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끼 부리지 마, 차이경.”
입을 연 재하의 귀가 붉었다.
“제가요?”
내가 뭘 했다고. 가만히 있다가 끼 부린 사람이 된 이경은 눈을 느리게 껌벅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끼 부리지 말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듣지.”
재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답답한 듯 이미 헐렁한 넥타이를 아예 풀어 버렸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네가 뭘 알아.”
재하는 넥타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테이블 위를 두리번거렸다. 찾는 게 없는지 “또 안 줬네.”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손으로 먹을까? 수저 줘.”
주방 입구에 서서 불량한 얼굴로 재하가 말했다.
어른 공경이나 예의 바름 같은 건 어디 땅에다 묻어 놨는지 주인 할머니에게 수저 달라는 태도가 참 불량스러웠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이경은 감탄하며 재하가 주인 할머니에게 수저를 받아 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리로 돌아온 재하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경에게 건네주었다. 수저를 받아 들며 이경이 입을 열었다.
“주인분과 많이 친하신가 봐요.”
“질투해?”
재하가 양파지를 집어먹으며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이경은 고개를 젓고는 재하를 따라 양파지를 입에 넣었다.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양파가 씹혔다.
양파지 몇 개를 더 먹고 있자 갈비탕 두 그릇이 나왔다.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는 갈비탕은 냄새부터 맛있었다.
“고기 아주 실해. 먹어 봐. 아가씨도 많이 먹어.”
“잘 먹겠습니다.”
주인 할머니에게 이경이 눈인사를 하고는 갈비탕 국물을 떠먹었다. 국물이 깊고 진했다.
“솜씨 좀 발휘했네.”
재하가 주인 할머니를 보면서 웃었다.
“언젠 맛없었어?”
“맛이야 늘 있지. 근데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고.”
눈을 흘기는 주인 할머니에게 재하가 말했다.
“으휴, 하여간. 아가씨, 이 총각 감당하려면 두 그릇은 먹어야겠네. 밥 말아서 싹싹 다 먹고 가.”
주인 할머니는 이경의 어깨를 툭툭 토닥여 주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경은 주인 할머니의 말대로 밥을 말아 뚝배기를 싹싹 비웠다. 이경이 남긴 거라고는 뼈다귀밖에 없었다.
“잘 먹으니까 예쁘네.”
깨끗하게 비운 이경의 갈비탕 뚝배기를 보며 재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이경이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응.”
짧게 대꾸하고 재하는 뚝배기 두 개를 양쪽 손에 나눠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서 재하가 성질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끌고 다니는 거 기껏 사 줬더니 왜 안 써? 이렇게 무거운 걸 자꾸 들고 다니니까 팔이 아프지. 뚝배기 말고 그릇을 스텐으로 바꾸든가.”
“그게 맛이 있냐? 여기에 나가야 맛이 있지.”
주방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경은 남은 그릇들을 챙겨 주방으로 갔다.
주방 입구에 버티고 서 있던 재하는 이경을 쓱 보더니 그녀가 가지고 온 그릇을 빼앗아 할머니에게 넘겨주었다.
“아가씨, 이 총각 좀 빨리 데려가. 정신 사나워 죽겠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이경은 작게 웃으며 주인 할머니와 재하를 번갈아 보았다.
“확 돈 안 내고 도망갈까 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하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스름돈 없는데. 만 원짜리 없어?”
“없어. 그냥 다음에 줘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주인 할머니는 눈을 흘겼지만 재하가 왜 굳이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는지 안다는 듯 금방 얼굴을 풀었다.
“새별이는 학원 잘 다녀요?”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재하가 물었다.
“잘 다녀. 이 머리도 새별이가 말아 준 거야.”
“어쩐지 바글바글 예쁘다 했어. 새별이 할머니 시집가도 되겠네. 주변에 이쁜 영감은 없고?”
“에라, 시집은! 구찮게 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가.”
능글맞은 재하의 말에 주인 할머니는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재하를 쫓아냈다.
재하는 웃으며 “갑니다.” 말하고는 성큼성큼 사라졌다. 재하가 가게를 나가고, 이경은 주인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아가씨, 잠깐만.”
주인 할머니가 이경을 붙잡아 두고 창고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주인 할머니는 검은 봉지를 이경에게 내밀었다.
“홍시. 아주 달아. 가서 먹어.”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갈비탕 먹고 싶으면 또 와. 아가씨한테는 돈 안 받을게.”
“네.”
이경은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주인 할머니에게서 돌아섰다. 가방과 코트를 챙겨 밖으로 나가 보니 재하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있었다.
“해 주면 얼마 줄 건데요?”
“얼마 생각하고 있는데?”
“풀 서비스는 10만 원?”
근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영 꺼림칙했다. 서재하 설마 이렇게까지 양아치야?
