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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3화 (23/83)

23화

“꼭 놀아야 합니까?”

이경이 입을 열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경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누구인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이경은 하경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핸드폰을 바꿔 잡았다.

—아니.

“그럼 거절하겠습니다.”

—안 놀 거고, 일할 거니까 나와.

재하의 기분이 어떤지 다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에 가시가 있었다. 삐쳤구나. 이경은 재하의 상태를 바로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안 되고 4시쯤 뵈어도 될까요?”

—5시까지 너희 집 앞으로 갈게. 미리 말하는데 토 달지 마.

토를 달 사이도 없이 재하가 전화를 뚝 끊었다.

서전또. 이경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누구야? 또 나가?”

하경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의뢰인이 상담을 요청해서. 미안해.”

“아니야. 나는 언니 걱정돼서 그러지.”

“효진이 불러서 치킨 시켜 먹고 놀고 있어.”

“응.”

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바쁜 언니를 이해해 주고 걱정해 주는 하경이 기특했다.

서재하가 하경이 반만 돼도 권 회장님이 걱정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소스가 묻은 하경의 입가를 티슈로 닦아 주었다.

돈가스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밀린 집안일을 했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하경이 먹을 밑반찬들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5시가 가까웠다. 이경은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외출했다 돌아온 이후로 하경은 계속 잠을 잤다. 몸이 약한 탓에 한 번 외출을 하고 나면 하경은 몇 시간이고 잠을 잤다.

이경은 하경의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방을 나왔다. 식탁 위에 3만 원을 꺼내 놓고 나갔다 온다는 쪽지를 붙여 놓았다.

식탁에서 돌아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재하였다.

“네, 전무님.”

—나와. 집 앞.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어졌다.

통화 한번 참 간결하네, 투덜거리며 이경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빌라를 나와 보니 재하의 차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경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창문을 똑똑 노크했다. 재하가 뭐 하냐는 시선으로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뭐야, 타.”

“네.”

예의 차려 인사한 것뿐인데 동네 바보 보듯 하는 재하 때문에 이경은 좀 기분이 상했다. 이경은 다시 조수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조수석에 타자마자 다시 인사를 하자, 재하가 이경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인사를 몇 번을 해.”

“…….”

이경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맸다.

재하가 이경을 못마땅한 얼굴로 한 번 보고 운전을 시작했다. 동네를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이경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밥 먹으러.”

“네.”

“일하러 가는 거 아니고 밥 먹으러 가는 거라고.”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서재하가 파악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과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나온 거야?”

“네.”

“왜?”

힐끔 재하의 얼굴을 보니 입가가 씰룩이고 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파악이 안 되는 얼굴이다.

“제 의뢰인이시니까요. WR 그룹 서재하 전무님 정도면 어느 누구라도 나왔을 겁니다.”

“솔직하고 좋네, 차이경. 속물적인 것도 아주 마음에 들어.”

씰룩이던 재하의 입가가 한일자로 굳어 버렸다.

삐친 모양이다. 이경은 말없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랑이고 싶은 거면 성실하게 딸랑여. 내 발도 핥을 수 있겠다는 자세로 딸랑이라고.”

“그런 걸 원하십니까?”

창밖을 쳐다보던 이경이 재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재하 발 핥는 것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핥으라고 하면 핥을 거야?”

신호가 걸리자 재하가 바로 이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런 표정 하지 마. 발 핥는 건 나도 싫어. 다른 거면 모를까.”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었으면 합니다.”

“뭘 생각했는데?”

“…….”

“뭔데, 차이경.”

“그냥 여기저기 구석구석…….”

이경이 말끝을 흐렸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재하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재하는 침묵을 유지했다.

이경이 힐끔 재하의 눈치를 살폈다. 재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경의 귀가 붉어졌다.

“차이경, 변태야?”

한참 만에 재하의 입이 열렸다.

“아니요.”

“근데 왜 생각이 거기로 튀지? 유경험자이신가?”

재하가 한껏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이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경험자이긴 했지만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난 입술 생각했어. 근데 여기저기, 구석구석이 튀어나와?”

“네에.”

“뭐가 ‘네’야!”

재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저놈의 성질머리. 성질은 내면서도 성실하게 전방은 주시하고 있다. 씩씩거리며 운전을 하는 재하는 한눈에도 몹시 기분이 나빠 보였다.

“화나셨습니까?”

