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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2화 (32/83)

32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경은 왈칵 짜증이 났다. 왜 그딴 말로 나랑 윤 변호사님을 모욕해.

걱정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온 게 허무했다. 고작 이런 소리나 듣자고 서재하 걱정하면서 달려온 게 아니다.

“그럼 뭐 했냐고.”

“밥 먹었습니다.”

이경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일찍 가랬잖아. 윤성현 눈에 띄지 말고 일찍 가라고.”

재하가 거칠게 이경의 한쪽 어깨를 잡아챘다. 그 바람에 이경의 몸이 흔들렸다. 이경은 사나운 눈으로 재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윤 변호사님 눈에 띈 거 아닙니다. 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 변호사님 기다렸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

이경은 그냥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서재하 이러는 게 짜증 나서. 서재하 걱정한 내가 짜증 나서.

“하.”

이경의 말에 재하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고는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하찮게 쓰지 말라며. 근데 왜 하찮게 굴어, 차이경.”

“화나셨습니까? 제가 윤 변호사님이랑 식사를 해서 화가 나신 겁니까? 대체 그게 왜…….”

이경이 재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왜? 왜! 존경이라며? 그게 존경하는 상사를 보는 눈빛이야? 술집 여자도 남자를 그런 표정으론 안 보겠다.”

“……존경이 아닐 수도 있죠.”

술집 여자? 무슨 자격으로 네가 날. 재하의 말에 짜증을 넘어 화가 난 이경은 재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씨.”

재하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한 재하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제가 서 전무님 사람이라고 해도 제 사생활까지 참견하실 권리 없습니다.”

이경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현에게 서재하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바로 후회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렇게 기어오르면 섹시한데, 차이경.”

재하가 이경에게 바투 서며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한껏 비틀린 입술이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재하의 숨결이 볼에 닿아 이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별일 없으신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은 옆으로 몸을 틀었지만 재하가 바로 가로막았다.

“얘기 안 끝났어.”

“끝난 것 같은데요?”

“차이경이 좋아. 늘 입 맞추고 싶어. 지금은 자고 싶고.”

재하가 이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억눌린 그의 목소리가 꼭 한숨 같았다.

“안타깝네요. 전 별로.”

이경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재하가 이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하 때문에 다리가 꼬인 이경이 침대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대로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침대로 눌렀다. 방심하고 있던 이경은 침대에 누운 자세가 되었다.

재하가 이경의 몸 위로 허리를 구부렸다. 이경이 다급하게 재하의 팔을 잡았다.

“서 전무님.”

재하가 팔을 잡은 이경의 손을 잡아채 눌렀다. 그러고는 입을 맞출 듯 이경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이경을 향한 욕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이 어떤지 보여 줘?”

침대로 무릎을 올린 재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경의 몸을 양쪽 무릎으로 가둔 채 재하가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넘실거리는 욕망이 두 눈에 가득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경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재하의 어깨를 밀어냈다. 서재하 머릿속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어깨를 밀치는 이경의 손이 귀찮았는지 재하가 그 손마저 붙잡아 침대에 결박시켰다.

“차이경이 좋아 미치겠어.”

“전 아닙니다.”

이경이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손목을 잡은 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손목을 세게 잡은 재하 때문에 이경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재하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손목을 잡은 손이 좀 느슨해졌다. 이경이 잡힌 한쪽 손을 빼내 재하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비키십시오.”

“차이경.”

아무리 때려도 재하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경은 재하를 노려보았다.

“나 안 좋아할 거면 다른 새끼도 좋아하지 마.”

“누구를 좋아하고 말고는 제가 정합니다.”

“그럼 날 좋아하도록 노력을 해 보든가.”

낮게 욕을 내뱉고 재하가 입을 맞출 듯 이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재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밀치고 때려도 제가 원하는 짓을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경은 다가오는 재하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재하의 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픽, 재하의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네가 그래 봤자, 하는 눈빛이라 이경은 약이 바싹 올랐다. 재하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래 봤자였다. 재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이경에게로 내렸다.

