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여자 안 할 거면 적당히 해.”
심란한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이 옆을 돌아보았다. 재하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뭔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액상 소화제 뚜껑을 열며 이경이 눈을 껌벅였다.
“하.”
한숨을 내쉬며 재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얼굴에서 손을 뗀 재하의 귀가 붉었다.
“그거 먹고 집에 가.”
“집에요?”
액상 소화제를 입에 가져다 대려다 말고 이경이 재하를 보았다. 아직 봐야 할 서류가 잔뜩 남아 있었다.
“아픈 사람 부려 먹는 거 성가셔.”
“일 못 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닙니다.”
담담하게 말하고 이경은 액상 소화제를 마셨다. 이어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것들을 치운 후, 이경은 다시 소파에 앉아 일을 했다.
“독해, 차이경.”
그런 이경의 모습을 재하가 빤히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재하의 말에 이경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재하는 이경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쌓여 있는 서류 절반을 뚝 떼어 들고 이경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일할 수 있습니다.”
내쫓으려는 것 같아 이경이 입을 열었다. 서재하의 사람이 되고 처음으로 하는 일인데 열심히 해야지.
“그래, 해. 차이경, 일 좋아하니까.”
재하는 대답하며 이경을 침실로 끌고 갔다. 서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경을 돌아보았다.
“집에는 안 가겠다니까 누워서 해. 편하게.”
“잠들 것 같습니다.”
이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며칠째 새벽 퇴근이라 수면 부족 상태였다. 저렇게 안락한 침대에 누웠다가는 1분도 안 되어서 잠들 게 뻔했다.
“잠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한 시간 만이라도 누워 있다 나와.”
재하는 이경의 팔을 잡아 억지로 침대에 앉히고는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재하의 넓은 등을 보며 입가를 올렸다.
또라이에 양아치지만 생각보다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오늘 예준이랑 놀아 준 것도 그렇고. 서재하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
금요일과 토요일은 재하가 시킨 일을 하느라 시간을 모두 날렸다. 그 덕분에 이경은 일요일 아침 일찍 로펌으로 출근을 했다.
피곤한 것도 피곤한 것이지만 요 며칠 제대로 하경의 얼굴을 보지 못해 마음이 쓰였다. 옆에서 잘 챙겨 주고 싶지만 워낙에 바빠 여유가 없었다.
하경의 심장 수술비를 마련하려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바쁘게 일을 하던 이경은 머그컵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휴게실로 향했다. 커피를 내리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차 변호사.”
그와 함께 들려온 성현의 목소리에 이경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팀장님, 나오셨어요? 커피 드릴까요?”
성현을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이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응. 부탁해.”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성현의 몫까지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에게 머그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성현의 인사에 작게 웃고는 이경이 예준의 얘기를 꺼냈다.
“예준이는 집에 갔어요? 엄마랑 산다고 하던데.”
“하루 나랑 자고, 어제 예준이 엄마가 데려갔어.”
“네.”
대답을 한 이경이 머그컵을 만지작거렸다. 예준의 말이 계속 걸렸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는 말이. 아빠랑 살고 싶다던 아이의 바람이.
“……저기 팀장님.”
머뭇거리던 이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성현은 예준의 마음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응.”
말하라는 듯 성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예준이가 아빠가 더 좋대요. 아빠랑 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괜히 말했나. 팀장님에게 상처만 주는 거 아닐까. 걱정하며 이경이 성현의 얼굴을 살폈다.
말없이 머그컵을 매만지는 성현의 얼굴이 슬펐다.
씁쓸한 성현의 미소에 이경은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너무 주제넘었던 모양이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이경은 재빨리 사과를 했다.
“차 변호사가 왜 죄송해. 예준이 마음 나도 알고 있었어.”
성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어요?”
“응, 알고 있었지. 아빠니까.”
“…….”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성현의 모습에 이경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괜히 차 변호사만 신경 쓰게 만들었네. 미안해.”
“아닙니다. ……속상하시겠어요.”
“예준이가 제일 힘들지.”
성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한 모금씩 따뜻한 커피를 마셨고, 비슷한 속도로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경이 그만 일어나 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때였다. 성현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예준이에 대한 권리 없어.”
“…….”
이경은 성현의 말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아빠인데 왜 권리가 없을까. 양육권은 물론이고 친권까지 아이 엄마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시간 너무 오래 뺏었네. 들어가서 일해, 차 변호사.”
“네.”
성현이 더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준이가 차 변호사 얘기 많이 했어. 시간 날 때 밥 한번 살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경을 올려다보며 성현이 입을 열었다.
