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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1화 (31/83)

31화

이경이 웃는 얼굴로 꾸벅 성현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 퇴근해?”

“네.”

성현의 물음에 이경이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 할까?”

“네.”

이경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걸 기대했었다. 성현과 함께 먹는 저녁을.

함께 회사를 나온 이경과 성현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따뜻한 국물 요리가 먹고 싶어 이경은 저녁 메뉴로 수제비를 선택했다.

“근데 왜 오신 거예요?”

이경은 성현에게 수저를 건네며 물었다.

“회장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성현이 이경이 내민 수저를 받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뵈니까 더 반가워요.”

“차 변호사 봤으면 좋겠다 했는데 이렇게 만났네.”

“타이밍이 잘 맞았어요.”

이경이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만든 타이밍이지만.

“다행히 잘 맞았네.”

성현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경은 성현을 따라 웃었다. 월요일에 한 번씩은 꼭 성현을 보는데도 정말 오랜만에 그를 만난 기분이었다.

“서 전무 옆에서 일하는 거 정말 괜찮아?”

“저 볼 때마다 물어보시네요.”

이경은 매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성현 때문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걱정되니까.”

“서 전무님 그렇게 나쁜 분 아니세요. 생각도 깊으시고, 따뜻한 분 같으세요. 성격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이경이 열심히 재하를 두둔했다. 몇 달 옆에서 지켜본 서재하는 성질머리가 더럽긴 해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따스하고 가끔은 귀여운.

“그래? 다행이네.”

뭐 실수했나 싶을 정도로 성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빠르게 지워졌다.

“……팀장님, 피곤하세요?”

어두워진 성현의 얼굴을 이경이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서 전무가 차 변호사한테 잘해 주나 봐?”

“매일 혼나요. 밥 제대로 안 먹는다고. 퇴근도 빨리하라고 닦달하시고. 집에 가면 밥 많이 먹고 일찍 자라고 매일 잔소리세요.”

매일 엄마처럼 잔소리해 대는 재하를 생각하며 이경이 작게 웃었다.

“서 전무가 차 변호사한테 잘해 준다니 다행이긴 한데, 내 기분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성현이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경은 가만히 성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는데, 성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질투하나 보다.”

이경과 시선을 맞추며 성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

짧게 신음한 이경은 질투라는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한다는 말이 부끄럽고 쑥스러워 고개를 들고 성현을 볼 수가 없었다.

때마침 수제비가 나왔다. 직원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경의 고개는 계속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터였다.

“먹자.”

이경 몫의 수제비를 떠 주며 성현이 말했다.

“네.”

이경은 따뜻한 국물과 함께 수제비를 먹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재하의 표정이 사나웠다. 재하는 힐끔 모니터 하단에 띄운 이경의 사무실 CCTV 영상을 보았다. 불이 꺼진 사무실은 보이는 게 없었다.

“수작 부릴 줄도 알고, 차이경.”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재하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경과 성현이 마주치는 게 싫어 이경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했다. 사무실 불 끄고 나가는 이경의 모습에 안도했는데, 요 앙큼한 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윤성현을 기다렸다.

성현은 회장님 심부름을 왔다며 재하의 사인이 필요한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성현에게서 간략하게 계약 내용을 듣고, 사인을 마쳤다. 그만 가려는 성현을 재하가 붙잡고 늘어졌다. 혹시라도 이경과 마주칠까 봐.

이경이 회사에서 멀리 떠났겠다 싶을 때쯤에서야 재하는 성현을 놓아주었다. 이상할 법도 하건만 성현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 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그건 내가 영감님한테 직접 줄게. 놓고 가.”

재하는 성현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따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성현은 재하의 책상 위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고 방을 빠져나갔다.

서류를 가만히 쳐다보던 재하는 오늘 호텔에서 자기로 했다는 게 떠올랐다. 이경에게 김 실장에게 11시에 보고 올리라고 했으니 알리바이를 위해 오늘은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젠장.”

욕을 내뱉은 재하가 서류를 들고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성현에게 다시 서류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가까워졌는데 이경이 보였다. 성현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차이경이.