그 상태로 재하는 그녀의 입술에 기어이 입을 맞추었다. 말캉한 두 입술이 서로에게 닿았다. 이경은 한순간 머리가 아뜩해져 재하의 목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이내 입술 사이를 가르고 재하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입천장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이경의 혀를 얽었다. 혀와 혀가 얽히고설켜 짜릿한 감각을 만들어 냈다.

낯선 감각에 이경이 흠칫 놀랐다. 정신없이 입안을 헤집는 재하의 움직임에 이경의 손이 재하의 목에서 툭 떨어졌다.

“으음.”

저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이 낯설어 이경은 재하를 세게 밀쳐 냈다.

생각보다 순순히 재하가 이경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에게서 벗어난 이경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숨을 토해 내고 이경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재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쌍방 과실로 해 두죠.”

침대 옆에 선 이경이 한쪽 뺨이 붉어진 재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뒤 흐트러진 옷을 정돈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대로 돌아선 이경은 바닥에 떨어진 가방과 옷을 챙겨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스위트룸 문이 닫히자마자 이경은 쿵쾅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에 올라가 있던 손이 천천히 입술로 올라갔다.

재하의 입술이 닿았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고 이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또라이 서재하, 양아치 서재하, 나쁜 놈 서재하, 를 중얼거리며 이경은 호텔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

침대에 누워 재하는 하얀 천장만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경에게 맞은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경에게 한 대 시원하게 맞고 나니까 정신이 들었다. 분노로 부글부글 끓던 가슴에 이경이 차가운 물을 끼얹어 주고 떠났다.

“미친 새끼.”

재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발정 난 새끼도 아니고 입 한번 맞춰 보겠다고 목을 쥐고 있는데도 달려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단단히 돌았다.

재하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차이경이 혐오스럽다고 이제 안 본다고 하면 어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쉬며 재하는 이경의 입술이 닿았던 제 입술을 만져 보았다.

“젠장, 빌어먹게 좋네.”

이경과 맞닿았던 입술도 좋았고, 목에 닿았던 이경의 손길도 좋았다. 뺨을 치던 매운 손마저 미치게 좋았다.

이경의 손이 몸 구석구석에 닿는 상상을 한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등을 훑어 내리고, 가슴을 쓰다듬고, 물건을 쥐고 흔드는 못된 상상. 몸이 뻐근해져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변태 새끼도 아니고, 중얼거렸지만 자꾸만 곱씹게 된다. 결국 변태가 맞다고 인정하며 재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셔츠가 벗겨지고, 바지가 벗겨지고, 각이 잘 잡힌 탄탄한 몸이 침실 조명 아래에 드러났다.

한숨을 깊게 내쉰 재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성이 난 몸을 식히기 위해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치고 나온 재하는 미니바로 향했다. 맥주를 꺼내 마시고, 소파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았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니 이경이 했던 말들이 가슴을 후벼 팠다. 뺨을 때린 건 아프지도 않았다.

붉은 기운은 샤워하는 동안 사라져 흔적도 없다. 하지만 이경의 말들이 칼날이 되어 심장에 꽂힌 기분이다.

‘윤 변호사님 눈에 띈 거 아닙니다. 제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 변호사님 기다렸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

‘존경이 아닐 수도 있죠.’

이경의 말을 떠올리며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낮게 욕을 내뱉고 재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또다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나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몸을 잠식했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재하는 정신없이 소파 주변을 돌아다니며 욕을 내뱉었다. 차이경을 다시 끌어다가 눈앞으로 데려오고 싶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재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핸드폰을 테이블에서 주워 황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 비서. 차이경 변호사에 대해서 전부 알아 와. 차이경에 관한 거라면 아주 사소한 거라도 다 알아 와.”

황 비서가 전화를 받자마자 재하는 지시를 내렸다.

—차이경 변호사님이요?

당황스러워하는 황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과거는 어땠는지, 가족 관계, 빚은 있는지. ……그리고 약점은 뭔지.”

전화를 끊은 재하는 약간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차이경 약점 쥐고 나 좋아하라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이 난다.

“개새끼네.”

본인에게 욕을 해 주고 재하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차분한 얼굴로 화를 내고 떠난 이경이 눈에서 아른거린다.

개새끼면 좀 어때, 다른 놈한테 뺏기는 모자란 새끼보다는 낫지.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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