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딴 계약-30화 (30/83)

30화

사무실로 돌아온 이경은 동그란 테이블 위에 검은 봉지를 내려놓았다. 문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재하가 이경에게 말했다.

“차이경, 혼자 먹지 말고 기다려.”

“네.”

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가 떠나고 이경은 홍시 두 개를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개수대에서 홍시를 씻고 돌아와 보니 이미 재하가 와 있었다.

“도망간 줄 알았잖아.”

재하가 안으로 들어오는 이경을 보며 말했다.

“씻어 왔습니다.”

이경은 테이블 위에 있는 앞접시와 티스푼에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재하가 가져온 모양이다. 이경은 재하의 앞접시에 홍시를 내려놓았다.

“드세요.”

이경은 재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 몫의 앞접시와 티스푼이 재하의 옆자리에 있어 이경은 손을 뻗어 제 쪽으로 끌어왔다.

“눈치 없기는.”

재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하나 더 씻어 올까요?”

구겨진 재하의 얼굴에 홍시를 하나만 줘서 그런가 싶어 이경이 입을 열었다.

“먹어. 먹기나 해.”

잠시 재하의 얼굴에 한심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경은 재하의 표정을 무시하고 홍시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잘 익은 과육이 드러났다.

이경은 티스푼으로 홍시를 떠먹었다. 달콤함이 입에 퍼졌다. 퇴근길에 홍시를 사서 하경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재하가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드십니까?”

껍질조차 벗겨 내지 않은 재하 몫의 홍시를 보며 이경이 물었다. 홍시 좋아하는 것 같더니 왜 안 먹지.

“아.”

재하가 먹여 달라는 듯 입을 벌렸다.

뭐야. 아기 새도 아니고 입은 왜 벌려. 이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나한테 미안하잖아. 사과 한마디로 대충 끝낼 생각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재하는 다시 입을 ‘아’ 벌렸다.

또라이. 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의 옆에 앉았다.

재하 몫의 홍시 껍질을 벗기고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네 홍시는 절대 안 된다?”

재하가 입을 열었다.

내 홍시 달라는 소리였나. 욕심 많네, 부자면서. 이경은 홍시 하나 남은 건 재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티스푼으로 홍시를 떠 재하를 쳐다보았다.

“아.”

재하가 다시 입을 벌렸다. 이경은 벌어진 재하의 입에 조심스럽게 홍시를 넣어 주었다.

홍시를 받아먹은 재하는 이경이 쥐고 있는 티스푼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자신도 홍시를 떠 이경의 입술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경은 입을 벌리지 않고 가만히 재하를 쳐다보았다.

“입 벌려.”

“괜찮습니다.”

“이게 미안한 사람의 태도야?”

재하가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제 숟가락으로…….”

남이 먹던 숟가락을 입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이경은 자신의 티스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재하가 이경의 손목을 잡아챘다.

“차이경, 결벽증이야?”

“보통은 같은 숟가락 안 씁니다.”

“까다롭네.”

중얼거린 재하가 티스푼에 있는 홍시를 먹어 버렸다. 그러고는 이경의 홍시와 티스푼을 끌어당겨 제 앞에 놓았다.

재하는 이경의 스푼으로 홍시를 떠서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먹겠습니다.”

이경이 티스푼을 잡으려고 하자, 재하가 안 된다는 듯 손을 뒤로 뺐다.

결국 이경은 눈치를 보다 재하가 내민 홍시를 받아먹었다. 이 인간이 대체 왜 이럴까. 홍시를 오물거리며 이경이 재하를 빤히 보았다.

“뽀뽀해도 돼?”

재하가 불쑥 물었다.

당연히 안 되지. 뭘 물어.

“안 됩니다.”

이경이 바로 대답했다.

“아쉽네.”

재하는 중얼거리더니 먹여 달라는 듯 입을 벌렸다.

오해한 죄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며 이경은 재하에게 홍시를 먹여 주었다. 입을 우물거린 재하는 곧바로 이경에게 똑같이 티스푼을 내밀었다.

받아먹기는 했지만 이경은 불편했다. 그냥 각자 먹으면 안 되는 건가. 꼭 이렇게 먹어야 하는 걸까. 이경은 의문을 담은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왜 또 그렇게 봐. 자꾸 뽀뽀하고 싶게.”

“안 됩니다.”

“단호하니까 섹시하네. 키스하고 싶게.”

“…….”

이경은 괜히 입술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재하의 시선을 피해 홍시를 티스푼으로 툭 건드렸다.

그때 불쑥 이경의 앞으로 홍시가 담긴 티스푼이 다가왔다. 이경은 시선을 들어 재하를 보았다.

“입 벌려, 차이경.”

나지막한 재하의 목소리가 이경의 귀에 울렸다.

