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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4화 (24/83)

24화

유설의 말에 이경은 얼굴로 열이 올랐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도 뛰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만 같다.

“나랑 성현 씨 이혼한 건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유설의 물음에 이경이 침을 한 번 삼키고 대답했다.

“그만해, 예준 엄마.”

성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그 호칭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꼬박꼬박 그렇게 부르더라.”

“…….”

“일부러 그러는 거야?”

성현이 말이 없자 유설이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경은 문득 예준이 걱정되어 어린이 의자에 앉아 있는 예준을 보았다. 예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듣지 못한 척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예준 대장, 아저씨랑 화장실 갈래?”

그때,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준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혼자 화장실 가면 무섭잖아. 대장이 같이 가 줘야지.”

“네.”

예준이 헤헤 웃으며 재하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재하는 그대로 예준을 데리고 테이블을 떠났다.

“적당히 좀 해. 예준이 생일이야.”

예준이 떠나자 성현이 화가 난 얼굴로 유설에게 말했다.

“내가 뭘?”

“예준이 아직 다섯 살이야. 어린아이라고.”

“위선 떨지 마, 성현 씨. 당신 친아들도 아니면서 걱정하는 척하지 마. 당신은 그저 성만 빌려준 거야. 그걸 아직도 모르면 어떡해.”

유설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유설의 이야기를 들은 이경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예준이 성현의 친아들이 아니라니. 성현과 눈이 마주친 이경은 얼굴에 떠오른 당황을 지웠다.

“예준이가 나 아빠로 알고 있어. 그럼 걱정할 자격 정도는 돼.”

“걱정만 해. 나한테 감히 충고 같은 거 하지 말고. 내가 예준이 안 가졌으면 당신 같은 개천 용이랑 결혼 안 했지.”

“그럼 차라리 내가 키울게. 예준이 보내.”

한숨을 내쉰 성현이 입을 열었다.

성현의 말에 유설은 까르르 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이경 변호사, 이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다 들어서 대충 알겠죠? 나랑 이 사람 어떤 상황인지. 생물학적 아버지도 아닌 사람이 내 아들을 키우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요?”

“…….”

이경은 유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성현의 눈치만 보았다. 성현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경은 마음이 아팠다.

“애 딸린 이혼남보다는 그냥 이혼남이 훨씬 나아. 안 그래요, 차 변호사?”

“그만하자.”

성현은 한숨을 내쉬고 물을 마셨다.

“난 당신이 날 한심하게 보는 그 눈빛이 싫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 품고 당신이랑 결혼한 거 난 뭐 쉬웠는지 알아?”

“우리 얘긴,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해.”

“차 변호사 앞이라 창피해?”

“다른 날도 아니고 예준이 생일이야. 애 하루 마음 편하게 해 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쟤를 축복해야 돼? 쟤 때문에 내 인생 망가졌는데?”

유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악에 받친 말투였다.

“네 잘못이야. 예준이 잘못 아니고.”

“난 당신이 이럴 때마다 돌 것 같았어. 그래서 우리가 이혼한 거고, 우리 이혼으로 제일 상처받은 건 예준이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이경은 숨이 막혔다. 합석하자고 한 재하가 얄미운 걸 넘어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행히 전채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언쟁은 끝을 맺었다. 이경은 음식을 먹기도 전인데 체한 기분이었다.

***

“이건 예준 대장과 아저씨의 비밀이야.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재하는 솜사탕이 묻어 끈적한 예준의 손을 방금 사 온 물티슈로 닦아 주며 말했다.

“네.”

예준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솜사탕 먹은 거 절대 비밀로 하고, 다시 돌아가면 나온 음식 싹싹 다 먹기.”

“네!”

예준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재하는 몇 걸음 떨어져 있는 편의점으로 예준을 데려갔다.

먹고 싶은 거 사라고 했더니 솜사탕 하나를 집어 들었다.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솜사탕을 먹는 아이는 레스토랑에서보다 행복해 보였다.

“생일 선물 뭐 가지고 싶어? 아빠 통해서 아저씨가 보내 줄게.”

“음.”

예준은 오래도록 고민했다. 그러다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자전거요.”

“자전거? 예준 대장 자전거 잘 타?”

“못 타요. 아빠가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우리 아빠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봐요.”

예준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가 자전거 사 줄게.”

재하는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요?”

“아빠랑 공원 가서 자전거 타면 되겠다.”

“헤헤.”

예준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몸을 들썩거렸다.

예준을 보는 재하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빠에게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다. 친구인 하준오도 그랬고, 배다른 동생인 서주환도 그랬다.

