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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5화 (25/83)

25화

“서 전무님?”

이경이 얼굴만 가만히 보고 있는 재하를 불렀다.

“가.”

이경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하가 성큼성큼 차로 향했다. 정말 끌어안을 뻔했다.

미친 척하고 끌어안아 볼 걸 그랬나.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재하가 차에 탔다.

자주 가는 와인 바를 향해 운전하는데, 옆에서 이경이 연신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꾹꾹 누르는 게 보였다. 황 비서가 체했을 때 하는 행동이라 신경이 쓰였다.

“왜? 또 속 불편해?”

재하가 힐끔 이경을 보았다.

“체한 모양입니다.”

아픈 주제에 이경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와 표정이라 재하는 더 신경이 쓰였다.

“뭘 그렇게 잘 체해.”

“원래 잘 체합니다. 불편한 자리에서 먹으면 특히 더.”

“은근 예민하네. 안 그럴 것 같은데.”

불편한 자리였다는 걸 은근히 티 내는 이경 때문에 재하는 미안했다. 곰 같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예민한 편인가 보다.

그러다 며칠 전 팥죽을 먹고 체한 이경이 떠올라 재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팥죽 먹었을 때, 나랑 먹는 게 불편했어?”

기분 상하네. 내가 뭐 어때서. 내가 저를 잡아먹길 해, 뭘 해. 재하가 사나운 얼굴로 이경을 쳐다보았다.

“그땐…….”

이경이 기억을 더듬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됐어, 말하지 마.”

무슨 말이 나오든 상처받을 것 같아 재하는 이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이럴 때만 말 잘 듣는 차이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재하였다. 차이경을 어떻게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숨을 푹 내쉰 재하는 저만치 약국이 보여 차를 세웠다.

“약 사 올게. 있어.”

“약 있습니다. 그때 사 주신 거. 가방에 있어요.”

이경이 얼른 말했다.

안전벨트를 풀던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괜히 기분이 흐뭇해진다. 내가 사 준 약을 아직도 애지중지 품고 있었구나 싶어 입가가 씰룩인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네. 장소 이동하면 그때 먹겠습니다.”

“그래, 그럼.”

재하는 다시 안전벨트를 맸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속력을 냈다.

재하는 원래 가려던 와인 바 대신 이경을 호텔로 데려갔다. 자주 가던 바에서 와인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체했다니 술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얌전히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스위트룸으로 이경을 데리고 들어온 재하는 이경을 소파에 앉히고 생수부터 건넸다.

“무식하게 손 따지 말고 약 먹어.”

“약도 먹고, 손도 따겠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집부려서 섹시하네, 차이경.”

“감사합니다.”

이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가방에서 지난번에 재하가 사다 주었던 약과 반짇고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젠장, 돌겠네. 늘 보던 얼굴로 감사합니다, 한마디 한 건데 몸은 왜 이 지랄이야. 재하는 딱딱해지는 하체가 어이없었다.

“너 가루약은 어쨌어?”

알약을 먹는 이경을 지켜보다 재하는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때 사 온 약은 알약과 가루약 두 종류였는데 테이블 위에는 알약만 올라와 있었다.

“…….”

꿀꺽 알약을 삼킨 이경이 재하를 빤히 보았다.

“이게 또.”

지난번에도 가루약 안 먹으려고 하더니 이번에도 은근슬쩍 안 먹을 속셈인가 보다. 그게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재하는 결국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선을 피하는 이경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재하는 이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놓은 이경의 가방에서 재하는 기어이 약봉지를 찾아냈다.

“그건 별로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먹어. 왜 안 먹어?”

약봉지에서 한방 소화제를 꺼내 이경의 손에 쥐여 주었다.

반쯤 포기한 얼굴로 이경은 결국 가루약도 먹었다.

그때처럼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게 뭐라고 야하고 귀엽고 난리도 아니었다. 재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다시 이경을 보았다.

벗기고 싶게, 진짜. 재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경을 향한 욕망을 삼켰다.

이경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반짇고리에서 실과 바늘을 꺼냈다. 혼자 또 씩씩하게 엄지손가락을 실로 둘둘 만다.

저 바늘로 사정없이 제 손을 찌르겠지. 독한데 섹시하네. 짠하기도 하고.

“줘.”

이경이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찌르기 전에 재하가 실을 감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그 바늘 주라고.”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 사혈이라고 생각하시면…….”

못 따게 막는 줄 알았는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다.

확 입 맞춰 버릴까 보다. 말을 늘어놓는 이경을 귀엽다고 생각하며 재하는 말을 끊었다.

“내가 따 준다고.”

“전무님께서요?”

언뜻 못 미더운 표정이 이경의 얼굴에 떠올랐다.

