정도 능력은 되었다. 두 시간 만에 이경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왔다.
“차 변호사님 동생이 많이 아픈가 봅니다.”
“동생이?”
“어제 동생분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 갔다고 차 변호사님 옆집 주민이 그러더라고요. 동생분 한유 병원에 입원한 거 확인했고요. 심장이 많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심장 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 올라가 있더라고요.”
“심장 이식?”
돈 좋아한다던 이경의 말이 재하의 귓가에 울렸다. 재하는 못 견디게 이경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차 변호사님 생각보다 좀 힘들게 사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 봤더니 집이 아주…….”
황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경의 집이 어떤지 알기에 재하는 황 비서의 반응을 이해했다. 태풍 한 번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집이었다.
“옆집 주민 말로는 자매만 둘이 사는데 달에 한 번씩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돈을 받으러 온답니다. 사채업자 같습니다.”
“사채?”
아픈 동생에,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사채까지. 아주 불쌍한 요소는 골고루 갖추었네. 황 비서에게 이경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재하는 이경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좀 더 조사해 볼까요?”
“응, 좀 더 자세히 알아 와.”
황 비서의 말에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 비서가 방을 빠져나가고 재하는 시간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이경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
회사를 빠져나온 재하의 차가 백화점으로 향했다.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나온 재하는 곧바로 한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과일 바구니를 가지고 차에서 내린 재하는 성큼성큼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가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경의 모습이 보였다. 성현의 품에 안겨 있는 이경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