대체 왜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서재하 수준에 맞춰서 대답해 준 건데 그게 이렇게 성질낼 일인가.

재하는 거칠게 운전을 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재하는 투덜거렸고,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일관했다.

“어떤 놈이랑 어떻게 놀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서 지워.”

라고 재하가 말하기에-.

“그런 기억 없습니다. 그러니 지울 것도 없습니다.”

대답했더니 그제야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순해진 재하가 데려간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막 자리에 앉았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경은 느리게 눈을 껌벅였다.

“뭘 그렇게…… 윤 변호사네?”

이경의 시선을 따라가던 재하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성현을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성현의 곁에는 예준과 예준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있었다.

언뜻 단란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었지만 웃고 있는 건 성현과 예준뿐이었다. 예준의 엄마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경의 시선은 성현을 지나 예준의 엄마에게 향했다. 어떤 여자였는지 늘 궁금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성현의 곁에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궁금하던 여자는 재하의 말대로 참 예뻤다. 누구나 미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여자였다.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았고, 우아한 미소를 지을 것 같았다. 문득 이경은 그 여자가 부러워졌다.

“잘 어울려, 그치?”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의 고개가 재하에게로 돌아갔다. 이경의 얼굴을 본 순간 재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숨을 푹 내쉰 재하는 사나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 표정 뭐야, 차이경.”

“…….”

왜 또 시비야. 말없이 재하를 보자,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에게 성큼 다가오더니 잡아 일으켰다.

메뉴판을 들고 오는 직원에게 재하는 성현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일행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이경을 데리고 성현의 테이블로 향했다.

이경은 재하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잡힌 손을 빼내고 싶었는데, 재하의 손이 하도 단단해 그럴 수도 없었다.

“아저씨다!”

이경과 재하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예준이었다.

“예준 대장, 오랜만.”

재하가 손을 들어 예준과 인사하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성현을 쳐다보았다.

“서 전무님.”

성현의 시선이 재하에게 닿았다가 그에게 손이 잡혀 있는 이경에게 닿았다. 찰나, 언짢은 표정이 스쳤지만 성현은 금방 그 표정을 지웠다.

“아는 사이니까 같이 좀 먹자고. 반갑습니다, 김유설 작가님.”

재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예준의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설은 빙긋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와 악수를 했다.

“서 전무님, 여기서 뵙네요.”

“여전히 아름다우시고.”

재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이경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차이경입니다.”

“송하 변호사.”

이경이 꾸벅 유설에게 인사하자, 재하가 덧붙였다.

“반가워요, 김유설이에요.”

이경은 유설이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림을 그리는 손은 부드럽고, 작았다.

이경과 유설이 악수를 하는 사이 재하는 성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같이 먹을 생각인 모양이다.

이경이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자, 유설이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이경은 불편한 그 자리에 끼게 되었다.

“누나, 누나.”

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예준이 반가운 얼굴로 이경을 향해 손을 뻗어 어리광을 부렸다.

이경은 웃는 얼굴로 예준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 순간, 유설이 예준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윤예준, 식사 자리에서 예의 지키랬지.”

예준은 엄마에게 혼이 나자 울먹울먹한 얼굴로 얼른 팔을 내렸다.

“예준 엄마.”

성현이 굳은 얼굴로 유설을 불렀다.

유설은 성현을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예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날이야, 윤 변호사?”

재하가 성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준이 생일입니다.”

“그랬어? 우리 예준 대장 생일이야?”

재하가 예준에게 물었다.

“네.”

예준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멋진 날이구나.”

재하는 예준에게 웃어 주고는 메뉴판을 살폈다.

음식 주문을 마친 테이블 위에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이경은 억지로 합석을 시킨 재하가 얄미웠다.

“차이경 변호사, 이이랑은 잘 아는 모양이에요?”

“네, 저도 WR 그룹 전담 팀입니다.”

유설의 물음에 이경이 얼른 대답했다.

“아.”

유설이 재하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과 성현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성현 역시 이 자리가 불편한 듯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성현 씨, 참 재미없죠? 무뚝뚝하고.”

“실력이 워낙 좋으셔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경은 다시 성현을 힐끔 보았다. 그러다 재하의 시선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다. 본인이 만든 자리면서.

“성현 씨, 좋겠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좋은 말도 해 주고. 차이경 변호사, 당신 타입이잖아.”

유설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풍경 소리 같은 웃음소리에 이경과 성현, 그리고 재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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