밥을 사 준다는 성현의 말이 기뻐 이경은 입가를 올리고 “네.” 대답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휴게실을 나가다 이경은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성현을 돌아보았다.
“……오늘 점심, 사 주세요.”
용기를 내어 이경은 말했다.
“시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성현의 물음에 이경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늦게 퇴근을 하게 되겠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12시에 내 방으로 와.”
“네.”
이경은 활짝 웃고는 재빨리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경은 책상 앞에 앉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괜히 설레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 차리려는 듯 이경은 고개를 흔들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12시 1분이 되자마자 이경은 종종걸음으로 성현의 방으로 향했다. 11시 50분부터 30초에 한 번씩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12시에 딱 맞춰 성현의 방으로 가고 싶었는데 너무 그러면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날 것 같아 참았다.
“차 변호사.”
그런데 성현의 방에 가기도 전에 이경은 성현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팀장님.”
“안 와서 데리러 가려던 참이지. 일에 빠져 있나 해서.”
성현이 이경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경은 멋쩍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성현이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뭐 먹고 싶어? 고생했으니까 먹고 싶은 거 사 줄게.”
“팀장님 드시고 싶은 거 먹어요.”
“시간 괜찮으면 좀 멀리 나갈까?”
“네, 좋아요.”
이경은 얼른 대답했다.
성현이 이경을 데리고 간 곳은 로펌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식당이었다.
“엄청 맛있어 보여요.”
이경은 테이블 위의 전복 솥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복 위로 파가 솔솔 뿌려져 있는 솥밥은 참 먹음직스러웠다.
“장 변호사랑 근처 왔다가 먹었는데 맛있더라고.”
“장 변호사님이랑 오셨어요?”
“장 변호사가 여기는 꼭 가야 한다고 해서. 미식가야, 장 변호사.”
성현의 말에 작게 웃은 이경은 그릇에 전복 솥밥을 옮겨 담고 버터와 간장을 넣어 쓱쓱 비볐다. 밥을 덜어 낸 솥에는 따뜻한 물을 부었다.
그 후 크게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버터와 솥밥의 재료들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맛있었다.
“입에 맞아?”
성현이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네, 맛있어요.”
“다행이네.”
성현은 안심한 얼굴로 그제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경은 잠시 성현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가슴에 비누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낯간지러운 기분에 자신도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자꾸만 배 속이 간질거렸다. 성현은 조용히 밥을 잘 먹고 있는데 자꾸만 혼자 그가 의식되었다.
성현은 젓가락질을 하는 동작이 참 깔끔했다. 물을 마시는 것도 괜히 멋져 보였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듯 이경은 성현을 바라보았다.
송하의 파트너 변호사, 팀의 팀장, 이혼남, 애 아빠, 성현을 둘러싼 것들이 모두 지워지고 윤성현이라는 사람 그 자체만 보였다.
동경을 담은 이경의 눈이 한동안 성현을 응시했다.
어느새 밥을 다 먹은 이경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맞은편의 성현을 보며 말했다.
“맛있었어?”
“네, 종종 생각날 것 같습니다.”
“생각나면 종종 데려와 줄게.”
성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말이 듣기 좋아 이경은 배시시 웃었다.
“자주 웃어. 웃으니까 예쁘다, 차 변호사.”
예쁘다는 말을 툭 던지고,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앞서 걷는 성현의 등을 보며 이경은 자신의 감정을 곱씹었다. 성현을 향한 감정이 정말로 존경과 동경뿐일까.
***
일주일 만에 재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처럼 로펌에 나가지 않은 토요일이었다. 하경과 조조 영화를 보고 돈가스집에서 돈가스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 평온한 시간을 방해라도 하듯 재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전무님.”
—차이경입니다, 안 하네?
핸드폰 너머 재하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저인 줄 아실 테니까요.”
—뭐 해?
“동생이랑 영화 보고 지금은 밥 먹고 있습니다.”
—동생이랑 놀아 주느라 바쁘구나.
“네.”
이경이 대답하며 하경을 보았다.
하경은 얼굴에 돈가스 소스를 묻혀 가며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동생이 잘 먹을 때면 이경은 뿌듯해 빙그레 웃음이 났다.
—저녁에는 나랑 놀아.
“…….”
별로 놀고 싶지 않아 이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이경.
이경이 대답이 없자 재하가 그녀를 불렀다.
“네.”
—나랑 놀자니까.
놀자고 조르는 재하가 귀찮아 이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 놀아야 합니까?”