이경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조금은 느린 동작으로 재하가 티스푼을 이경의 입안으로 넣었다.

이경의 입술이 티스푼을 머금었다. 재하가 넣어 준 티스푼이 이경의 혀를 건드리고, 달콤한 홍시가 입안에서 흔들렸다.

곧, 재하가 손에 쥐고 있는 티스푼이 이경의 입안을 빠져나갔다.

재하는 이경의 입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닦아 주고는 홍시가 묻은 제 손가락을 핥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하는 이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경은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덥지 않으세요? 창문 좀 열겠습니다.”

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뒤쪽에 있는 창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활짝 열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심장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새별이 얘기는 다른 사람한테 들어가게 하지 마.”

등 뒤에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창에서 몸을 돌려 재하를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 쓸데없이 집요해. 알려지면 새별이 기어이 찾아낼 거고, 애 상처받아. 새별이 할머니는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함구하겠습니다.”

이경은 재하의 말뜻을 이해했다.

재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문으로 향한 그가 문을 열기 직전 이경을 돌아보았다.

“차이경.”

“네.”

“여자 할 생각은 전혀 없고?”

재하는 삐딱한 자세로 문에 기댄 채 물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이경의 머리가 가볍게 흩날렸다. 차가운 바람을 등진 채로 서서 이경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전무님께 하찮게 쓰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찮은 건지 모르겠네.”

재하의 시선이 발끝으로 향했다.

“제 야망만 예쁘게 봐 주십시오.”

이경의 말에 재하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들었다. 이경과 눈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예뻐. 차이경이 품은 야망도, 차이경도. 여자도 하고, 내 사람도 하고. 둘 다 시켜 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 말해.”

재하가 몸을 바로 세웠다.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처받게.”

재하는 픽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떠나고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창문으로 돌아섰다. 왜인지 모르게 열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차가운 바람에 식히고 창문을 닫았다.

숨을 몰아쉰 이경은 책상에 앉았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일뿐이라는 듯 다시 일에 집중했다.

***

이경의 삶에 여유가 생겼다. 로펌에서는 새벽 퇴근이 일상이었는데, WR 산업으로 파견을 온 이후로는 6시면 재하에게 강제 퇴근을 당했다.

덕분에 재하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지만 않으면 이경은 하경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6시가 조금 넘자, 재하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 퇴근 단속을 하러 온 모양이다. 아니면 저녁 먹으러 가자고 왔거나.

“각서 쓰자.”

재하가 동그란 테이블 앞에 앉으며 말했다.

“아, 네.”

이경은 재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책상 서랍에 비치해 놓은 각서를 꺼냈다.

재하는 더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만나지는 않았지만 이경은 계속 그와 관련된 일을 했다.

주기적으로 가짜 각서를 만들고, 김 실장에게 시간 맞춰 보고도 올렸다. 전부 재하가 시킨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에게 다가간 이경은 각서와 펜을 내밀었다.

재하는 각서에 서명을 하고, 여자의 신상을 기재하는 칸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이름을 적는 칸에 ‘차이경’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서 전무님.”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하를 불렀다.

“왜?”

재하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 이름 쓰셨습니다.”

“사인해, 차이경.”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재하가 이경에게 각서를 건넸다.

이경은 재하가 준 각서를 받아 그가 써 놓은 이름을 고쳤다. ‘차이경’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에 ‘ㅣ’와 ‘ㄴ’을 추가해 ‘채인경’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재롱도 떨 줄 알아?”

재하가 이경을 보며 픽 웃었다.

“재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김 실장님께 11시쯤 보고 올리면 되겠습니까?”

“응.”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앞에는 황 비서가 서 있었다.

“전무님, 윤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황 비서가 이경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와 재하에게 말했다.

“윤 변호사?”

재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 비서를 따라 나가던 재하가 몸을 돌려 이경을 보았다.

“차이경, 빨리 퇴근해.”

“네.”

“빨리 가방 가지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퇴근 못 시켜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재하는 이경을 닦달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퇴근해.”

재하는 경고하듯 말하고는 황 비서를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고 이경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성현이 왜 왔는지 궁금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꾸물거리던 이경은 얼른 코트와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이경은 버튼을 누르지 않고 그 앞에서 서성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시선에 들어오는 이는 이경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더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발걸음 소리마저 끊겼다.

“얘기가 길어지나.”

이경은 발로 툭툭 바닥을 치며 중얼거렸다.

퇴근하는 길인 척 성현과 우연한 만남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쉽지가 않았다. 딱 5분만 더 기다렸다가 안 오면 그냥 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이번에는 성현일 것 같아 이경은 매무새를 정돈했다.

“차 변호사?”

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은 웃으며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성현이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