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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7화 (27/83)

27화

이경의 시선이 재하의 손가락을 따라 카메라에 닿았다. 카메라가 이경이 사용할 책상을 정면으로 찍고 있었다.

“기분 나빠?”

“아닙니다.”

이경은 즉각 대답했다.

어차피 일만 할 텐데 카메라를 달든 도청기를 달든 이경은 상관없었다.

“어쩔 수 없어. 서류 외부 유출 안 돼서 그래. 그리고 윤 변호사한테도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지 마.”

“월요일마다 제가 하는 일 보고 올려야 하는데요.”

이경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WR 산업에 파견 나가 있는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지난주에 했던 일들을 팀장인 성현에게 보고해야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을 하지 못하면 보고를 올릴 수가 없다.

“그냥 논다고 그래.”

“…….”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경은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재하를 보았다.

“알았어. 내가 주마다 보고할 거리 던져 주면 되잖아.”

이경의 눈빛에 재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네 아이디 카드.”

재하가 주머니에서 아이디 카드를 꺼냈다. 그런 후, 가까이 오라는 듯 이경에게 손짓을 했다.

이경은 책상에 기대선 재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하의 냄새가 이경의 코를 건드렸다.

늘 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익숙해진 건지 그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게 느껴졌다.

“차이경한테서는 매일 좋은 냄새가 나네.”

재하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가까이 다가온 이경의 목에 아이디 카드를 걸어 주었다. 재하의 손이 이경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손길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이경은 얼른 재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걸어 준 아이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방은 너랑 나밖에 출입 안 돼. 나갈 때는 꼭 문 닫고 다녀.”

“네.”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 이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어볼 거 있으면 내 방으로 바로 오고.”

“네.”

“나 보고 싶어도 바로 오고.”

“…….”

별로 안 보고 싶을 것 같아 이경은 대답 없이 재하를 응시했다.

“이건 안 걸려드네?”

재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전무님 말은 늘 경청하고 있습니다.”

“잘 듣고 있으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거지?”

재하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경이 말없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다소 어설픈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재하가 그런 이경을 가만히 보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툭 건드렸다. 이경의 볼이 재하의 손길에 살짝 흔들렸다.

재하가 건드린 뺨이 간질거렸다.

“보고 싶으면 내가 오면 되고.”

재하는 책상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이경은 재하가 건드리고 간 뺨을 문질렀다. 아직도 재하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듯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차이경 변호사,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일해.

그때,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경이 두리번거렸다.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는데 재하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이경은 실물이 더 예쁘네.

이경의 시선이 카메라로 향했다.

“감시하고 계신 겁니까?”

—악덕 고용주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경은 들고 있던 가방을 동그란 테이블에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코트를 의자에 걸어놓고, 이경은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보고 계십니까?”

—응.

“계속 보고 계실 생각입니까?”

감시받는 기분이라 신경이 쓰인 이경이 물었다.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하가 계속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괜히 배가 간질거렸다.

—설마. 관음하는 변태도 아니고.

“다행입니다. 일 시작하겠습니다.”

이경은 카메라에서 시선을 돌리고 서류를 검토했다. 그 이후로 더는 재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 번씩 신경이 쓰여 이경은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왠지 재하와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줄도 모르고 이경은 서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서야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재하였다.

“아, 노크.”

이미 열고 들어왔으면서 뒤늦게 노크를 안 한 게 떠올랐는지 재하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일은. 점심 먹으러 가자고 왔지.”

“아, 네.”

이경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고개를 든 이경이 다시 재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무님 드시고 오십시오.”

“너는? 약속 있어?”

재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아닙니다.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다 먹으면 됩니다.”

“야! 누가 그따위로 먹고 일하래?”

재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저 성질머리. 이경은 평온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지만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찼다. 권 회장님 말대로 저 성질머리로 장가는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장 옷 입고 따라 나와.”

재하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삼각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는 게 익숙했다. 로펌에 있을 때도 안지혜 변호사가 밥 먹자고 데리고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편의점 음식을 먹었다.

