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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6화 (26/83)

26화

늦가을,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이경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코트를 여몄다. 하경의 말대로 얇은 겨울 코트를 입고 오길 잘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경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차렸다.

“팀장님.”

이경이 부르자 성현이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차 변호사였네.”

성현이 이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 퇴근하세요?”

“응, 차 변호사도 퇴근?”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현의 옆에 섰다.

곧 문이 열리고 이경과 성현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은 퇴근 빠르네?”

“일이 별로 없었어요.”

정작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경의 기준으로는 평소보다 빠른 퇴근이었다. 보통은 한두 시에 퇴근했으니 11시면 빠른 편이긴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 이경과 성현만 있었다. 고요함의 무게가 이경의 가슴을 지그시 밟았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 변호사.”

그때, 성현의 목소리가 고요함을 갈랐다.

“네.”

이경이 대답을 하며 성현에게로 몸을 틀었다.

“시간 괜찮으면 술 한잔할래?”

“네, 하겠습니다.”

술 한잔하자는 성현의 말에 이경은 고민하고 말고 할 것 없이 즉각 대답했다.

일을 빨리 마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성현을 보았다.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싶어 점점 창피해지려는데 성현이 입을 열었다.

“싫다고 할까 봐 떨렸는데.”

“그럴 리가요.”

어떻게 성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경은 작게 고개를 휘저었다.

“기쁘다. 차 변호사가 나랑 술 마셔 준다고 하니까.”

이경은 성현의 말에 작게 웃기만 했다. 저도 기뻐요,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성현은 이경을 로펌에서 멀지 않은 라운지 바로 데려갔다. 와인과 토마토 카프리제가 금방 이경의 앞에 놓였다.

“마시기 나쁘지 않을 거야.”

성현이 이경을 보며 말했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이경을 위해 성현은 일부러 도수가 낮은 와인을 시켜 주었다.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살피는 듯한 성현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와인 잔을 입에서 뗀 이경은 배시시 웃었다.

“맛있어요.”

“다행이네.”

그제야 성현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흘러나오는 음악만큼이나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예준의 얘기까지 흘러갔다.

“내가 예준이한테 권리 없다는 말 이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네.”

이경은 언젠가 성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후회한 적 없었어. 서로 원하는 걸 가져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쪽은 내 성을 가져가고, 난 파트너 변호사가 되고.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지.”

“……지금은 후회하세요?”

이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준이가 자라더라.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던 아기가 자라서 지금은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느끼고 알아 가고. 그게 두려워. 예준이가 모든 걸 알게 될 순간이.”

성현이 씁쓸한 얼굴로 와인 잔을 매만졌다.

생물학적 아빠는 아니었지만 성현은 예준에게 좋은 아빠였다. 그리고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성현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분이세요, 팀장님은.”

“차 변호사가 그런 말 하니까 민망하네. 차 변호사가 더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자꾸만 미안해져.”

“…….”

미안해진다는 성현의 말에 이경이 말없이 그를 보았다.

“예준이 말고도 미안해질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씁쓸한 얼굴로 성현은 말을 이었다.

성현의 말에 이경의 가슴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파동은 천천히 퍼져 나가 기대와 설렘을 만들어 냈다.

“제겐 안 미안해하셔도 됩니다.”

이경이 수줍은 얼굴로 웃었다.

성현은 가만히 이경을 바라보았다.

“차 변호사 좋은 사람이야. 내가 감히 미안해해도 되나 싶을 만큼.”

“…….”

성현의 말에 이경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살짝 멍이 든 엄지손가락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설픈 재하의 실력 때문인지 그가 따 준 자리에 푸른 멍이 들었다.

한순간에 생각이 재하에게로 흘러갔다. 덩치도 크고, 손도 큰 양아치면서 손 하나 따는 거로 벌벌 떨던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손 하나 따는 일에 그렇게 떨면서 사람은 어떻게 때렸나 싶다. 재하를 생각하며 웃던 이경이 고개를 들어 성현을 보았다.

“서 전무님이 예준이 자전거 사 주셨어요?”

“어.”

“예준이 좋아했겠네요.”

“금방 배우더라. 운동 신경이 좋아. 나 닮았…….”

말을 하던 성현이 멋쩍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닮을 수 없음에도 닮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 사이. 이경은 예준에 대한 성현의 진심이 느껴졌다.

훗날 예준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성현을 원망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준이 성현의 진심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저도 자전거는 아빠가 가르쳐 주셨어요.”

“자전거 잘 타?”

“꽤 타요.”

성현의 물음에 이경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 라이딩 가자.”

“네.”

재하도 자전거를 잘 타는지 궁금해하며 이경이 성현의 말에 대답했다.