하지만 재하는 아빠에게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워낙에 바쁜 사람이라 아들 자전거 가르쳐 줄 시간은 없었겠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재하의 착각이었다. 어른이 되고 안 사실이었지만 주환은 아버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사춘기 소년도 아니었지만 그게 어찌나 서럽던지 한동안 재하는 자전거가 꼴도 보기 싫었다.

“예준 대장은 아빠가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예준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윤성현이지만 그래도 좋은 아빠인가 보다. 재하는 예준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밥 꼭꼭 씹어 먹기다.”

“네!”

예준이 재하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예준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오자마자 보인 것은 하얗게 질린 이경의 얼굴이었다. 힐끔거리며 성현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차이경, 그런 표정으로 윤성현 보지 마. 불쾌한 기분이 재하의 몸으로 스멀스멀 퍼졌다.

재하는 예준을 어린이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전채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예준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영양가 없는 잡담들이 오갔다.

예준은 재하와 약속한 것이 있어서인지 제 몫으로 나온 음식들을 꼭꼭 씹어 먹었다. 단 솜사탕을 먹여 잘 안 먹을 줄 알았는데 기특했다.

“윤 변호사, 자전거는 잘 타지?”

“네.”

재하의 물음에 성현이 갑자기 그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일 선물로 자전거 사 주기로 했거든.”

재하가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과합니다.”

성현이 딱 잘라 말했다.

성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준이 울먹울먹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생일에 애 속상하게 하면 되나. 재하는 괜찮다는 듯 예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이랑 이미 약속했어. 나 실없는 사람 만들지 말고.”

“감사합니다, 서 전무님.”

재하의 말에 성현 대신 유설이 대답했다.

그제야 성현도 마지못해 재하에게 감사하다 인사했다.

“아빠가 진짜로 나 자전거 가르쳐 줄 거야?”

예준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윤예준.”

유설이 얼굴이 찌푸리며 예준을 불렀다.

예준은 엄마의 얼굴에 흠칫 놀라며 눈치를 보았다. 재하는 그 장면이 참 거슬려 결국 입을 열었다.

“김 작가님은 아들을 뭐 그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시나.”

그러자 유설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아빠가 가르쳐 줄게.”

성현이 예준에게 말했다.

그제야 예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내 어둡던 이경의 얼굴도 풀어졌다. 재하는 예준과 이경의 얼굴빛이 좋아진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정한 이경의 눈빛이 성현에게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기분 더럽네. 성질 같아서는 이경을 당장 데리고 나가고 싶었는데 예준이 있어서 참았다.

비록 이혼했지만 윤성현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는 남자라는 것을 차이경에게 제대로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합석했는데 후회만 들었다.

왜 나갔다 온 사이에 윤성현을 보는 차이경의 눈빛이 더 애틋해진 건지.

“예준이 좋겠다.”

재하가 이경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예준을 보았다.

예준은 히히 웃으며 아까 전 나온 디저트를 먹었다.

예준의 디저트 접시가 말끔해졌을 무렵,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시고. 밥값은 내가 내고 갑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내겠습니다.”

성현이 재하의 말을 거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족끼리 있는데 불청객은 이만 빠져야지. 김 작가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차이경, 일어나.”

재하가 유설에게 인사를 하고 이경에게 고갯짓했다.

“아, 네.”

이경이 얼른 가방과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은 예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성현과 유설에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재하는 이경이 인사를 끝내자마자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쫓아오는 이경의 발걸음 소리가 만족스러웠다.

밖으로 나온 재하는 옆에서 숨을 몰아쉬는 이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리가 꽤나 부담스러웠는지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알찬 시간이었지?”

“네에.”

떨떠름한 이경의 대답이 들려왔다.

재하는 이경이 말끝을 늘이며 대답할 때가 좋았다. 이경은 표정의 변화가 큰 사람이 아니었다. 표정이든 목소리든 늘 단조로웠다.

그래서 “네에.” 하고 대답할 때면 평소와 달리 사람이 참 귀여워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예준이처럼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은 걸 참으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뭘 말씀입니까?”

“술 한잔할래?”

“저한테 선택권이 있는 겁니까?”

무심한 표정으로 이경이 재하를 보았다.

“당연히 없지.”

재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아 보고 싶네. 재하는 이경을 가만히 보며 생각했다.

안으면 말랑말랑할 것 같다. 아니지, 저렇게 뼈밖에 없으니 딱딱할 수도. 한번 안아 보자고 하면 미친놈 취급하겠지. 미친놈 취급하는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재하는 이경을 향해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지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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