그런 음식들은 점심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말을 하면 서재하는 분명 성질을 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경은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코트를 입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 이경은 문을 꼼꼼히 닫고 몸을 돌렸다. 벽에 기대 서 있는 재하가 보였다. 뭐가 불만인지 부루퉁한 얼굴이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게 자랑이야? 누가 그딴 식으로 끼니 때우래? 밥다운 걸 안 먹으니까 매일 체하지.”

이경에게 재하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한 번만 더 밥 제대로 안 챙겨 먹기만 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재하가 성큼 이경의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 같은 잔소리였다. 엄마도 매일 저런 잔소리를 했었다. 밥을 잘 안 먹으니까 그런 거야. 머리가 아파도, 발목이 시큰거려도, 엄마는 모두 밥을 잘 안 먹는 탓으로 돌렸다.

엄마에게 들었던 잔소리를 이제는 이경이 하경에게 하고 있었다. 정작 이경은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지만 하경에게는 매일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재하에게 밥 잘 먹으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하경이 된 것 같아 이경은 쿡 웃었다.

“왜 또 그렇게 웃어.”

재하가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웃어야 하는데. 이경은 웃음을 거두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재하를 보았다.

잠시 후, 얼굴에서 손을 내린 재하가 한숨을 내쉬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경은 빠른 걸음으로 재하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재하는 문이 닫히자마자 이경 쪽으로 몸을 틀었다.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로 서서 재하가 입을 열었다.

“뭐 먹고 싶어? 햄버거, 이딴 거 빼고. 삼각 김밥 같은 영양가 없는 음식 말하면 차이경 새벽 3시까지 부려 먹을 거야.”

새벽 3시까지 일하는 게 뭐 큰 벌이라고. 로펌에서는 1시, 2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인 이경은 3시까지 부려 먹는다는 재하의 말이 별로 벌 같지도 않았다.

“제대로 말해. 제대로.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밥버거 먹겠습니다.”

“됐어. 네 의견 따위 안 물어.”

밥버거라는 말에 재하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이경을 사나운 눈으로 보았다.

농담한 건데. 이경은 머쓱한 얼굴로 입가를 끌어 올렸다.

“진짜 확 그냥…….”

이경을 가만히 보던 재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으로 휙 나가 버렸다.

확 그냥 뭐. 이경은 재하의 뒤를 쫓아가며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재하는 이경을 차에 태우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이경의 의견 따위 묻지 않겠다던 그는 그녀를 갈비탕집으로 데려갔다.

가게는 작고 소박했다. 테이블이 몇 없는 낡고 오래된 곳이었다.

이경은 재하가 이런 곳을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비싸고 좋은 곳만 갈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도 왔네.”

자리에 앉아 있자 주인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겉절이 김치와 양파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런가?”

재하가 씩 웃으며 주인 할머니를 보았다.

“자주자주 좀 와. 안 오면 섭섭하지.”

“대신 이렇게 예쁜 아가씨 데리고 왔잖아.”

재하가 이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잘했네.”

주인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경을 보았다. 참 곱다,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가져왔다.

이경은 얼른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포개져 있는 스테인리스 컵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았다. 물을 따르려는데 재하가 먼저 물병을 집었다.

“자주 오시나 봐요.”

“종종.”

이경의 물음에 대답하고, 재하는 물을 따른 잔을 건넸다.

“맛집 같은 곳이에요?”

이경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맛이 있기는 해.”

재하는 애매하게 대답을 했다.

“맛있어 보입니다.”

이경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배추겉절이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많이 먹어. 그래야 많이 팔아 주지.”

재하는 주방 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네, 많이 먹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하지는 말고.”

“체하면 전무님께서 따 주실 거잖아요.”

“하, 진짜 돌겠네.”

이경의 말에 재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딴에는 친한 척 좀 한 건데 재하의 반응에 이경은 머쓱해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시 고개를 든 재하가 이경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끼 부리지 마, 차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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