이경은 성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경이나 성현이나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재하의 시선에서 사라졌지만 이경이 계속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차이경, 그런 표정도 있었네. 재하는 욕을 내뱉으며 실소를 흘렸다.

표정이 많이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재하는 사나운 표정으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오래도록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재하가 차를 몰고 간 곳은 이경의 집이었다. 여전히 낡아빠져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살 것 같은 곳이었다.

차이경은 이런 곳에서 잘도 사네. 재하는 시트에 몸을 깊게 기대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경에게 막 전화를 하려는데 성현의 차가 빌라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재하는 차에서 내리는 이경과 성현을 보았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얼굴에는 풋풋할 정도로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연인으로 발전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하, 분위기 좋네.”

재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성현의 손이 이경의 뺨에 닿았다. 무언가가 묻은 건지 닦아 내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재하의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하얗게 질릴 때까지 재하는 핸들을 쥔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이경은 수줍은 얼굴로 성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빌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성현은 이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차를 타고 그곳을 벗어났다.

이경과 성현의 모습을 지켜본 재하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내 사람 한다면서, 차이경.”

그게 뭐든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하는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칠 것 같아 거칠게 차를 몰았다.

호텔로 온 재하는 코트를 벗지도 않고 미니바 냉장고를 열어 맥주부터 꺼내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 짜증이 치밀어 캔을 집어 던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캔에서 다 마시지 않은 맥주가 줄줄 흘러나왔다.

재하는 거칠게 코트와 재킷을 벗었다. 그것들을 소파에 던져 버리고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낭랑한 이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재하는 짜증과 기쁨이 동시에 솟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호텔로 와.”

재하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이경을 윤성현한테 뺏길 수는 없었다. 차이경은 내 사람이니.

***

—호텔로 와.

가라앉은 재하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재하는 그 말을 내뱉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나. 이경은 고개를 갸웃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경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며 이경은 재하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이유를 생각했다.

윤 변호사님과 무슨 심각한 얘기라도 한 걸까. 윤 변호사님은 별다른 말 없으셨는데.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되어 택시에서 내려 스위트룸으로 향하는 이경의 걸음이 빨라졌다.

스위트룸 초인종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전무님.”

이경은 바로 재하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굳어 있는 얼굴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이경은 재하가 뿜는 사나운 기운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재하는 말없이 뒤로 물러선 이경의 팔을 잡아 스위트룸 안으로 끌어당겼다. 문이 쾅 닫히고, 재하는 그대로 이경을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경이 재하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무슨 큰일이 생긴 건가. 이경은 재하가 걱정되었다.

재하는 이경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놓으며 삐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된다고 했잖아, 차이경.”

“네?”

이경은 재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인지.

“왜 말을 안 들어?”

“전무님.”

“내가 말했잖아.”

재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음산하게 퍼졌다.

“제가 무언가 실수를 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실수? 했지. 씨, 기분 더럽게.”

재하는 이경이 들고 있는 가방을 빼앗아 던져 버리고, 이경에게 바짝 붙어 코트를 벗겨 냈다.

이경은 말없이 재하가 하는 걸 두고 보았다.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고, 재하는 이경의 재킷에 손을 댔다.

재킷마저 벗겨지자, 이경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서재하 전무님.”

이경이 뒤로 물러선 채 또박또박 재하를 불렀다.

“끼를 부릴 거면 나한테만 부렸어야지.”

재하가 이경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섰다.

이경은 재하가 다가선 만큼 뒤로 물러섰다.

“윤성현한테 끼 부리는 걸 왜 내가 보게 해.”

“……무슨 말씀이신지.”

“차이경, 왜 내 기분을 엿같이 만드냐고.”

재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경에게 다가왔다.

다시 뒤로 물러선 이경은 침대에 다리가 걸려 그만 그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불안한 눈으로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뭐 했어? 윤성현이랑.”

허리를 숙여 침대에 걸터앉은 이경과 눈을 맞추며 재하가 말했다.

“네?”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같이 뒹굴기라도 했어? 다정하기가 금방 침대에서 뒹굴고 나온 사이 같던데.”

말을 내뱉는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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