이경은 재하에게 크게 실망하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자아이를 보호하듯 재하 앞에 선 이경은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전무님.”
“뭐가 안 돼?”
“누가 봐도 미성년자입니다. 문제 됩니다.”
이경은 입에 담기도 싫었지만 정색하고 말했다.
“뭐?”
재하는 이경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다가 이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게 날 뭐로 보고, 짜증스레 중얼거린 재하가 손으로 이경의 양쪽 뺨을 꼬집듯이 잡아 옆으로 쭉 늘였다.
“차이경이 날 그딴 쓰레기로 봤다는 거지. 괘씸하게.”
재하에게 볼이 붙잡힌 이경은 실수를 바로 파악하고 “죄송합니다.” 사과했다. 재하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이경의 볼에서 손을 뗐다.
여자아이가 재하의 옆으로 가서 서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경을 보았다.
“누구예요, 아저씨?”
“내 스토커.”
여자아이의 물음에 재하가 대답했다.
이경은 재하가 잡아 늘인 볼을 문지르며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재하와 여자아이는 잘 아는 사이 같았다.
“푸핫. 언니, 정말 아저씨 스토커예요?”
여자아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경을 못마땅한 얼굴로 한 번 쳐다봐 주고 재하가 여자아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너 근데 왜 여기 있어? 학교 안 갔어? 학생이 학교를 잘 다녀야지.”
“개교기념일이거든요?”
재하의 타박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난 회사 창립 기념일에도 출근해.”
“학생이랑 회사원이랑 같아요?”
“안 같지. 헛짓거리하지 말고 학교랑 학원 잘 다녀.”
“잘 다니고 있거든요? 나만 보면 잔소리야. 내가 아저씨 남의 일에 막 끼어들 때부터 알아봤어. 우리 할머니 말대로 아저씨 오지랖은 미국 땅보다 넓어.”
“아주 예의 바르고 좋아, 오새별.”
재하가 여자아이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잡고는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차 빼 올 테니까 있어.”
“아, 네.”
이경은 얼른 공손하게 대답했다.
여자아이를 새별이라고 부른 걸 보니 주인 할머니 손녀인 모양이다. 근데 왜 그런 대화를 해서 사람을 오해하게 해.
공영 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가는 재하의 뒷모습을 보며 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아까 전무님이랑 무슨 대화 한 건지 물어봐도 돼요? 내가 서 전무님 전담 변호사라서요.”
이경이 명함을 꺼내 새별에게 주었다.
“아, 원조 교제 뭐 이런 거 생각했어요?”
명함을 받아 든 새별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딱 그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 얘기했어요. 아저씨가 할머니처럼 파마시켜 달라고 해서 장난친 거예요.”
“아, 오해해서 미안해요.”
이경은 미안한 얼굴로 새별을 보았다.
“전 괜찮은데 아저씨 되게 기분 나빴을걸요? 아저씨 그런 거 엄청 싫어해요. 모르는 사람한테 주먹도 날릴 만큼.”
새별이 헤헤 웃었다.
***
“차이경, 하!”
운전을 하는 재하는 생각할수록 이경이 괘씸했다.
나를 고작 그딴 새끼로밖에 안 봤다 이거지. 이걸 어떻게 괴롭혀 줄까. 재하가 한쪽 입술을 올렸다.
새별을 알게 된 건 올봄이었다. 술병이 났다는 준오 때문에 회사 근처 해장국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던 어느 날.
“술을 작작 처먹어, 새끼야.”
애정 어린 잔소리를 준오에게 하고 있던 재하는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옆 테이블에는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와 재하 또래의 남자가 함께 있었다.
“해 본 적은 있어요?”
“……아뇨.”
남자의 물음에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그럼 처음.”
여자아이의 대답에 남자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재하는 숟가락을 든 채로 계속 그 테이블을 주시했다. 저 미친 새끼 아무래도 수상하다.
“왜?”
해장국을 먹던 준오가 입을 열었다.
재하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준오의 고개도 덩달아 옆 테이블로 돌아갔다.
“처음이니까 20은 주셔야 해요.”
“너무 비싼데.”
여자아이의 말에 남자가 목을 긁었다.
“싫으면 말구요.”
“그러면 모텔 말고 우리 집으로 가도 되나? 20에 모텔비까지 하면 좀 부담스러워서.”
남자가 여자아이를 힐끔 보며 말했다.
“씨발, 역겨워서. 해장국이 넘어오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재하는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옆 테이블로 가 남자의 멱살부터 잡아 일으켰다.
“야, 서재하!”
준오가 놀라 재하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재하가 준오의 손을 뿌리치고, 멱살을 잡은 남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개새끼가 진짜. 너 뭐 하냐? 애 데리고?”
“누,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겁에 질린 남자가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말했다.
“왜 이러세요? 내가 왜 이러겠어요, 이 역겨운 새끼야.”
재하의 주먹이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