***

“WR 산업에서 차 변호사 파견 근무 요청 왔어.”

“파견 근무요?”

성현의 말에 이경이 느리게 눈을 껌벅였다.

방으로 오란 소리에 급한 일 제쳐 두고 달려왔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쁜 일은 아니야. 현장 경험 쌓기에도 좋고. 요즘은 주니어들 굳이 해외 안 보내고 기업으로 많이 돌리기도 하고.”

“네.”

“WR 산업 쪽에서 파견 근무하면 건설 팀 일에도 도움 되고.”

“얼마나 있어야 하는 겁니까?”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성현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언제부터 가야 합니까?”

“그쪽에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대. 마무리해야 할 일들 있어?”

“오늘 안에 처리 가능합니다.”

“그럼 내일부터 가는 거로 해 둘게.”

“네.”

“…….”

얘기가 다 끝난 것 같은데 성현은 나가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경은 눈을 한 번 굴리고는 얌전히 성현의 앞에 서 있었다.

“서 전무 요청이야.”

한참 만에 성현이 입을 열었다.

“서 전무님이요?”

“파견 가는 거 차 변호사한테 도움 되는 일인 건 확실한데, 내 욕심으론 안 보내고 싶어.”

“…….”

“좀 더 옆에 두고 싶다고, 차 변호사.”

성현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이경을 올려다보았다.

이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얼굴을 붉힌 채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잘 배우고 와, 차 변호사.”

“감사합니다, 팀장님.”

“나가서 일 봐.”

“네.”

이경은 꾸벅 인사를 하고 성현의 방을 나왔다.

서 전무 요청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전또 지겹게 보겠네,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재하가 손을 따 준 이후로 자꾸 그랬다. 일을 하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퇴근하는 길에도 덜덜 떨며 손을 따 주던 재하의 모습이 생각났다.

찔러 놓고 피가 나니까 놀라던 그 모습도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마침 지나가던 안지혜 변호사가 이경을 발견하고 물었다.

“안 변호사님.”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어?”

“아닙니다.”

“뭔지 같이 알자. 사는 거 재미없어 죽겠단 말이야.”

지혜가 자연스럽게 이경의 팔짱을 끼고 휴게실 쪽으로 데려갔다. 휴게실 의자에 이경을 앉히고 지혜는 커피를 가져왔다.

“저 내일부터 WR 산업 파견 근무 가요.”

“파견 근무? 지금 보니까 좋아서 웃은 게 아니었네. 서전또 매일 볼 생각에 차 변 정신 줄 놓은 거였구나.”

지혜가 이제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경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 전무님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전또가?”

“귀여운 구석도 있으신 것 같고.”

“귀여워? 서전또가 귀여워?”

지혜는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그러게요. 귀여우면 안 될 사람 같은데.”

이경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차 변, 스톡홀름 증후군 뭐 이런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이경은 지혜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차 변호사 잘 버텨서 마음 놓여.”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변호사님.”

“아이고, 감사할 것도 많네요.”

지혜가 피식 웃으며 이경을 보았다.

지혜 덕분에 이경은 송하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혜에게는 항상 고마웠다.

“파견 근무 적응 좀 되면 제가 저녁 사 드릴게요.”

“차 변호사가 사 주는 저녁 먹을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겠네.”

지혜는 커피만큼이나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이경은 지혜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마셨다.

***

재하의 옆에 선 이경은 입가를 끌어 올렸다. 오늘부터 WR 산업으로 출근을 했다. 당연히 법무 팀에서 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차이경 책상. 크고 좋지? 나처럼.”

팔짱을 낀 채로 재하가 앞에 있는 책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굉장히 크네요. 굉장히 많고.”

재하의 옆에 선 이경은 그 커다란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 호텔에서 했던 일이랑 같아.”

“법적으로 문제 될 만한 것들 추리란 말씀이시죠?”

이경이 재하 쪽으로 몸을 틀고 그를 보았다.

“문제될 만한 거, 수상해 보이는 거, 전부. 그것들은 따로 빼서 나한테 퇴근하기 전에 가지고 와.”

재하가 이경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외부로 자료 유출 안 돼. 이것들은 이 사무실 안에서만 봐.”

재하가 쌓여 있는 서류 위에 손을 얹었다.

“네.”

이경은 대답하며 작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재하는 이경을 법무 팀 대신 전무실 옆의 사무실로 데려왔다. 커다란 책상과 동그란 회의용 테이블, 캐비닛이 전부인 방이었다.

“핸드폰으로 자료 찍는 거 당연히 안 돼.”

“네.”

“너 감시하려고 카메라도 달아 놨어.”

재하가 책상에 기대서며 문 위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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