“응.”

혼자 제 손가락 바늘로 푹 찌르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직접 피를 내는 게 안쓰러웠다.

아플 때 옆에서 챙겨 줄 사람도 없었는지 이경은 혼자 손 따는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고된 차이경의 삶 일부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딸 수 있으세요?”

“그냥 찌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이경이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잡고 있는 이경의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찌를 데가 어디 있다고 찔러. 재하는 바늘로 찌르는 대신 그 안쓰럽고 애틋한 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경이 마지못한 얼굴로 재하에게 바늘을 내밀었다. 작은 바늘을 받아 든 재하는 힐끔 이경을 보았다.

재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경이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얽혔다.

“못 하시겠으면…….”

“해. 내가 한다고.”

재하는 바늘을 이경의 손가락으로 가져갔다. 엄지손가락을 찌르려는데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손가락을 어떻게 찔러. 당황스러울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그때,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웃는 이경의 얼굴이 보였다.

입을 벌리지도 않았고, 얼굴 근육을 크게 쓰지도 않았다. 미소에 가까운 작은 웃음이었는데 재하는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고작 웃는 얼굴일 뿐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예뻐. 이게 정말 뭐라고. 재하는 바늘을 든 채 멍하니 작은 웃음을 짓는 이경을 바라보았다.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서 전무님, 재능 없으신 것 같습니다.”

재하가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이경의 얼굴에는 웃음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평소의 그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재하가 말했다.

“기어오르는 게 매력이지, 차이경은.”

모난 말에 떨리는 심장을 감추고 재하가 조심스럽게 이경의 엄지를 바늘로 찔렀다. 꽤 세게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피가 나지 않았다.

“더 세게 찌르셔야 합니다.”

“이것보다 세게?”

“제가 따끔할 정도로요.”

“안 따끔했어?”

“네.”

이경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낮게 욕을 내뱉고 재하는 바늘로 좀 더 세게 이경의 손을 찔렀다. 이번에는 너무 세게 찔렀는지 손이 움찔거렸다.

“어어. 미안, 미안해.”

재하는 반사적으로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며 이경의 엄지에 몽글몽글하게 올라온 피를 보았다.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 당황한 재하는 이경의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놀랐는지 이경이 황급히 재하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고개를 든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피만큼이나 붉었다.

“아팠지?”

“괜찮…… 습니다.”

“힘 조절을 못 했나 봐.”

재하가 머쓱한 얼굴로 티슈를 뽑아 피가 다시 올라온 이경의 손가락을 꾹 눌러 지혈했다.

한동안 말없이 지혈하던 재하는 부드럽게 이경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이렇게 어려운데 차이경은 왜 익숙해?”

재하가 이경을 보며 물었다.

이경은 가만히 재하를 보다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그다지 어려운 일 아닙니다.”

“주변에 이거 따 줄 사람도 없었어?”

이경의 온기가 빠져나간 재하의 손에는 허전함이 가득 남았다. 허전함을 흘려보내며 묻자, 이경은 그 덤덤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예전에는 엄마가 따 주셨는데 돌아가신 이후로 제가 따요.”

“야, 너는…….”

무슨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해. 사람 심란해지게. 재하는 말을 삼키고 아직 따지 않은 이경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내가 연습을 해 볼게. 잘 찌르도록.”

“전무님이 왜…….”

“직원 복지라고 생각해. 내 사람이라며?”

재하가 이경의 엄지에 실을 감으며 말했다.

“좀 더 세게 감으셔야 합니다.”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경이 입을 열었다.

“세게?”

아플까 봐 살짝만 감았더니 그러면 안 되는 모양이다. 재하는 실을 풀고 다시 엄지에 감았다.

“이 정도면 돼?”

“네.”

“찌를 거야.”

“세게 찌르십시오.”

“말 안 해도 세게 찔러.”

재하가 바늘로 엄지를 찔렀다. 이경의 손이 다시 움찔거렸다.

검붉은 피가 동그랗게 올라왔다. 피가 나자마자 이경은 얼른 티슈로 피를 눌러 닦았다.

이제 이경의 손을 놓을 시간이었다. 재하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이경의 손을 놓았다.

“감사합니다.”

“응.”

이경의 인사에 재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손 따 준 거 오랜만이에요.”

“체하면 와. 내가 따 줄게.”

재하의 말에 이경은 말없이 입가를 올렸다.

재하는 이경을 가만히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안 될 것 같다. 빨리 차이경 집에 보내야지.

“나와, 차이경.”

“네?”

“빨리 일어나. 나가게.”

재하는 성큼성큼 문 쪽으로 향했다. 객실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재하가 떠올린 건 작게 올라간 이경의 예쁜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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